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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비가 오려나'
문득 하늘을 바라본다
잔뜩 찌푸린 하늘은 금새라도 비가 쏟아질 듯 검은 구름이 가득 꿈틀거리고 있다
장마 기간이 끝났겠거니 생각했는데 오늘이 마지막 장맛비일지 모르겠다
"잘했다, 이제 슬슬 복귀해도 되겠어"
제 어깨를 툭 치면서 하는 말에 호준은 뒤를 돌아본다
어느새 저를 따라잡은 성균이 대견한 듯 어깨를 토닥한다
"괜찮었냐? 하이고 어찌나 떨리든지"
".... 그놈의 사투리만 안 쓰면 좀 더 나을 거 같다만"
엄살부리는 호준에 기겁한 듯 손을 떼고 한 발 물러선 성균은 그래도 조금 웃는 얼굴이다
그동안 아직까지 경영에 복귀하지 못한 호준을 대신해서 성균이 대부분의 대외 업무를 맡아왔지만
주요 투자자 미팅에만은 대표가 빠질 수 없었던지라
지난 일주일간 호준과 성균은 자투리 시간까지 모두 대표실에 틀어박혀 벼락치기를 했다
회사가 시작된 후 7년간의 모든 지식과 정보를 집어넣느라 호준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지만
절박해보이는 성균에게 실망을 주고 싶지 않았고 오가며 만나는 회사 직원들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어떻게든 그 정보를 모두 소화해냈다
그리고 오늘 점심에 있었던 투자자 미팅에서 약간의 사투리와 말실수로
성균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리는 순간이 몇번인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손대표 건강해진 얼굴을 보니 다행이라는 말까지 듣고, 무사히 지나간 것 같다
"그래도 그분들 모시고 티 안나게 넘어간 것만 해도 선방이야,"
"빡시게 공부 혔지, 망치믄 안된담서"
"차차 조찬이나 경제인 모임도 복귀해, 너 너무 얼굴 안 비춰서 안 그래도 요즘 소문 돌기 시작했으니까"
"하이고... 거그는 또 어찌 가나 모르것다"
"일단 지금 하던 일이나 잘하고"
"암만, 그거야 최선을 다하고 있제, 알잖냐"
씩 웃는 호준을 착잡한 표정으로 쳐다본 성균이 쩝,하고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돌린다
"참, 성균아"
"어?"
"나 인자 일정 없제?"
"... 그건 니 비서한테 확인해, 왜 나 보고 물어봐"
"아니 오늘 저녁엔 일찍 나가도 되나 하고, 회사에 중요한 일은 없는 거제?"
있어도 없다고 해야할 듯한 절박한 눈으로 성균을 바라본다
얘가 왜 이러나, 하고 황당한 표정으로 보던 성균은 고개를 끄덕인다
성균의 허락을 받은 호준은 감추지 못하고 함박 미소를 짓는다
일주일간 정신없이 지내느라 윤진에게 간단한 통화도 하지 못했다
오늘 저녁에 시간되느냐고 물어보면 너무 급하려나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을 만지작 한다
얼른 사무실에 들어가서 전화를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대표 나오라 그래 대표!"
"약속 되어 있지 않으시면 곤란합니다"
"숨어 있지 말고 나오라고 해 당장!"
엘레베이터를 향해 걸어가는데 로비 한 켠에서 소란한 소리가 들린다
'대표'라는 말에 저도 모르게 힐끔 소리 쪽을 바라본다
"손호준이 나오라고 하라니까! 왜! 뭐가 무서워서 안 만난다는 거야, 지가 지은 죄는 아나보지?"
제 이름에 멈칫 발걸음이 멈춘다
함께 걸어가던 성균이 몇발짝 더 앞서가다가 호준을 돌아본다
"손대표?"
성균이 저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호준은 자석에 이끌린 것처럼 실갱이가 벌어지고 있는 인포데스크 쪽으로 걸어간다
대체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다는 걸까,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분노하고 절박하게 저를 찾는 걸까
성균이 채 말리기도 전에 호준은 인포데스크 옆에 다가가 선다
갑자기 나타난 호준에 사람들이 얜 또 뭐야, 하는 식으로 바라본다
인포의 안내 직원이 벌떡 일어나 꾸벅 인사를 한다
"대표님"
"네, 고생 많아요"
상냥하게 고개를 끄덕,하는 호준을 멍하니 바라보던 사람 중 하나가 확 하고 팔을 뻗어 호준을 붙든다
"니가 손호준이야?"
"... 예, 무슨 일이신데 이러시는지,"
"무슨 일이신데? 니가 지금 모른다 이거야? 에이스 스튜디오, 니가 문 닫게 했잖아!"
"예?"
분노에 찬 손에 호준의 큰 몸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대체 지금 무슨 말이 오가는 건지 몰라 멍해진 호준을 뒤늦게 다가온 성균이 낚아채 뒤로 숨긴다
"그 건은 이미 스튜디오와 협상 종결된 사안입니다. 협상은 그쪽과 하세요"
"니네가 주도로 접기로 한거 모를 줄 알아?! 지금 우리 대표님이 어떤 상탠지 알기나 하냐고, 이 살인자!"
"가자"
악다구니 소리가 들리는 걸 무시하고 성균이 강하게 호준의 팔을 잡아당긴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호준은 성균에게 질질 끌려 엘레베이터를 탄다
결국 대표실까지 호준을 데려다놓은 성균이 털썩 소파에 주저앉는 호준에게 말한다
"쉬어, 오늘 피곤할텐데"
"... 무슨 말이냐, 내가 문을 닫게 하다니...?"
낮게 중얼,하는 말에 성균은 한숨을 쉰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게 아닌데 왜 저래"
"... 지난달에 니가 싸인한 인수 합병 계약서 대상이 에이스 스튜디오야, 실사 과정에서 성과가 나오지 않는 프로젝트 정리하기로 했고
돈만 잡아먹고 실제적으로 베타 버전도 내놓지 못한 온라인 게임 프로젝트 접었어,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실직자 발생했고.
애초에 인력 고용 승계는 계약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고 보상은 충분히 했으니 법적으로 아무 문제 없어,
정확하게는 우리 회사가 직접 개입한 것도 아닌 걸로 되어있고"
성균의 차분한 설명이 뭔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호준은 마른 세수를 두어번 한다
그리고 고개를 절레 흔든다
"... 충분했는데 왜,"
"... 그게 그 회사 메인프로젝트였거든, 그런 채산성없는 프로젝트가 메인이었다는 것부터가 문제인 거지만.
우리는 그 회사의 가능성있는 다른 프로젝트를 산거니까, 당연히 정리해야 하는 수순이었고.."
"... 정리라고 하면.. 얼마나.. 뭘..."
호준의 질문에 성균은 조금 불편한 듯 큼,하고 헛기침을 한다
"... 정확하게는 인력의 대부분이었지 우리가 필요한 건 게임 IP 뿐이었으니까"
성균의 대답에 호준의 손이 파르르 떨린다
"그라믄 저 사람들은 지금 하루 아침에 회사가 없어진겨? 나 때문에? 나가 그런 문서에 싸인을 혀서?
제대로 문제없이 진행된 건이람서, 근데 왜 살인자,소리가 나오는겨? 그 대표는 뭐가 잘못됐는데?"
"... 그거 우리 때문 아니야, 원래 지병이 있었던 걸로 알아"
"... 그래서, 그게 다야?"
"... 인수 협상 과정에서 다.소.의 스트레스가 영향을 주기도 했겠지,
본인이 개발하던 프로젝트가 완전히 폐기 됐으니 그 영향도 없다고는 못하겠지
하지만 그게 우리 탓은 아니야, 처음부터 시작하지 말았어야 하는 거였어"
냉정한 성균의 대답에 멍하니 앞만 바라본다
성균은 그런 호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쉰다
"쉬어, 신경쓰지 말고"
방을 나가려고 돌아서는 성균을 향해 일어선 호준이 급하게 말한다
"방법이 없는 거여?"
"....."
"사람을 하루 아침에 어떻게 저렇게 내모냐, 도리가 아니잖어, 회사를 샀으믄 사람도 살려야지,"
호준의 말을 듣던 성균이 도로 열었던 문을 닫는다
그리고 꾹 눌러참는 듯이 말한다
"... 너거 집에 화수분 있나?"
"어?"
"니 땅파서 장사허냐고, 니는 그 사람들만 보이고 우리 직원들은 안 보이나, 가망없는데 돈 쏟아부으믄 회사 망하는 거 순식간이다"
"그라믄 인수 합병인가, 그거 취소허자, 그 사람들은 그대로 살고, 우리는 우리대로 살고"
"이기 진짜 미칫나, 회사가 무슨 장난이가"
호준의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성균이 욱,하고 다가온다
"정신차리라 니, 지금 스무살 아이다, 니 판단에 따라서 이 회사가 죽고 산다고, 알겠나?
니 잊었나본데 이 세계는 전쟁터다 니가 안 죽이믄 남이 니를 죽일 기다,
비즈니스에서는 낭만? 인간미? 그란거 다 사치다, 우리가 인수합병 당해서 회사 망하는 위치에 가는 거 한순간이라고
갚아주고 싶으믄 지가 힘 길러가 올라오겠지, 그런거 일일이 신경 쓰믄 사업 몬한다 알았나!"
"... 그래도 어떻게 그려! 사람이 죽는담서! 지금 사람이 죽는대잖어!"
"안 죽는다!!!!!!"
성균이 폭발하듯 소리친다
"안 죽는다캤다! 그라고! 그란다고 해도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고!"
"왜 상관이 없당가! 왜!"
호준도 지지 않고 소리친다
서로 씩씩거리며 대치한 채 숨을 고른다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서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마치 눈싸움을 하는 듯한 시간이 지나간다
성균이 간신히 참는 듯 한숨을 내쉬며 눈을 질끈 감는다
"정신차리라 니, 다 니가 말한기다"
"....?"
"약한 건 죄다, 이기는 게 진리다, 복수도 같은 위치에서나 하는 거다, 그정도 각오도 없이 사업을 하는 건 죄다.
다 니 사업 철학이다, 그게 지금 이 회사를 이만큼 키운거고, 알겠나?"
"... 내가....?..... 그랬다고....?"
충격 받은 듯 말을 더듬는 호준을 본다
성균은 답답한 듯 다시 숨을 몰아 내쉰다
"... 니 말에 다 동의했던 건 아이다, 그런 말 하믄서 밀어붙이는 니가 너무 냉정하고 인간같지 않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근데...그거 아나?"
이미 초점이 흐려진 호준이 멍청하게 성균을 바라본다
"니, 적어도 그때는 니 말에 책임이란 걸 졌다, 피투성이가 됐어도 어떻게든 이기는 길만 갔다
적어도 그 말 할때 니는 잔인했어도 멍청하진 않았다고! 니 말에 어떤 책임이 따르는지는 알았단 말이다!
그때의 니를 좋아했던 건 아이지만, 내 오늘은 진짜로 그때의 니가 그립다, "
=
콰광.
벼락치는 소리가 가게 안 쪽까지 들린다
윤진은 카운터에서 나와 유리문으로 어둑어둑한 바깥을 슬쩍 내다본다
비가 쏟아붓듯 내리고 있는 하늘은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게 까맣다
유리문 너머의 하늘을 살피던 윤진은 벽에 걸린 시계를 본다
6시
아직 문을 닫으려면 시간이 남았지만
이렇게 비가 오는 날 화원을 찾는 손님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일기예보에 밤새 비가 내린다고 했던 말이 오늘은 들어맞으려나보다
더 비가 쏟아지기 전에 정리하고 들어가는 편이 좋겠다, 라고 생각한다
쇼케이스의 불을 끄고 비가 오기 시작할 때 들여놓은 화분들을 안쪽으로 조금 더 옮기고
카운터에 늘어뒀던 손질 도구들을 가지런히 모아둔 뒤 캐셔를 잠그고 앞치마를 벗는다
가게에서 주로 입고 있는 작업복인 얇은 소재의 저에게는 조금 큰 셔츠를 벗어서
앞치마와 함께 개서 의자에 걸쳐 두고 가방을 벽장에서 꺼낸다
우산.
아침에 비가 오지 않았던지라 미처 챙기지 않았던 기억이 그제야 난다
기억을 더듬어 카운터 구석 안쪽을 더듬어보니 예전에 쓰고 왔다가 두고 갔던 골프우산이 손에 잡힌다
체구가 작은 저에게는 도무지 버거운 크기라서 잘 쓰지 않는데다
도로 집에 가져가기도 귀찮아서 넣어두고는 잊어버렸는데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 딱 적당하다
거의 지팡이처럼 허리춤을 훌쩍 넘는 우산을 짚으면서 가게 불을 끄고
어두운 밖의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서 화분을 건드리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가게를 빠져나온다
유리문을 열자 쏴아 하고 비가 쏟아진다
급하게 쏙,하고 빠져나와 문을 닫고 문 아래쪽 열쇠를 잠근다
무거워서 휘청이는 우산을 쓰고 있는데도 비가 내리치는 것 같다
윤진은 열쇠를 잠그고 잠깐 고민한다
셔터를 내려야하는데 이 빗속에서 꼭 그래야만 할까, 싶은 생각이 든다
안 그래도 작은 키라서 매번 조금 폴짝 뛰어야만 하는데 말이다
빗 속에 잘 보이지도 않는 저 구멍에 과연 갈고리를 걸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도둑 드는 것 보다는 낫겠지, 스스로를 설득한다
한쪽 구석에 세워둔 갈고리를 가지러 몇발짝 쯤. 갔을까
갈고리를 세워뒀던 가게 한쪽 켠 옆으로 있는 빌딩의 계단참으로 올라가는
불이 꺼져 깜깜한 입구 한 구석에 검은 형체가 꿈틀하는 걸 발견하고 놀라 멈칫, 한다
뭐... 지....
꽤나 큰 그 형체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잔뜩 웅크리고 있다
윤진은 조심스럽게 그게 뭘까 하고 기척을 살피다 내내 움직이지 않는 걸 보고 한 발 내딛는다
언뜻언뜻 지나가는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비친 모습이 사람, 같다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온통 비에 젖어서 까맣게 된 옷이 물에 적셔진 종이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는 듯 보인다
"저기요"
윤진은 작은 목소리로 불러본다
고개를 파묻은 채인 그 사람은 윤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가만히 있을 뿐이다
조심스레 한발 더 다가가본다
"저기요"
물에 젖은 솜뭉치 같은 몸이 파르르, 떨린다
윤진의 목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차가운 비 때문인지 모르겠다
윤진은 주변을 둘러본다
계속해서 비만 억수같이 퍼붓고 이미 사람들은 하나도 길거리에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
꽤 덩치가 있어보이는지라 혼자 다가가긴 무섭다
윤진은 멈칫 한발 뒤로 물러선다
'미안해요.'
누군지 모를 사람을 향해 속으로 사과한다
'그러고 있지 말고 얼른 집에 가세요.'
다시 한발짝 뒤로 물러난다
천천히 돌아서서 집을 향해서 두어발짝 내딛다가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 듯 뒤를 돌아본다
아까의 그 자세 그대로 웅크리고 있는 사람을 보자 걱정이 된다
힐끔 하늘을 올려다본다
아무래도 이런 날 내버려두고 가면 얼어죽을지도.
제 몸의 두 배는 될 것 같은 우산을 쓰고 망설이던 윤진은 다시 몸을 돌려 그 사람 앞에 쪼그리고 앉는다
"저기요, 저기요, 여기서 이러고 계시면 큰일나요, 저기요"
여차하면 일어나 도망갈 수 있게 엉거주춤하게 앉아서 우산을 쥐고 있지 않은 손으로 조심스럽게 그 사람의 어깨를 흔든다
처음에는 약하게, 그러다가 아무래도 반응이 없자 점점 더 세게 흔든다
"저기요, 일어나봐요, 저기요"
구급차나 경찰을 불렀어야 하나 하고 덜컥 겁이 난다
몸이 딱딱한 것 같진 않고 밀 때마다 부드럽게 흔들리는 걸 보면 아직 살아있는 것 같은데
왜 조금도 반응을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윤진은 몇번인가 더 흔들다가 가방에서 핸드폰을 찾으려 뒤적뒤적한다
왜 이럴 땐 빨리 안 찾아지는 건지,
한 손으로 우산을 붙잡고 한 손으로만 가방을 더듬으려니 마음만 급하다
마구 휘젓고 있는데 앞에 웅크린 사람이 꿈틀한다
"저기요, 정신 들어요? 여기 어딘지 알겠어요?"
다급한 윤진의 목소리에 웅크린 팔 안에 갖혀있던 고개가 살짝 움직인다
윤진은 저도 모르게 한 발 당겨 앉는다
"고개 좀 들어보셔요, 이라고 있으면 큰일나요, 집이 어디여요"
윤진의 말에 반응하듯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마침 지나간 차의 헤드라이트에 드러난 남자의 얼굴을 보고 윤진은 숨을 삼킨다
"... 여기서 뭐해요, 호준씨, 왜 이러고 있어요"
호준은 정신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윤진을 바라본다
언제부터 비를 맞고 있었던 건지 흠뻑 젖은 채 올려다보는 호준을 보던 윤진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 나 누군지 알어요? 알아보겠어요?"
"... 윤진씨."
약간 울먹일 듯, 묻는 윤진의 말에 멍하니 윤진을 보고 있던 호준이 중얼,한다
윤진은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허무한 얼굴로 호준을 본다
가로등에 언뜻 드러나는 텅빈 눈을 금새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보던 윤진은 뭔가 결심한 듯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다
좀전까지 망설인 적이 있었냐는 듯이 단숨에 갈고리를 집어들고 셔터를 잡아당겨 내린다
자물쇠를 잠그고 다시 호준 앞에 쪼그리고 앉는다
"호준씨"
윤진의 말에 호준이 시선을 든다
호준을 바라보는 윤진의 눈이 흔들린다
입술을 꼭 깨문 윤진이 탁, 하고 호준의 팔을 잡아챈다
"일어나요"
멍하게 올려다보는 호준의 팔을 세게 잡아당긴다
몇번인가 잡아당기자 호준이 힘없이 일어선다
일어서기만 했을 뿐 멍하니 서서 비를 맞고 있는 호준을 막막하게 바라보던 윤진이 팔을 높게 들어 호준의 머리 위에 우산을 씌운다
"괜찮어요?"
"....."
"... 안 추워요....?"
"....."
우산 아래 선 호준은 그저 멍하니 윤진을 보기만 한다
윤진은 울컥 눈물이 나려는 걸 꾹 삼킨다
"고개라도 끄덕여봐요, 내 말 들려요? 들리죠?"
윤진의 말에 호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윤진은 입을 앙 다물고 호준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을 더 단단히 힘을 준다
"가요"
윤진이 잡아끄는대로 호준은 천천히 따라온다
빗속을 십오분쯤 걸어가 아파트로 들어간 윤진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호준을 데리고 엘레베이터를 탄다
엘레베이터에서 내려 왼쪽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간다
멍하니 윤진이 이끄는대로 따라와서 현관에 그저 서 있는 호준을 내버려두고 얼른 집에 뛰어들어가 큰 수건을 들고 돌아온다
호준의 젖은 몸을 수건으로 덮고 무릎을 굽혀 구두를 벗게 한 뒤 거실 소파로 끌고와 앉힌다
거실 왼쪽에 있는 방에 들어가 한참 뭔가 찾는 듯 하던 윤진은
한 손에 옷가지를 들고 나와 호준의 손을 끌고 화장실 앞으로 데려간다
"호준씨"
"....."
윤진의 말에 그제야 고개를 돌려 윤진을 내려다본다
윤진은 호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호준의 손에 들고 있던 옷가지를 쥐어준다
"들어가서 갈아입고 나와요"
"...."
"알았죠? 언능."
멍한 호준을 욕실로 들여보내고 한숨을 쉰다
윤진은 제대로 우산을 쓰지 못해서 축축하게 젖어버린 옷을 그제야 갈아입고 주전자 물을 올리고 냉장고에서 대추차 병을 꺼낸다
달칵,
큰 머그를 꺼내 대추차를 타고 있는데 욕실 문이 열리고 옷을 갈아입은 호준이 나타난다
여전히 조금 멍한 얼굴이지만 그래도 조금 전보다는 정신을 차린 것 같다
"나왔어요?"
"... 미안혀요"
두서없는 사과에 윤진은 대답 없이 머그컵을 들고 거실로 걸어와 보조 의자에 앉는다
아직도 쭈뼛,거리며 욕실 앞에 불안한 듯 선 호준을 보고 소파 쪽으로 손짓을 한다
"그라고 서 있지 말고 앉아요"
머뭇하던 호준은 천천히 다가와 윤진이 가리킨 소파에 조심스럽게 앉는다
윤진은 아무 말 없이 들고 있던 머그컵을 건넨다
잠깐 망설이다 호준은 머그컵을 받아든다
"따뜻해요, 언능 마셔요"
윤진의 무덤덤한 권유에 두 손으로 머그컵을 들고 있던 호준은 살짝, 컵에 입을 가져다댄다
가만히 호준이 대추차를 마시는 걸 보고 있던 윤진은 소파 옆에 걸쳐뒀던 얇은 담요를 들어 조심스레 호준에게 둘러준다
마시다 말고 멈칫,하는 걸 보고 오히려 꼭꼭 어깨에 꼭꼭 눌러 감는다
"가만 있어요, 감기 걸리기 딱 좋은 상태구만 지금.."
".... 고마워요"
윤진이 감아준대로 가만히 담요를 한번 더 매만진다
대추차를 천천히 마신 호준이 하아,하고 한숨을 쉬면서 컵을 내려놓는다
조용히 자리로 돌아와 호준이 마시는 양을 보고 있던 윤진이 컵을 받아들어 탁자 위에 내려놓는다
몸이 조금 따뜻해졌는지 호준이 부르르, 몸을 떨면서 담요를 끌어당긴다
여전히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끈질기게 바라보고 있는 윤진과 마주치지 않는다
어찌 보면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처럼도 보인다
그런 호준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윤진이
묻는다
"호준씨,"
"....."
".... 무슨 일이여요"
"....."
"... 무슨 일 있지요? 왜 그래요"
끈질기게 묻는 윤진의 말에 호준은 난감한 듯 왼 손으로 이마를 만지작하다
막막한 표정으로 두 손으로 마른 세수를 한다
"... 미안혀요 괜히.. 신세를.."
"... 괜찮어요 그런 건, 그보다..."
"... 갈 데가 ... 생각이 안나서..."
막막한 표정으로 두 손을 모은 채 바닥을 내려다본다
윤진은 안쓰럽게 바라보는 표정과 달리 담담하게 말한다
"... 집에 가면 되잖어요, 왜 비를 맞고 섰대요 섰기를.."
"... 무서워서..."
"뭐가요.. 뭐가 무서워요.."
호준은 깊은 한숨을 쉰다
세상이 다 무너진 것 같은 한숨에 윤진의 가슴이 함께 내려앉는다
"... 무서워요, 기억나지 않는 내가 사실은 끔찍한 사람이었을 것 같아서, 무섭지요"
"......"
호준은 도로 몸을 웅크린다
둥글게 말린 등이 덜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나가 대체 어떤 사람이었는가 모르것어요, 이 두 손으로 당체 뭔 짓을 하고 살았던건지
없어진 시간에서 나는 암만 혀도 아무렇지도 않게 누군가를 절망으로 밀어넣을 수 있는 사람이었나봐요
대체 기억나지 않는 순간동안 나가 얼마나 끔찍한 짓을 하고 얼매나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준 건지 모르것어요
어떻게 그렇게도 살 수 있었는지, 사람들 말만 들으면 나는 세상에 이런 악인이 없는디,
.... 나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던 것인지, 나는 그게 너무 무서워요"
울컥한 듯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울먹거리며 토로하는 호준을 안쓰럽게 보던 윤진은 살며시 호준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윤진의 손에 호준의 어깨가 급격하게 흔들린다
가려진 호준의 얼굴에서부터 바닥으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윤진은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면서 천천히 어깨를 토닥이기 시작한다
"...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않을 거여요, 좋은 사람이예요 분명"
약간 다정함이 묻어나는 윤진의 말에 다시 한번 호준의 어깨가 들썩한다
"... 기억을 찾는 게 무서워요...."
한참 들썩이던 호준은 간신히 멈추고 겨우 들릴듯 말듯 하게 중얼, 한다
"... 싫으면, 이대로도 괜찮잖아요?"
천천히 호준의 등을 토닥토닥하던 윤진이 무심하게 대답한다
윤진의 말에 멈칫,한 호준이 눈물이 글썽한 눈을 들어 윤진을 본다
윤진은 조금 상냥하게 고개를 끄덕한다
"무서운 기억이라면, 이대로 지내도, 괜찮아질 때까진"
윤진의 말에 멍하니 바라보던 호준의 눈에서 도르륵 눈물이 떨어진다
윤진은 가만히 토닥이던 어깨를 끌어당겨 호준을 품에 안는다
"괜찮아요, 다, 괜찮아질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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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자꾸 길어지네.... 하아.....끝까지 잘 써내야할텐데.... 아직 절반도 못 왔구만 ㅠ
더 잘 쓰고 싶지만 어설픈 것만 자꾸 눈에 들어와서.. 하아.. 뭐.. 더 고친다고 나아질 것 같진 않아서 그냥 올려 ㅠ
3편에 기다렸어, 란 댓글이 너무 많아서 당황 ㅠ 나의 손과 머리가 하나인 게 원망스럽다 진짜..
열심히, 중단 안하고 열심히 쓸게 - 고마워 기다려줘서 ㅠ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 덧붙이면 - 이건 본편의 캐릭터와 일부 관계만 가져온 새로운 이야기.
서른 넷 2008년의 세계이고, 애초에 시작은 나냔의 해태야_멜로하자_욕망폭발 이었으며...
해태의 시선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숨김글은 아마도 그걸 보완하는 윤진의 이야기,야
서울말도 되도록 사투리가 섞인 톤이라고 생각해주길(이라는 건 특히나 호남 사투리 잘 못쓰는 1인의 변명;;)
+
[1998년 11월]
"윤진씨!"
"네!"
호출하는 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호명된 쪽으로 냉큼 뛰어간다
"이거, 다섯부만 복사 좀 해서 철 좀 해줘, 알지? 스프링제본"
"네"
차장이 건네주는 문서를 받아들고 복사실로 향한다
5.
시작.
버튼을 눌러 복사를 걸고 다섯부가 나오는 걸 기다리는 동안 복사기에 기대 서 있자니 저절로 하품이 나온다
하암.
IMF 이후 얼어붙은 경제 속에 취업난은 심화되었고, 줄줄이 취소되는 채용 계획에 결국 윤진은 취업 재수를 했다
그래도 이리 저리 치이면서 (결국 불합격이지만) 다녔던 면접 경험들이 도움이 되었는지
아니면 반년 새 조금이나마 경기가 정리가 된 건지 올해 몇개 안 떴던 상반기 공채를 통과한 윤진은 7월부터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니 부서에 배치받은지 3개월도 안된 신입사원에게는 아무런 할 말도 행동의 자유도 없다
그저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하라면 해야할 뿐.
무슨 회사 워크샵을 꼭 주말에 그것도 1박2일로 해야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저 그러라고 하니 해야할 뿐이고
덕분에 준비를 맡은 부서에 소속되어 있던 윤진은 워크샵 진행과 온갖 허드렛일을 맡아서 하느라
지난 토, 일 이틀 내내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뛰어다녔다
거기다 신입이라고 술은 또 얼마나 먹이던지,
낮에는 일을 하고 새벽까지 술을 먹는 이틀을 꼬박 보내고 월요일이라고 바로 출근을 했더니만 저절로 잠이 쏟아지고 만다
저도 모르게 복사기에 기대서 꾸벅, 잠이 들려고 하는데 부웅, 하고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 진동이 울린다
화들짝 놀라 깬 윤진은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피고는 문 뒤 사각 지대 쪽으로 슬쩍 숨어 전화를 받는다
"네, 여보세요"
"어, 윤진아"
나정의 목소리인걸 확인하고 윤진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오늘 아침에도 아직까지 방을 비우지 않은 신촌 하숙 식탁에서 얘기를 나누었는데
새삼스럽게 왜 오후에 전화를 했는지 모르겠다
"왜, 무슨 일 있어?"
"윤진아, 니 지금 해태 어딨는지 아나?"
다급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갸우뚱한다
"집에 내려간다던디? 왜?"
"니 혹시 어제나 오늘 통화 안했나?"
나정의 말을 듣고서야 어제, 오늘 호준과 통화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워크샵 일정 때문에 주말 내내 정신이 나가기 일보 직전이었고
혼자 있는 시간은 단 1초도 없었기 때문에 감히 통화를 한다는 생각을 떠올리지도 못했다
그러고 보니 잘 내려왔으니 걱정 말라,는 짧은 문자가 전부, 목소리를 들은 건 집으로 내려가기 직전의 통화가 마지막이었다
바쁠 자신을 배려해서 연락하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휴대폰을 쥐고 있는 손이 바르르 떨린다
"니랑도 통화 안되나? 어쩌지"
"왜, 무슨 일이여? 무슨 일인데?"
급하게 묻자 나정이 머뭇한다
"무슨 일인가는 모르겠고 오늘 집으로 해태 찾는 전화가 몇 통 왔는데 다 심상치가 않아서"
"심상치가 않다니? 그게 뭔 말이여"
"목소리부터 험상궃은 거 있다 아이가, 호준이 이 집 안 산다 캐도 꼭 우리가 호준이를 숨겨놓고 안 내놓는 거 마냥 그라더니
집에 오면 꼭 연락 달라 하대, 아 준이 아부지 찾는 전화도 있었다, 이 자식 무슨 사고친 거 아이가? 집에 간다칸거 맞나"
무슨 말인지 대체 모르겠다
순간 눈 앞이 멍해진다
"니한테 별 말 없었나?"
아무 말도, 없었다
아니 마지막 통화의 목소리는 조금 지쳐있긴 했지만 밝았다
수화기 너머에선 보지 못할 텐데 윤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어 부정한다
"윤진아? 윤진아 니 듣고 있나"
말을 하지 않는 윤진을 수화기 너머 나정이 찾는다
그 목소리를 듣고서야 윤진은 정신을 차린다
"어?"
"하여간에 해태 연락오믄 집으로 전화 좀 하라 캐라, 무슨 일인가도 좀 물어보고... 별 일 아니어야 할긴데"
"알것어..."
"그래, 니도 드가라. 별일 아니겠지 뭐, 너무 극정 말고"
천천히 전화를 끊는다
아무 일도 아니겠지만,
그저 충전기가 없거나 배터리가 나갔거나 통화가 안되는 지역에 있거나 하는 거겠지 생각해보려고 해도
자꾸만 불안한 마음에 손이 떨린다
삑, 삑, 삑,
복사가 완료되었다는 날카로운 알림음에 번뜩 정신이 든다
윤진은 복사된 5부를 들고 스프링 제본기 앞으로 가서 문서를 밀어넣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호준에게 전화를 건다
뚜르르 -
신호만 계속 될 뿐 답은 없다
윤진은 신경질적으로 플립을 닫는다
아무래도 이 불안한 기운이 가시질 않는다
아무래도.
재빠른 속도로 제본을 마친 윤진은 일을 시킨 차장에게 제본한 복사물을 가져간다
"여기, 시키신 제본이요"
"어, 거기 둬"
힐끔 올려다보더니 손짓하고 도로 문서를 보는 차장이 가리키는 대로 복사물을 올려둔 뒤
윤진은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머뭇하다가 어렵게 말을 꺼낸다
"차장님... 저기.."
"어? 왜?"
"저.... 오늘 휴가 좀...."
"뭐? 갑자기 왜?"
신입사원은 원칙적으로 휴가가 없다, 라고 들은 게 불과 얼마 전이다
갑작스런 윤진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 올려다보는 차장을 보며 윤진은 잠깐 망설인다
"저.... 어머님이 쓰러지셨다고....."
남자친구가 사라졌다고 해봐야 핑계도 되지 않을 것 같아서 생각나는대로 일단 내뱉는다
말을 하고 보니 정말 호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싶어서 울먹울먹 해져버린다
조금 당황한 듯 눈시울이 붉어진 윤진을 보던 차장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한다
"알았어, 어서 가봐, 무슨 일 있으면 다시 연락하고"
"예.... 죄송해요"
고개를 꾸벅하고 인사한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가방을 들고 사무실을 뛰쳐나간다
자꾸만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어디로 가야할지 망설이다가 일단 고속 터미널로 가 무작정 순천행 버스를 잡아탄다
자꾸 심장이 뛰고 손이 덜덜 떨린다
내려가는 버스 안에서도 몇번인가 전화를 걸어보지만 꺼져있다는 답만 돌아올 뿐이다
아무 일도 없기를
계속 되뇌인다
아무 일도 없는 것이기를.
말에도 양감이 있다면 아마도 닳아서 없어질 정도로 같은 말을 되풀이해서 중얼거린 후에야 겨우 순천에 도착한다
이제부터는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해진다
멍하니 순천 터미널 대합실에 서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혹시나 호준일까 하는 생각에 허겁지겁 받는다
"윤진아"
나정의 목소리를 듣자 긴장이 풀린다
"...어"
"니 어데고?"
나정의 질문에 잠깐 머뭇한다
한번에 순천까지 와버린 이유를 스스로도 설명할 수가 없는데 순순히 말해줘도 괜찮을까 싶다
".... 순천"
"맞나, 벌써 해태랑 통화해가 내려간기가? 내는 니 모르는 줄 알고"
왜 호준과 통화를 하면 자신이 지금 순천에 가야한다는 걸까
정말로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하고 머리 끝이 섬뜩하게 선다
"...무슨 말이여 그게, 집으로 전화가 온겨? 무슨 일이 있대?"
잔뜩 가라앉아서 다급하게 으르렁거리는 윤진의 목소리에 나정이 잠깐 우물쭈물한다
"아직 통화 안했나.... 그라믄... 아이참...우야지..."
답답해서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성나정!"
버럭하고 소리를 지르고 만다
"언능 말혀라 나 숨 넘어가 죽는 거 보고 잡지 않으믄"
"... 니 일단 거기서 기다리라, 우리 지금 순천 내리간다"
"... 뭔데, 그냥 말을 혀, 나 말라 죽는 거 보고 싶냐? 어?"
"하이.. 참..."
한참을 망설이던 나정이 혀를 한번 쯧 차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한다
"아까 엄마가 호준이 집에 전화를 했는데, 사실은.."
=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거스름돈을 받을 생각도 않고 일단 뛴다
머릿 속에서 아까 나정이 했던 말이 뱅뱅 돈다
'부도 났단다, 호준이 아부지는 지금 도망가싰고, 집이랑 재산 다 차압 들어오고....
빚쟁이들이 호준이 아부지 찾느라 난리란다, 그래서 우리 집에도 호준이 찾는 전화 온기고, 그라고....'
마지막 말을 떠올리고 저도 모르게 찔끔 눈물이 난다
윤진은 달리면서 눈물을 닦아낸다
지금 울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을테니까
자신까지 울면 안된다, 라고 내내 속으로 다짐한다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간다
로비에 있는 게시판에서 이름을 확인하고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찾는다
구둣소리를 내면서 급하게 뛰어내려가다 시끄러운 소리에 발걸음을 멈춘다
격렬한 실갱이와 고성이 오가는 소란한 소리가 계단을 타고 올라온다
윤진은 저도 모르게 살짝 떨면서 조용히 계단을 내려간다
그리고 들어서지 않고 계단 앞 문에 몸을 감춘 채 그 소란한 현장을 들여다본다
"그러니까 어디다 숨겼냐고!"
"여기 있는 거 다 알아! 당장 내놔!"
"지 마누라 빈소에도 안 오는 놈, 어디다 감췄어!"
필사적인 악다구니가 오가는 사람들 중앙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한 사람이 보인다
검정 양복을 겨우 입고 상주 두건을 쓴 채 멍한 눈빛을 하고 사람들이 밀고 밀치는 대로
넋이 나간 사람처럼 휩쓸리고 있는 호준을 발견하고 윤진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버린다
이 상태로는 나설 수 없다
아니 저 상태인 채로는 호준이 자신을 맞아주지 않을 거다
윤진은 도로 문 뒤로 몸을 숨긴다
꺽꺽거리는 소리가 새어나갈까봐 울음을 목 뒤로 넘기려 애쓴다
울지마,
울지마 조윤진.
지금 울고 싶은 건 네가 아니야
부도.
아버지의 잠적.
차압.
빚쟁이.
그리고
그 모든 일이 단 하루 새 벌어졌고
그 충격으로, 쓰러진 호준의 어머니는 또다른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게 들었다
그래서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가서 곁에 있어 주어야지 하고 왔는데
지금 호준에게는 그럴 여유조차 없어보인다
겨우 진정한 윤진이 아직도 시끄러운 안쪽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본다
누군가의 빈소에 와서 조차 저렇게 사람을 괴롭힐수 있다니 돈이란 게 그렇게나 무서운 것인가 생각한다
지금 호준의 마음은 그것이 아니어도 충분히 괴로울텐데, 저 마음이 어떨지 생각하는 순간 또 울컥 눈물이 나려고 한다
계속해서 무기력하게 사람들에 쓸리고 있던 호준이 문득 빈소의 영정을 향한다
순간 멍하던 눈빛이 번쩍 한다
갑자기 자신을 잡고 있던 사람들을 무슨 힘인지 팍,하고 털어버린 호준은
성큼성큼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갑자기 뭔가 들고 나온다
그걸 본 사람들이 홍해 갈라지듯 양쪽으로 물러선다
몇몇은 작게 비명을 지르고 몇몇은 미친 사람인 양 멈칫 한다
터벅터벅 사람들 앞으로 걸어나온 호준은 들고 있던 그것을 바닥에 내리 꽂는다
쾅.
하는 소리에 바라본 윤진은 무릎을 꿇은 호준 앞에 박혀 있는 부엌칼을 보고 놀라 입을 막는다
호준 주변에, 좀전까지 호준에게 아버지를 내 놓으라며 소란을 피우던 사람들 모두 잠잠해진다
부엌칼을 꽂고 정좌한 자세로 앉은 호준이 이글이글 불타는 눈을 들어 사람들을 쭉 훝어본다
호준의 눈과 마주한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눈을 피해 시선을 돌린다
"이라시는 거 아니지요, 큰.아.버.지"
집어삼킬 듯 사람들을 쭉 둘러보던 호준이 중앙에 선 한 중년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한다
"암만 돈이 얽혔어도 엄연히 여그가 큰아버지 제.수.씨. 초상 아닌감요. 여그서 이게 무슨 행패여라, 이게 가당키가 한가요"
호준의 기세에 눌린 듯 아무도 감히 대답하지 못한다
"... 이라지맙서, 나가 그 돈 평생 걸쳐서라도 갚아드릴랑게, 제발 인간된 도리는 좀 지켜주셔요"
"... 니.. 니가 무슨 수로"
호준의 말에 누군가 반발하듯 짧게 대꾸한다
호준은 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홱,하고 고개를 돌린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갚을텐게"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들을 잡아먹을 듯이 바라본다
"못 믿겄으믄"
앞에 꽂혀있는 부엌칼 자루를 잡는다
"오늘 초상 하나 더 치뤄보소, 나도 그 돈 갚느라 굳이 살고 싶지 않응게"
한마디만 더 하면 큰 일 치를 듯이 위협하듯 쭉 둘러보는 호준을 보다 호준이 처음 말을 걸었던 중년 남자가 휘적, 손짓을 한다
"오늘은 이만 가세, 여그는 확실히 없는 것 같으니"
그 한마디에 썰물처럼 사람들이 빠져나간다
윤진은 계단 쪽으로 밀려오는 사람들을 피해 문 뒤 벽 쪽으로 가까이 붙는다
고개를 숙인 채 사람들이 다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겨우 다시 안쪽을 들여다본다
그때까지 부엌칼의 자루를 손에 꼭 쥔 채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호준은
힘없이 일어나 바닥에서 부엌칼을 뽑아내 천천히 칼을 부엌에 돌려놓고는 빈소 쪽으로 걸어들어간다
가만히 문 뒤에 숨어서 그 움직임을 보고 있던 윤진은 시간이 오래 흐른 뒤 겨우 한 발, 내딛는다
방금까지 그 난리가 있었던, 사람이 앉을 공간이라고는 겨우 두 테이블 정도인 초라한 마루 쪽만 정면으로 보이고
빈소에 들어간 호준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회사에서 일하던 중에 내려온 거라 그나마 예의차릴 만한 차림이었던 게 다행인데
또 한편으로는 그냥 돌아가버리고 싶은 충동이 자꾸 든다
지금
대체
그는 어떤 표정일까
한발씩 다가갈수록
그 절망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윤진은 두려워진다
또각,
또각,
구둣소리가 텅 빈 복도에 너무 크게 울린다
또각.
하는 구둣소리가 빈소 앞에 멈춘다
어머니의 영정 앞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있던 호준이 대체 누가 아직도 괴롭히러 온 건가, 하는 듯
잔뜩 지루하고 지친 표정으로 겨우 고개만 돌려 돌아본다
!
윤진과 눈이 마주친 호준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윤진은 잠깐 망설이다가 아무렇지 않게 방에 들어서서 한쪽 켠에 가방을 내려놓고 영정 앞으로 걸어간다
어리둥절해서 윤진을 바라보던 호준은 향을 피워 영정 앞에 바치는 윤진을 보고 비로소 정신을 차린 듯 상주 자리에 가서 선다
'어머니, 이제야, 이렇게야 뵙네요'
윤진은 영정 사진을 향해 속으로 중얼,하고 말을 건다
어렵게 4배를 하고 몸을 돌려 피차간에 담담하게 상주와 맞절을 한다
겨우 맞절을 마치고 고개를 들자 지친 표정의 호준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다
윤진은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프다,라는 것이 이런 말이겠구나. 하고 생각한다
"어떻게..."
"나정이가..."
"......"
"... 애들 곧 내려온대..."
호준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지친 듯이 도로 자리에 주저앉는 호준을 보던 윤진이 호준 앞에 꿇어앉아 눈을 바라본다
"호준아"
"....."
"... 괜찮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지금 이 순간 이 말을 해야만 할 것 같아서
윤진은 생각나는 대로 속삭인다
"괜찮어"
윤진이 다시 한번 되풀이한다
멍하니 윤진이 하는 말을 듣고 있던 호준의 눈에서 주룩,하고 눈물이 한줄기 흘러내린다
"윤진아"
"응... 나 여기 있어"
"윤진아"
앞에 있는 윤진을 보면서 호준은 계속해서 윤진의 이름만을 부른다
그것만이 지금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윤진은 가만히 호준을 끌어안는다
제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는 호준의 등이 들썩이기 시작한다
윤진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면서 호준의 들썩이는 어깨를 천천히 토닥인다
괜찮아,
나 여기 있어.
내가 곁에 있을게.
=
이 이야기는, 몇가지 질문을 기반으로 진행되고 있어.
이제 첫번째 질문, 왜 사고난 호준에게 신촌하숙의 사람들을 빼고는 아무도 없었는가,에 대한 대답이 일부나마 되지 않을까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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