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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통,통,통,통
규칙적으로 뭔가 두드리는 소리에 움찔 한다
몸만 꿈틀하고 반응했을 뿐 여전히 눈은 감은 채로 귀를 쫑긋 세우고 익숙하고도 낯선 이 소리의 정체를 더듬는다
아주 오래 전 들었던
따스한 공기
보글거리는 하얀 김
희미한 아침의 소리
... 엄마!
호준은 눈을 번쩍 뜬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고인다
흡.
눈을 뜬 채 여기가 어디인가 생각한다
큰 창으로 빛이 쏟아져들어오고 있는, 높은 천장의 이 낯선 공간은
방금 눈을 감은 채 보았던 순천 집도 요즘 기거하고 있는 서울 집도 아니다
제가 몸을 누이고 있는 곳도 순천의 보송한 솜 이불도 서울의 침대도 아닌 갈색 가죽 소파 위이다
통,
계속해서 들리던 두드리는 소리가 멈추고
뚜껑을 열었는지 보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확,하고 국 냄새가 퍼져온다
배고파.
본능적으로 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몸을 일으킨다
바스락하고 호준이 덮고 있던 이불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는지
국 간을 보는 듯 가스렌지 앞에 서 있던 윤진이 돌아선다
"일어났어요?"
아직도 잠에서 덜 깬 건지, 이 상황이 무엇인지 동작을 그대로 멈춘 호준이 인사 대신 웅얼거린다
"지가 왜...."
"기억 안 나요? 어제 비 맞구"
그제야 어제 비를 맞으며 길거리를 방황하다가 윤진을 만났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니 그보다 제 감정에 울컥해서 울었던 게 생각나서 창피해진다
아직 그렇게까지 가까운 사이도 아닌데, 괜히 부담스럽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된다
그래도 자신이 아무에게나 민폐 끼치고 그러지는 않는데,
하는 마음에 조심스레 사과한다
"지가 신세가 많었네요"
"괜찮아요, 그런 거 못 할 사이도 아니구"
보글거리며 끓고 있는 찌개에 막 잘게 다신 고추를 도마에서 쓸어넣으면서 무덤덤하게 대답한다
못할 게 아닌 사이란 뭘까, 호준은 윤진의 대답에 잠깐 생각한다
"옷은 지금 말리고 있어요, 그래도 오늘은 아침부터 날씨가 좋아서 곧 마르지 싶네요, 출근은, 안하시지요?"
"예...토요일잉게"
무심히 던진 윤진의 말에 어색하게 대답한다
그제야 자신이 다른 옷을 입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반팔 흰 티셔츠에 트레이닝 바지, 약간 헐렁하긴 해도 자신에게 거의 딱 맞는 기장
저도 모르게 부엌에서 움직이고 있는 윤진을 건너 본다
저 자그마한 체구에 맞을리 없는데, 그렇다면 이건,
문득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
에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지워버린다
"배고프죠, 곧 찌개 다 될거니까 밥 먹어요"
"자꾸 이렇게 신세만 져서"
"...안 먹을 거래요, 그래서?"
"아니요, 주시믄 감사히 먹어야지요"
흐흐,하고 넉살좋게 대답하며 긁적하는 걸 보고 혹시나 안 먹겠다고 할까봐 엄하게 노려보던 윤진이 살풋 웃는다
"세수하고 와서 조금만 기다려요"
"예에"
꼭 엄마 같다, 라고 생각하면서 순순히 윤진의 말에 따른다
윤진이 가리킨 문을 열고 들어가 후다닥 씻는다
얼굴을 닦은 수건을 걸어두고 나오니 윤진은 이제 막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고 있다
도와야할까 하고 잠깐 망설이다가 그제야 스윽, 집을 둘러본다
방금 나온 욕실을 포함해서 보이는 문이 모두 네 개
방 두 개에 욕실이 두 개일리는 없으니 아마도 방은 총 세 개일테다
이렇게 큰 집에 혼자 사는 건가...
다른 인기척은 전혀 없는데, 혼자 살기엔 좀 큰 집이다
천천히 거실 벽을 따라 집 안을 살피며 걷는다
벽에 액자가 걸렸던 자국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우뚱한다
괜히 티비가 놓은 장 위를 손가락으로 쓸어보고 먼지 한점 없는 것에 놀라다
한구석에 얹어진 워터볼을 집어들어본다
뒤집었다 놓으면 하얀 눈이 내리는 워터볼은 순천에서도 본 적 있었지만 노란 눈은 처음이다
눈높이에 올려들고 한번 뒤집었다 놓는다
남자와 여자가 손을 잡고 서있는 위로 노란 눈이 쏟아지듯 떨어진다
신기하다,
몇번인가 뒤집었다 도로 놓아서 노란 눈 내리는 걸 반복하다가
워터볼 받침대 앞쪽에 쓰여있는 영문을 더듬, 읽는다
'제.주. 아.일.랜.드.'
"이거, 제주도에서 산거래요?"
호준의 질문에 밥을 담고 있던 윤진이 슬쩍 건너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네"
"근데 왜 노란 눈이예요?"
"눈 아니예요, 유채꽃이예요 그거"
"아아..."
벚꽃처럼 하늘에서 꽃이 흩날리기라도 하는 걸까,
호준은 잠시 노란 꽃잎이 날리는 상상을 하고는 워터볼을 한번 더 휘저어본다
"와서 드셔요, 차린 건 없지만"
"예에"
윤진의 말에 워터볼을 제자리에 내려놓고 식탁 쪽으로 걸어간다
어?
식탁으로 가는 길의 구석 안쪽으로 살짝 들어간 방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한다
집 안에 있는 문인데, 번호식 자물쇠가 달려있다
어디로 통하는 걸까, 잠깐 궁금했다가 이내 남의 집 사정인데 싶어서 지워버린다
"와아, 맛있겠네요"
"그냥, 만날 먹던대로 차렸는디, 찬이 별로 없어서"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보고 호준이 저도 모르게 감탄한다
윤진은 자리에 먼저 앉으면서 멋쩍게 대답한다
"아이구, 이게 평소 먹던 대로면 맘 먹고 차리믄 잔치상 되겄네요"
"... 입맛에 맞아야할텐데요"
"지가 있는 집 엄니도 음식 하나는 끝내주시는디, 윤진씨 솜씨도 만만치 않은디요,
엄니껜 죄송허지만 찌개는 이게 더 맛있는 거 같은디"
호준의 넉살에 풉,하고 웃어버린 윤진이 숟가락을 든다
"많이 드셔요"
"예에, 밥 더 먹어도 되지요?"
"얼마든지요"
연신 감탄하면서 허겁지겁 먹던 호준은 결국 빈 밥그릇을 내민다
생각해보면 어제 점심 이후로 처음 먹는 식사다
처음 온 집에서 밥 두그릇 먹는 게 조금 민망하긴 하지만,어쩔 수 없지. 라고 스스로 설득한다
잘 먹는 게 보기 좋았던지 살풋 웃으면서 윤진이 호준의 밥공기를 들고 밥솥쪽으로 걸어간다
약간 민망한 듯 고개를 까딱이며 기다리던 호준이 문득 생각난 듯 슬며시 묻는다
"근데, 이 큰 집에 혼자 산대요?"
밥을 푸던 윤진이 멈칫,한다
잠깐 침묵이 흐른 뒤 밥솥 뚜껑을 닫고 돌아온 윤진이 수북이 밥을 담은 그릇을 호준에게 내민다
"지금은요"
뒤늦은 윤진의 짧은 대답이 무슨 의미인가 생각하던 호준은 문득 자신이 실수했다고 느꼈는지 눈을 내리깐다
담담하게 조금 전처럼 조용히 식사를 하기 시작한 윤진과 달리
불안한 듯 수저로 밥을 꾹꾹 누르기만 하던 호준은 짧게 한숨을 내쉰다
"저기, 지가 기억이 안난다고 말씀드렸지라?"
"... 예?"
갑작스런 호준의 말에 윤진이 수저를 들다말고 바라본다
"지는 지금 스무살이어라"
"....."
"남들은 지를 서른 넷으로 보지만 지는 지금 스무살, 그 이상은 기억이 나지 않은게요"
호준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윤진은 그저 가만히 듣기만 한다
"그랴서 기억이 안나요, 울 엄니 돌아가셨다는디 지는 모르겄더라고요,
아부지도 안 계신다는디 언제 어쩌다 그렇게 되신 건지 하나도 몰라요
지는 지금 스무살을 살고 있응게, 스무살에는 두 분 다 건강하셨으니께"
"... 힘들겠어요"
호준의 말을 잠잠히 듣고 있던 윤진이 중얼, 대답한다
호준은 그 말에 멈칫 하다 조금 아픈 듯 고개를 끄덕한다
"기억이 안 난다고 아프지 않은 건 아니더구만요, 슬픈 건 슬픈거니께"
"그렇죠..."
제 말을 듣다말고 문득 쓰라린 표정을 짓는 윤진에게 나직이 묻는다
"누굴, 잃은 거지요? ... 지가 부모님을 잃은 것처럼"
호준의 말에 윤진은 잠시 멍하니 호준을 바라본다
그리고 호준 뒤로 펼쳐진 큰 집을 스륵 훑는다
막막한 표정으로 호준을 보던 윤진이 슬쩍 시선을 피한다
"... 남편이랑.. 같이 살았어요 원래 여기서"
"아...."
당연히 예상했어야 하는 선택지를 잊고 있었단 거에 당황한다
제가 스무살이 아니고 서른 넷이듯 윤진도 서른 넷, 보편적으로라면 당연히 결혼한 상태였어야 한다는 걸.
"... 어쩌다..."
무심결에 묻고 만다
호준은 딱 5초만 돌려서 순간을 지우고 싶다
윤진은 순간 숨을 멈추고 공기가 사라진 듯한 얼굴이 된다
"... 떠났어요 그 사람이"
윤진은 허공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린다
"이제 나를 기억하는 그 사람은 없네요, 세상에"
괜한 이야기를 꺼냈다, 하는 후회가 호준의 얼굴 가득 떠오른다
초조하게 윤진을 보던 호준이 작게 중얼거린다
"죄송혀라...지가 괜한 말을 혀서..."
"... 괜찮아요 이제는..."
말을 잇지 못하는 호준을 보며 살짝 웃는다
아무렇지 않은 듯 도로 수저를 들고 살짝 찌개를 한 숟갈 뜨는 윤진의 손이
그렇지만 살짝 떨리고 있는 걸 발견하고 만다
"... 그 마음 이해혀요.. 지도 그라니께... 아픈 거 쉽게 물어본 거 죄송혀라, 쉬워서 물어본 건 아닌디"
조심스럽고 투박한 호준의 말에 윤진은 울컥한 듯 고개를 숙인다
"... 스무살이니까요."
"예?"
"스무살이니까 그런 거지요? 서른 넷이었으면 안 그랬을텐데"
약간 눈시울이 붉어진 채 고개를 든 윤진이 장난스럽게 웃는다
"안 믿어요 그런 말,"
"예?"
"스무살이라서 실수했다는 말, 안 믿을라요, 그런거믄 나도 평생 스무살 하고 살고 싶은디"
"그란거는 아닌디"
변명도 못하고 잔뜩 억울한 표정만 짓는 호준을 보며 하얗게 웃은 윤진은 조금 바래진 눈빛을 한다
"... 그래도 고마워요, 이해한다고 말해줘서"
"... 예에..."
쭈삣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호준에게 슬쩍 앞에 놓인 반찬을 밀어놓는다
"좋아해요? 꼬막?"
"좋아하지라, 지는 양념보다는 이르케 삶은게 좋던디, 딱이네요"
"많이 드세요, 얼마 안되긴 하지만"
=
"우와 말도 안돼!"
호준이 쥐고 있던 조이스틱을 던지듯 내려놓는다
"뭐가 말도 안되어요"
"아니 이렇게 혼자 잘해버리는 게 어딨대요? 이거 뭐 조작해놓은 거 아녀라?"
"그것이 바로 실.력.차.이. 여요, 조작은 무슨, 벌써 이게 몇 판째인디"
주섬주섬 호준이 던져버린 조이스틱을 정리하면서 윤진은 살짝 웃는다
늦은 아침을 먹은 후 소화나 할 겸 하자고 시작한 게 벌써 네시간 넘게 게임기에 매달려있다
어지간한 승부욕으로 덤비고 있지만 윤진의 실력이 그냥 넘어가기엔 너무 출중한 탓에
호준은 그 네시간 동안 단 한번도 이기지 못한 채 한번 더! 만 외쳐야 했다
"어쩔래요? 한 판 더?"
"아이구, 이제 그만 둘랴요, 윤진씨헌티는 절대 못 이기겄네요 오늘은"
"그라믄 그라셔요"
손사래를 치는 호준을 보고 윤진은 약간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한다
"나가 연습혀서 다음에 다시 도전할텐게, 그랴도 명색이 게임회사 다니는디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지라"
"... 다음에도 결과가 달라질란가는 모르겠지만요"
호준의 다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윤진을 보고 호준이 감탄하듯 묻는다
"화아, 근디 이르케 게임 잘하는 여자는 첨보는구만요, 대체 정체가 뭐래요?"
"... 그냥 야구 게임 좋아하는 꽃집 주인 인디요?"
"그냥 좋아하는 정도가 아닌디, 야구로 치믄 프로 선수혀도 되겠구만요"
윤진은 피식 웃으면서 앞에 늘어놓은 게임기를 정리해서 티비 아래 장에 넣어둔다
그리고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 쪽으로 걸어간다
"차, 마실래요?"
"좋죠, 암거나 주셔요 윤진씨 드시는 걸로"
윤진은 잠깐 냉장고 문을 열고 고민하다가 병을 꺼낸다
"레몬차 있는데, 차갑게 아니믄 뜨겁게 어느 쪽이 좋아요?"
"차갑게도 되요?"
"탄산은 싫죠? 레모네이드 같은"
"... 그기 뭔지 몰라도 그거 좋네요 지는"
호준의 대답에 윤진은 살짝 웃는다
찬장에서 큰 컵을 꺼내 씻고 냉장고에서 꺼낸 탄산수와 레몬차를 컵에 던 뒤
막대로 젓는 걸 보다 호준이 갸우뚱 하고 묻는다
"그라믄 야구도 좋아혀요?"
"... 보는 건 좋아혔지요"
호준의 질문에 멈칫 대답한 윤진은 레모네이드 두 잔을 들고 자리로 돌아와 호준에게 컵을 건네고 소파 위에 나란히 앉는다
"그라믄 구단은? 어느 구단 팬이어요?"
".... 두산이요"
손에 들고 있던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마시느라 한 템포 늦게 대답한다
호준의 눈이 커진다
"어째서 해태가 아니고 두산이래요? 전라도 사람이믄서?"
"... 해태 아니고 기아 라니까요"
"하여간에, 어째 두산이래요? 베어스는 원체 호남이랑은 상관이 없는디"
"... 왜 두산이믄 안되는디요?"
윤진의 대답에 호준이 하늘이 무너진 듯 한숨을 쉰다
"허이고야, 어찌 연고 구단을 그르케 바꾼대요, 고향 같은 것인디, 그라고 해태가 역사도 그르코 실력도 훨씬 낫잖어요"
"... 요즘은 두산이 더 잘혀요, 기아가 하위권만 왔다갔다헌게 벌써 몇년짼디"
"에이, 그려도 그라는 거 아니지요, 어디 성적따라 팬을 혔다 그만뒀다 하믄 그게 뭔 애정이대요?"
호준의 말에 살짝 당황한 듯 보이던 윤진이 입술을 삐죽,한다
"그라믄 왜 타이거즈 팬인디요?"
"지야 운명적으로다가"
"운명?"
"태어나기를 타이거즈의 고장 전라도에서 태어난 것도 그르코, 지 이름에 호랑이가 들어가잖에요,
이거슨 타이거즈 팬이 되기 위해 태어난 운명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것이지요 암만"
당황한 표정으로 호준을 멍하니 바라보던 윤진은 잠깐 침묵한 뒤 고개를 절레 젓는다
"하여간에 지는 잘하는 팀이 좋아요, 그쪽도 어차피 앞으로 서울서 살건디 바꿔요 두산으로"
"아니 그라니께, 연고 팀은 그르케 막 바꾸는 게 아니랑게요,"
"인연도 바꾸는 세상에 못 바꿀 게 어딨당가요? 바꾸믄 그만이지
두산은 작년에도 우승혔고 올해도 가능성이 높당게요, 기아는 마지막 우승이 아마 97년일걸요"
"지금은 타이거즈가 좀 못헐지 몰라도 곧 다시 일어설거랑게요, 암만, 근성이 있는 팀잉게"
영원히 평행선을 그릴 것처럼 팽팽하게 말을 주고 받다가
절대 굽히지 않을 것 같은 완고한 호준의 태도에 윤진이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 내민다
"치이, 그날이 언제 올 줄 알고"
레모네이드를 한모금 마시고 탁자에 내려놓으면서 툴툴대듯 입술을 내밀고는 고개를 한번 갸우뚱 턴다
그런 윤진을 가만히 보고 있던 호준은 뭔가에 끌린 듯 훅, 하고 윤진 쪽으로 몸을 수그린다
!
순식간에 입술이 살짝, 닿았다가 떨어진다
윤진은 당황한 듯 큰 눈을 두 배쯤 더 크게 뜨고 그 자리에 굳은 채 깜빡이기만 한다
제가 입술을 갖다대고도 그제야 놀란 듯 금새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굳어버린 호준은
무슨 일을 저지른 걸까 하는 듯 앞만 바라보고 끔벅끔벅 하더니 입을 몇번 벌렸다 닫았다 하다가
겨우 끄집어낸 듯 그르릉 하는 소리로 더듬거린다
"... 미... 안해요.. 그게 그쪽이 예... 아니 그러니까.. 입술이.. 아니 그게 아니라"
기습당했던 그 자세로 멍하니 있던 윤진은 더듬거리는 호준의 사과에 정신이 돌아온 듯 고개를 돌려본다
큰 잘못을 저지른 소년처럼 잔뜩 얼어서 앞만 바라보는 호준의 얼굴을 가만히 고개만 기울여서 보다가 순간 사르륵 웃는다
"이십대네요, 진짜"
"예?"
보송보송한 윤진의 말에 호준이 놀라 돌아본다
옅은 미소를 띄고 있던 윤진은 호준과 눈이 마주치자 상냥하게 고개를 한번 끄덕한다
그리고는 좀전의 호준이 그랬던 것보다 더 빠르게 다가가 살며시 입맞춘다
"믿을게요 호준씨, 지금 스무살이라는, 적어도 이십대라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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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야_멜로하자_욕망폭발'글인지라... 나냔의 멜로는 늘 애들이 좀 힘들었어서;; 으음;; 앞으로 갈 길이 구만리...
냔들이 생각하는 그 전개가 맞아! 이건 클리셰 덩어리니까!! 그래도 재미나게 읽어주었으면 ㅠㅠ 하는 욕심...
읽어주고 댓글 달아주는 냔들 고마워~ 그덕에 내가 주말 3연속 글도 쓰게 되네.. ㅎㅎ 댓글은 없던 글도 쓰게 하는겨.
+
[1999년 6월]
"와아!"
함성소리가 터진다
단, 상대편에서.
잔뜩 불만스런 표정으로 앉아 있던 윤진은 아예 팔짱을 끼고 의자 뒤로 기댄다
경기를 제대로 보지 않은지는 한참 되었다
그보다 벌써 5회말이 끝나가고 있는데 아직도 비어있는 옆자리가 훨씬 신경쓰인다
'대체, 이럴거면 왜 오자고 그런거야'
오랜만에 해태가 서울에 올라와서 하는 주말 원정경기라면서
몇 주 전부터 꼭 같이 가야한다고 시간 비워두라고 신신당부를 했던 장본인은
1회말 경기 중간 전화를 받으러 나간 뒤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다
"와아!"
또다른 함성,
이번에도 상대 진영에서다
팔짱을 끼고 하늘만 보면 분노에 찬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던 윤진은
벌써 5회에만 몇번째인지 모를 안타에 주먹을 쥐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어후, 하고 긴 숨을 내쉬고 꾹꾹 눌러 참으면서 간신히 도로 자리에 앉는다
1999년.
윤진은 여전히 회사를 다니고 있었고 호준은 막 3학년을 마쳤다
'어쩔 수 없지'
라고 배시시 웃으면서 하루에도 몇개나 되는 과외를 뛰는 동시에
장학금 때문에 곧잘 도서관에서 밤을 새곤 하는 호준은
최근에 성균과 새로운 일을 벌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대체 무엇을 하는 건지 윤진은 설명해줘도 잘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호준과 성균의 주도로 현재 학과에 남아 있는 몇몇 끼리 소위 '벤처'라는 것을 해보기로 한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시간도, 잠도 모자라서 늘 헉헉대며 살고 있는데
그런 가능성이 희박한 일까지 해야하나, 하는 걱정이 앞섰지만
그래도 그 '벤처'에 관련된 이야기를 꺼낼 때의 호준은
늘 조금 지쳐있는 평소와 달리 생기있게 반짝여서 차마 그만두라는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윤진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든 것도 이해했다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갑자기 치솟는 분노에 꼭 쥔 주먹이 바르르 떨린다
이렇게 사람을 불러놓고 사라지는 건 정말 못 참겠다
그놈의 벤처를 시작한다고 한 이후 벌써 몇달째 이런 식이다
요즘은 늘 윤진의 집 앞이나 호준의 방이나, 저녁 식사 같은 식으로 실내에서 겨우 한두시간 짧게 보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그것도 호준이 먼저 제대로 야외로 나가는 데이트를 말한 거라
어제부터 들떠서 몇번이나 옷을 갈아입었다 벗었다 하면서 고민하고
아침부터 머리를 말았다 풀었다 묶었다 풀었다를 반복했는데,
얼마나 기대하고 기대했는데,
결국 또 이렇게, 그것도 야구장까지 와서 혼자 남겨지다니
윤진은 살짝 눈물이 고이려고 하는 눈을 들어 먼 산을 바라보고 훌쩍 하고 삼킨다
남자친구가 일한다고 없어진 것도 짜증나는데!!
야구까지 지고 있어!!!
이게 뭐야! 둘 중에 하나는 줘야할 거 아냐!!!
짜증나서 괜히 전광판을 노려본다
아무리 임창용이 트레이드 되고 김상진이 없다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마운드가 무너져도 되는 건가 말이다
아예 타자에게 때리라고 공을 던져주는 건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다
두산 입장에서만 난타전,이 된 스코어판을 보고 있자니 드디어 길고 길었던 5회말 공격이 끝난다
* 클리닝 타임 *
전광판 가득 클리닝 타임을 알리는 글씨가 뜬다
'손호준 너 진짜 죽었어!'
결국 못 참고 씩씩거리면서 가방을 들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다
"아, 미안 미안, 너무 오래 걸렸지"
어쩜 그렇게 타이밍도 완벽하게, 마치 윤진이 일어서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허겁지겁 달려온 호준이 윤진의 손을 잡으며 옆자리에 털썩 앉는다
"앉아, 응?"
제 손을 끌어당기는 호준에 못 이겨 윤진은 뚱한 표정으로 자리에 도로 앉는다
"미안, 내일 모레 중기청에 제안서 제출 마감인데, 내 이름으로는 못 내잖어 그랴서 성균이가 해야 하는디"
"... 급한 일이었것지,"
"어, 좀 급한 일인디, 근데 성균이가 혼자는 못하겠다고 허니 어짜냐"
"... 그리 좋으믄 성균이랑 사귀랑게, 나가 무슨 망부석이라도 되야 성에 차겄냐 니는?"
"..아따 뭔 말을 그르케 하냐아.. 나는 보동보동한 니가 좋은디 돌이 된다 그라믄 나는 으찌 살라고"
은근슬쩍 팔짱을 껴오는 호준의 팔을 탁, 뿌리친다
하여간 은근 그냥 넘어가려고 하는 건.
이번엔 절대로 그냥 지나가주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뾰롱통한 표정으로 제 쪽과 정반대만 일부러 바라보고 딴청 피우고 있는 윤진의 눈치를 보던 호준은
어째야할지 모르겠다는 듯 초조하게 손가락을 몇 번 튕기더니 짐짓 평온한 목소리로 전광판을 바라보고 괜히 중얼,한다
"아, 오늘 또 지고 있네... 해태 요즘 영 안 되것네"
지는 나가서 전화받고 왔으면서!
그 지는 경기를 내내 혼자 보고 있던 나도 있다고!
딴청부리고 있던 윤진은 짜증이 난다
"... 나는 내년부터 두산으로 갈아탈란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윤진이 단호하게 말한다
윤진의 말에 호준이 흠칫 놀라 돌아본다
"아야, 그래도 어찌 그르냐, 구단을 그르케 막 바꾸고 그랄 수 있간디"
"... 왜, 왜 그러믄 안되는디? 두산이 훨 잘하잖여, 난 내년부터 두산팬 할텐게 그르케 알어"
"연고 구단은 고향이나 마찬가지여, 그게 그르케 바꾸고 싶다고 바꿔지는 게면"
".... 나가 서울 살이가 벌써 5년째고, 앞으로 살 날은 여수보담 서울이 더 길텐디, 서울을 고향하믄 왜 안되는가"
"그래도 그거슨 아니지, 암만, 야구 며칠 잘 못혔다고 바꾸고 그라는 거 아니여"
호준의 말에 윤진의 입술은 뾰롱통하게 더 튀어나온다
"아야, 글고 나의 이름이 호, 호랑이 아니냐, 근디 어찌 그렇게 쉽게 구단을 바꿀 수 있것냐, 나를 봐서라도 그런 말은 참어"
호랑이는 무슨, 넓을 호 쓰면서!
내가 모를 줄 알고!
"... 니 때문에라도 해태 그만 둘거여!"
"그라믄 니 나도 잘 못하믄 나랑 그만 둘거여? 그란 거 아니잖어, 응?"
지금은 진짜 그만 두고 싶다 왜!
윤진은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대답하지 않는다
윤진의 눈치를 보던 호준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화났어?"
"......"
"... 화나서 그라는겨? 아야.. 나가 그랄라고 그란게 아니고.. 성균이가 워낙 급혀서.. 알잖에"
"... 그르케 좋으믄 성균이랑 살어, 왜 나헌티 와서 이라는겨, 나 없어도 잘만 살것네"
"아야, 윤진아, 윤진아아"
제 이름을 부르면서 칭얼칭얼 대는 걸 외면하고 제 팔을 붙잡고 있는 손도 털어내버린다
팔짱을 낀 채 고개까지 완전히 돌려버린 윤진을 보다 한숨을 길게 내쉰 호준은 갑자기 깜짝 놀란 듯이 외친다
"어! 저게 뭐여!"
갑작스런 고함에 호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린다
어?
전광판 가득 비친 제 얼굴을 확인하고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라고 당황하려는 찰나
호준의 큰 손이 자연스럽게 앞을 향하고 있는 윤진의 뺨을 감싼다
윤진의 얼굴을 살짝 제 쪽으로 끌어당긴 호준은 윤진이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입술을 갖다댄다
전광판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에 배경으로 KISS라는 글씨와 폭죽 CG가 터지고
주변에서 대단하다는 듯한 야유 섞인 환호성이 흘러나온다
"네! 멈추지 않는 열정의 커플, 감사하구요! 이제 그만하셔도 되요! 자, 다음!"
장내 아나운서의 질투섞인 멘트가 흘러나오고 전광판의 카메라가 다음 타겟 커플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한 후에도
조금 더 윤진을 삼킬 듯 끌어당기던 호준은 겨우 아쉬운 듯 살며시 윤진을 놓아준다
하아.
숨막힐 듯한 키스에 한꺼번에 숨을 몰아쉬고 만 윤진은 당황스러움과 민망함에 얼굴이 새빨개진다
그런 윤진을 본 호준은 피식, 웃고는 가만히 윤진을 품에 안아 얼굴을 가린다
".... 뭐여 이게..."
새액,하고 숨을 몰아쉬면서 윤진이 중얼거린다
호준은 말없이 천천히 끌어 안고 있는 윤진의 머리를 쓸어내린다
"... 나 너 없으면 죽어, 나헌티는 인자 니밖에 없다니께. 나가 누구 때문에 버티는디..."
저를 안고 있는 품의 가슴 고동 소리에 섞여 들리는 나직하고 진지한 말에 윤진은 심장이 쿵,한다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목소리가 쓸쓸하게 들리는 건 착각이 아닐거다
"그랑게 바꾼단 말 하지 말어, 그만둔단 말도 안되야"
다짐하는 말에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은 걸 꾹 참고 퉁명스럽게 묻는다
"... 성균이는"
윤진의 말에 키득,하고 웃는 소리가 들린다
움직이지도 못하고 꼭 안고 있던 걸 놓고는 윤진의 얼굴을 한번 꼼꼼하게 쓰다듬는다
장난스런 웃음을 꾹 참는 이상한 얼굴을 하고서 윤진을 내려다 보던 호준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큰일이네, 우리 윤진이"
"... 뭐가"
"니 나 그르케 좋아해서 어쩌냐, 인자 남자도 막 질투나고 그려? 성균이더러 나헌티 관심 갖지 말라구 그르까?"
".... 디지고 싶냐"
입술을 삐죽,하면서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호준이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윤진의 내민 입술을 톡,하고 살짝 건드린다
화들짝 놀라 쳐다보자 호준은 그저 씩 웃는다
"윤진아"
"... 왜"
"어째 쓰까잉"
".. 뭐가"
"... 니 그리 화내는 것도 이뻐죽겠응게, 나가 미쳤는갑다,"
그래, 니가 정말 미쳤는갑다
얼굴이 약간 달아오르는 걸 느끼면서 대답 대신 입술만 삐죽이며 고개를 돌린다
가만히 윤진이 하는 양을 보고 있던 호준이 슬쩍 귀에 대고 속삭인다
호준의 말을 들은 윤진의 얼굴이 새빨개진다
"니 지금 엄청 위험한 거 알고 있냐?"
"...."
"자꾸 입술 내밀지 말어야, 나가 시방 한번 더 하고 싶은 거 꾹 참고 있응게,"
=
=
++
부분 기억상실에 대한 의학적 지식이 없어서 제대로 못쓰고 있나 걱정이 되긴 하지만
실제로 우리 엄니께서-_- 스트레스로 인해서 약 3년 정도의 기억을 잃어버리신 적이 있는데 (그래도 이틀만엔가 돌아오긴 했지 다행히)
그때 경험으로는 딱 그 중간의 기억이 봉인되고 일상생활은 무의식적으로 제대로 다 하시더라고...
그래서 호준이도 크게 무리는 없지 않을까 하고 하는, 의학지식 없는자가 글을 쓸라니 설정 이상할까봐 걱정되서 하는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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