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쾅.
급하게 문을 밀치고 들어선다
'윤진이, 니 부인'
나정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야가 와이카노, 윤진이도 아나 니 정신 없는 거? 모르는 거 아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묻는 나정에게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흠씬 두들겨맞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가 흔들리고 온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무슨 말로 그 자리를 빠져나왔고 어떻게 집까지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너거집? 역삼동에 있는 거? 맞네, 알믄서 뭘 또 묻노'
자신과 윤진이 결혼해서 살았다는 그 집.
자신의 기억 속에는 없는 집.
자신에게는 윤진이 홀로 살고 있었던 집.
저도 모르는 새, 구석에 있는 방 앞에 선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흘낏 지나친 후로는 내내 잊은 것처럼 무시해왔다
이상하다 생각했어야했는데
어째서 집에 있는 문에 번호키가 달려있는 건지
어째서 윤진은 한번도 이 방에 들어가지 않는 건지
마치 없는 문인 것처럼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어 문에 달린 번호키를 밀어올린다
0.6.0.9.2.2.5.7.
저절로 손가락이 움직인다
파란 빛을 내며 삐리릭, 소리와 함께 달칵. 자물쇠 풀리는 소리가 난다
너무 쉽게 열리는 문에 오히려 자신이 당황한다
왜 자신은 이끌린 것처럼 이 문을 열었는지
왜 아무도 금지하지 않았는데도 이 문을 열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한번도 시도해볼 생각도 떠올리지 못한 비밀번호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 건지
... 이 문 너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겁이 난다
열린 손잡이를 잡고 잠시 심호흡을 한다
잠깐 망설이던 호준은 눈을 질끈 감고 문을 연다
확,하고 열린 문으로부터 차가운 냉기가 밀려든다
호준은 찬 공기를 맞고서야 살짝 실눈을 뜬다
난방을 하지 않아서 온통 차가운 방의 정면에는 커다란 창이 자리잡고 있고
왼쪽 편으로는 책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책장이 벽을 덮고 있다
책장 옆으로 놓인 책상 위는 아무 것도 없이 깨끗이 치워져있고 의자만 덩그라니 놓여있다
사람의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텅비어 있는 방 안으로
호준은 뭔가에 끌린 듯 한 발, 내딛는다
고개를 돌리자 그제야 열린 문에 반쯤 가려져있던 액자가 눈에 들어온다
무릎을 꿇고 앉아 뒤돌려 벽에 세워져있는 액자를 조심스럽게 돌려본다
아...
믿을 수 없게 환하게 웃고 있는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있다
낯설 정도로 행복해보이는 윤진의 미소에서는 두려움도 불안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건,
그 남자는.
윤진이 보고 있는 상대를 확인하고 호준은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 앉는다
자신의 기억보다 훨씬 단호한 입매를 한 이 남자는
아마도 지금 호준이 기억하지 못하는 그 시간 언제쯤의 자기자신.
어색한 듯 딱딱하게 굳은 얼굴 근육과 달리 뚫어져라 윤진을 바라보고 있는 그 눈빛은
그 주인이 사랑에 빠진 걸 감추지 못해서 인상을 훨씬 부드럽게 만든다
호준의 손이 단호하게 윤진의 손을 감싸고
오로지 서로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눈을 바라보고 있는 사진에 가득한
충만한 기운에 흑백으로 박제된 순간인데도 금새 살아 움직일 것만 같다
멍하니 사진을 바라보고 있던 호준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온다
휘청하고 책상을 손으로 짚은 호준의 발에 뭔가 묵직한 것이 툭,하고 걸린다
책상 아래, 의자 옆으로 놓여있는 상자를 발견한다
생각보다 꽤나 무거운 상자를 들어 책상 위에 올린다
대체 무엇이 있을까 두려움에 떨리는 손으로 판도라의 상자이기라도 한 듯 조심스럽게 박스를 연다
...?
담겨있는 물건들의 의미를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자그마한 신발,
손바닥만한 옷,
손가락에나 끼울 수 있을 것 같은 양말
이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은 담요
초음파 사진들
모자수첩
보험증명서
유리가 없는 상처난 액자
액자 속 역시나 상처난 사진
윤진에게 자신이 꽃다발을 바치고 있는
멍하니 상자 속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 책상 위에 늘어놓다가
그때서야 다시 텅 빈 방 안을 둘러본다
조금 전 방에 들어설 때와 마찬가지로
가지런히 책이 꽂혀있고
바닥에는 액자 외엔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은
사람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공간.
그러나,
호준의 눈에는 마치 숨겨졌던 그림이 떠오르는 것처럼 확연하게 이 방이 원래, 어떤 모습이었는지. 깨닫고 만다
아니 자신이 이 방에 마지막으로 서있었던 그 순간이,
그 마지막 순간의 모습이 떠오른다
지독하게 눈이 쏟아던 날,
눈 내리는 창가에 놓여있던 말라버린 화분.
온통 난장판이 되어있던 방.
피.
'물은 일주일에 두 번만 주면 돼, 흙이 마르지 않게'
생생하게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
잡지 못했다
윤진이 내밀었던 서류를 담담히 받아들 수 밖에 없었다
그게 그 순간 윤진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떠나서 더 행복하게,
약속을 지킬 수 있는 누군가와
불행을 가져오지 않을 누군가와
그것이 지금 널 위해 해줄 수 있는 나의 마지막.
지켜주겠다는 약속도
곁에 있겠다는 약속도 어기고 말았다
굳은 맹세는 부메랑처럼 날아와 호준을 쓰러트렸다
지켰어야 하는 세계가 무너지고
외면했던 세상은 이미 사라졌고
목숨을 걸고라도 지키겠다던 맹세는 부서졌다
더이상 무엇을 망가트리게될지 겁이 났다
아버지를 버리고 사람들을 짓밟고 일어선 댓가로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닐까
아직도 얼마나 더 많은 불행이 기다리고 있을까,
잠시 누린 행복의 댓가로
널, 지킬 수 있을까
아니 너마저 부서지는게 아닐까
나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윤진이 원하는 대로,
그저 더이상 잡지 않는 것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차마 행복하라는 말까지는 하지 못했다
모든 맹세가 거짓이 된 후에도
모든 약속이 물거품이 되었는데도
차마 그 가벼운 거짓말의 무게를 더할 수가 없었다
윤진이 떠난 뒤 이미 멈춰있던 시간은 더 느리게 흘러갔다
술에 취해 있거나 일에 미쳐있거나, 신경은 날카로워지고 주변에는 냉정하다 못해 잔인하게 굴었다
그런 자신을 견디다 못해 때때로 화를 내기 직전까지 얼굴이 붉어지던 성균은 윤진을 떠올렸는지 차마 다음 말을 하지 않았다
말을 삼키는 성균과 마주할 때면 언제나 눈 앞에서 떠나지 않는 윤진의 부재가 확정되는 것 같아서 더 견딜 수가 없어졌다
그런 날은 얼음장 같은 방에 쪼그리고 앉아 혼자 술을 마셨다
아무리 차가운 공기에도 가슴 속 불은 꺼지지 않았고
아무리 뜨거운 독주를 들이부어도 얼어붙은 몸은 데워지지 않았다
위태로운 줄타기
윤진이 떠난 후 호준의 인생이란 그러했다
매일 까마득히 높은 꼭대기에 가로지른 줄을 비틀거리며 걸었다
언제든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아니 매번 어떻게든 흔들리면서도 떨어지지 않는 것이 신기한
줄타기.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몰랐다
매일은 그저 세지 않고 지나가는 나이 같았다
그저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아침 눈을 떴고
창 밖으로는 아예 바깥의 풍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마치 오래 전 그날처럼.
휘청거리며 다가간 창가에서 작은 화분이 놓여있는 걸 발견했다
원래 무엇이 심겨있었던 건지 알 수 없게
작은 화분의 그 무언가는 소생할 수 없을 만큼 갈색으로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아니 처음부터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 '화분'이 여기 놓여있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다
'물은 일주일에 두 번만 주면 돼, 흙이 마르지 않게'
윤진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충분히 잊고 지냈다고 생각한,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자위했던 그 목소리가
책망하는 것도 달래는 것도 아닌
그저 담담하게 읊조렸다
그녀의 마지막 부탁.
그마저도 지키지 못했다.
그때까지 겨우 버텨왔던 신경이 뚝, 끊어졌다
'으아아아아'
와장창 소리를 내면서 화분이 박살났다
책상 위 물건들이 날아가고 책장의 책이 떨어졌다
닥치는대로 손에 잡히는 물건을 집어던지던 호준은
마침내 책장 한 구석에 엎어놓았던 액자를 집어들었다
잊고 있었던 행복한 한때,
윤진이 저를 내려다보며 웃고
자신이 윤진에게 꽃다발을 내미는
저도 모르게 주먹으로 액자를 세게 내려쳤다 이미 돌아오지 않을 시간에 종언을 고하듯이
유리가 산산조각 나고 사진의 중앙, 윤진과 자신 사이에 유리 조각이 박혀 찢겼다
주먹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따끔거리는 통증도 느끼지 못하고 호준은
지친 듯 헉헉거리며 엉망이 된 방을 낯설게 둘러보았다
지금 자신의 모습과 같은,
온통 헝클어지고 도저히 복구될 수 없을 것처럼 폐허가 된
그 방의 창문 너머로는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쳐 방을 나온 호준은 거실에 놓인 차키를 집어 들었다
여기가 아닌 어디론가로 도망치지 않고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너마저 없는 이 세상을
나는 더이상 견딜 수가 없다고.
쾅,하고 성급하게 현관문이 닫히고
조금 뒤 요란한 엔진소리와 함께 차 한 대가 튕겨나오듯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와
위태롭게. 온통 하얗게 된 텅빈 거리를 달려나갔다
=
하아.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들고 있던 봉투를 잠시 내려놓고 숨을 돌린 뒤 다시 반대편 손으로 든다
아침부터 멀리 다녀오느라 차를 오래 탄데다 장을 보겠다고 사람이 많은 마트에까지 들린 탓에 심장이 조금 떨리고 숨이 탁, 막힌다
오랫동안 되도록 차는 타지 않고 걸어다닐 수 있는 거리만 다녔고 마트 같은 사람이 많은 곳도 참으로 오랜만에 간 거라 무리를 한 탓이다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면서 또 잠깐 내려놓고 쉰다
문득 하늘을 보니 아직 4시 즈음인데도 벌써 하늘이 어둑하고 구름이 밀려오는 것이 아침과 달리 곧 눈이 오려나 싶다
눈이 오는 건 좋은 징조일까, 윤진은 잠깐 생각한다
되도록 좋은 징조이면 좋으련만.
잠시 후 호준의 얼굴을 보고 자신이 해야만 하는 말을 떠올린다
저절로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하.하고 짧은 숨을 내뱉는다
어떻게 반응할까 그는
이제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게 되는 걸까
또다시 멈칫 도망치고 싶어지는 마음을 돌려세운다
호준의 부모님과 희주를 두고 맹세하지 않았던가
오늘은 꼭 말하겠다고
더이상 속이지 않겠다고
어떤 결과든 받아들이겠다고
가만히 눈을 감고 마음을 다잡은 윤진은 바닥에 내려놓았던 봉투를 다시 든다
일단 집에 돌아가서 호준이 좋아하는 요리를 하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저녁을 풍성히 먹고
그런 뒤에, 말을 해야지,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오늘이 마지막이 되더라도, 마지막의 기억을 간직할 수 있도록
윤진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다
문득 현관 앞에 제대로 벗지 못한 신발이 나뒹굴고 있는 걸 발견한다
호준의 신발.
왜인지 덜컹,하고 심장이 내려앉는다
이건 아무런 의미도 아니라고
그저 집에 일찍 돌아왔을 수도 있지 않느냐고
스스로 억지로 다독인다
조심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선다
이상하게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지독히 무겁게 덮쳐오는 위화감에 윤진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고 만다
잊었다고 생각했으되, 몸은 기억하고 있는 이 차가운 공기
채워졌다고 생각했던 구멍으로 바람이 분다
"호준씨...?"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겨우 그의 이름을 부른다
차라리 무슨 대답이라도 들렸다면
아무리 끔찍한 소리라도 들었다면
차라리 그것이 비명소리였더라면
성난 고함소리였더라면
그랬다면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대답 대신 윤진은 열린 문을 발견한다
오래 잠겨있던,
차마 열 수 없었던 그 문이
열린 채
차가운 공기가 밀려와 윤진을 휘감는다
또다시 윤진은 텅빈 벌판에 선다
죽을 것 같은 공포
또다시 자신이 무엇을 마주하게 될런지 알 수 없어서
아니 어쩌면 너무 잘 알 것 같아서
윤진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움직여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선다
언젠가 윤진이 발견했던 것처럼 어지러운 방 한 가운데 한 남자가 등지고 서있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차가운 겨울 바람이 몰아친다
바닥에 내팽겨쳐진 물건들을 발견하고 윤진은 도망치고 싶어진다
도저히 버릴 수 없었던 아기 옷들,
나정이 기뻐하며 보내주었던 장난감들
신을 수 있을 때까진 또 뱃속에 있던 시간만큼이 더 필요하다는 핀잔을 주었는데도
끝끝내 사와서 이걸 우리 아가가 신으면 얼마나 예쁘겠느냐고 내밀었던 아기 신발들
흔적에 불과했던 첫 초음파 사진
손내밀며 잡을 수 있을 것 같던 마지막 초음파 사진
날마다 썼던 일기장은 갈기갈기 찢겨진 채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에 날리고
깨진 액자의 유리가 온통 반짝이며 흩어져있고
그리고
버릴 수도, 다시 볼 자신도 없던 자신과 호준의 사진이 절반으로 찢겨 떨어져있다
바닥에 떨어진 사진 위로 핏방울이 떨어진다
놀라 올려다본 주먹의 찢긴 상처에서 피가 흐르는데도 남자는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윤진은 저도 모르게 한 발 다가선다
"... 호준씨"
윤진의 부름에 못박힌 것처럼 미동없이 창 밖을 보고 섰던 호준이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방금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채 깨닫지 못한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주변을 둘러본다
어색한 그 행동에 윤진은 심장이 쿵, 서버린다
윤진을 발견하고도 마치 아무 의미도 없는 듯 멍하니 바라보는 텅빈 눈빛에 저도 모르게 가슴을 부여잡은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제발,'
윤진은 간절히 호준을 올려다보며 누구에게라고 정한 바 없는 기도를 한다
'제발, 이러지 말아요'
윤진은 호준에게 다시 한 발 다가선다
바닥에 가득한 유리 조각에 찔린 듯 따끔,하고 바닥에 핏자욱이 남는다
아픔에 멈칫 멈춰선 윤진은 여전히 두어걸음 떨어져 무표정하게 저를 바라보고 있는 호준을 부른다
"호준씨"
다시금 이름을 부르자 호준의 얼굴에 그제야 다른 표정이 떠오른다
의아함.
의심.
혼란.
그리고 천천히,
마치 처음 말을 배운 아이처럼 또박또박
너무 맑아 차라리 잔혹한 눈으로 바라보며 묻는다
"... 누구.. 세요?"
=
============
이건 클리셰 그 자체인 이야기.. 라고 처음부터 말했지만.. 실망을 안겨준건 아닐지 걱정을 하면서..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어주는 냔들, 고마워. 고마워. 고마워
+
여수 친정에 내려가 몸조리를 마치고 한달만에 서울로 돌아온 윤진을 맞이한 것은 서재 문에 설치된 버튼식 키였다
현관문에 설치된 것과 같은 종류의 자물쇠 키를 낯설게 바라보다 결국은 차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섰던 것이,
그것이 시작이었다
여수에 머무는 동안 몇번인가 안부를 묻는 통화를 했고
매주 갈비며 미역이며 전복과 같은 귀한 음식들이 굳이 서울에서 내려오곤 했지만
정작 호준은 한번도 그 물건들과 함께 여수에 찾아오지 않았다
손서방은 어째 그러냐며 섭섭해하시는 어머니께 그 사람이 얼마나 바쁜 줄 아느냐며,
괜히 신경쓸까봐 그러는 거라고 대신 변명해주었지만 어딘가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는 없었다
가끔의 통화에서 느껴지는 거리감은 그저 그런 불안감으로 인한 지나친 생각이라고,
자신만큼이나 그도 서울에서 혼자 그 사건과 이 시간을 견디느라 힘들기 때문이라고 애써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갈거라고
어쩜 그렇게 순진하게 확신했던 걸까.
그 모든 일을 겪고도.
집 밖의 그는 여전히 승승장구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럴수록 가슴을 잃어버리고 머리만 남은 듯이 잔혹해졌다고 했다
점점 집에 들어오는 시간은 늦어지고 들어오지 않는 날도 많아졌다
손대는 사업마다 돈줄이 터진다고 마이더스의 손이니 신의 손이니 하는 부러움 섞인 말을 듣는다고도,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의 집무실에 틀어박혀 일분 단위로 쪼개서 일을 하는 그를 지칭해 사업 기계라 한다고도 했다
성공의 가도를 달리고
아무것도 그를 흔들 수 없는 것 처럼 보였던 그때
그는
누구보다 외로웠고
누구보다 외롭게 했다
아주 늦은 밤
거의 새벽이 될 무렵이면 들려오는
조심스럽게 자물쇠가 돌아가는 소리,
작은 문 소리
사락거리는 유령같은 발소리
또다른 자물쇠 열리는 소리
그리고
기나긴 정적.
윤진은 종종 텅 빈 침대에 둥글게 몸을 말고 그 소리들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눈을 뜬 채 벽을 응시하고 있곤 했다
불과 1분도 채 되지 않는 그 순간을 예민하게 듣고 있노라면
분명 한 집에 있는 그와 자신 사이에 마치 몇억광년만큼의 거리가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집에서의 호준은 그 자물쇠가 달린 방에 마치 선고를 받은 죄인처럼 칩거했다
마치 없는 사람처럼 집에 있는 동안은 방 밖으로 나오지도 기척을 내지도 않았다
온전히 자신의 세계에 틀어박힌 채 스스로에게 내린 징벌을 감당하고 있는 그가
대체 얼마나 더 그 수감 기간을 견뎌야만 저에게로 돌아올 수 있는 건지 윤진은 알지 못했다
고립된 유배지와 같은 그의 방문을 여는 건
그가 세상으로 떠나고 홀로 남겨진 낮, 청소하기 위해서 뿐.
0.6.0.9.2.2.5.7.
혹시나 하고 눌러본, 첫 신혼집에서부터 언제나 써왔던 그 비밀번호에 그토록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는 걸 보면서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알 수 없어졌다
그나마 비밀번호를 자신이 추정할 수 없는 것으로 바꾸지 않은 것에 희망을 가져야할지
세상에 그 숫자를 기억하고 있는 또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할 만큼 자신을 잊은 것인지
너무 쉽게 열린 문 앞에 서서 한참 망연자실했다
침입자라도 된 듯이 조심스럽게 들어섰던 그의 방은 기억 속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가지런히 꽂힌 책들, 꺼져있는 노트북, 뒤돌려져있던 액자
누군가 이곳에서 잠을 청하고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는 흔적이라고는 방 한구석에 놓여 있던 얇은 담요뿐.
생활의 흔적이라고는 없는 그곳의 그 얇은 담요가 지금의 호준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환기를 하고 책상을 훔치고 먼지를 닦아내고 가끔 침구를 빨래하고
그러나 결국은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은 것처럼 고요해진 그 공간을 빠져나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가끔은 그 흔적을 느꼈을 법도 한데, 호준은 단 한번도 먼저, 다녀갔느냐,고 말하지 않았다
언제나 풍성한 수사가 가득 했던 그의 말은 말라버린 것 같았다
아주 가끔 우연히 두 사람이 스치고 지날 때도 있었다
그럴 때의 호준은 마른 뺨을 하고서 아주 예민하게 몸을 움츠렸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숨결조차 윤진에게 닿을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멈칫거리며 물러서는 그를
그저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것이 윤진을 더욱 외롭게 했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마치 세계의 끝과 끝에 서 있는 것처럼
호준과 윤진 사이에는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아니 한 발 내딛었다간 어디까지 떨어질지 알 수 없이 깊은 절벽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그 위태로운 정상에 선 채로
그렇게 몇달,동안을 윤진은 침묵을 견뎌내기 위해 싸워야했다
그건, 평범한 아침이었다
아주 미약한 바람이 살짝 흔들고 갔을 뿐.
매일 견뎌야했던 것과 같은 아침,
그뿐이었다
그랬다
하지만
어째서 모든 커다란 비극은 사소한 징조로부터 시작되는 걸까
쨍그랑.
아침을 먹고 난 설겆이를 하다가, 무슨 생각 끝이었던건지 접시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결혼할 때 샀던, 접시였던 걸 깨닫고 저도 모르게 눈을 찌푸렸다
조심성 없는 스스로를 탓하며 무릎을 꿇고 유리 조각을 집었다
"아얏,"
유리 조각에 베여 오른쪽 집게 손가락에서 피가 솟았다
따끔한 아픔에 저도 모르게 짧은 비명을 뱉았다
눈에 띄지 않는 나비의 날갯짓.
눈에 띄지 않을정도로 작은 유리 조각이 혹시나 들어갔을지도 몰라서
저절로 입으로 가져가던 손가락을 멈추고 대신 물에 씻어야겠다,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어느새 나왔던 걸까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거실에 선 호준이 멍하니 윤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피가 흐르고 있는 윤진의 손을 보고 있었다
나왔으면 뭐라고 말이라도 하든가
아니면 약을 가져와서 소독이라도 해주던가
그도 아니면,
차라리 나오지나 말 것이지
그저 혼자 견디게 내버려둘 것이지
마치 그러기 위해 거기 있는 존재처럼 꼼짝않고 선 호준을 보다
윤진은 지난 몇달간 눌러왔던 감정이 치솟는 걸 느꼈다
"... 내 탓이 아니야"
냉정을 잃어버린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지만 의미만은 정확하게 전달했다
"당신 탓도 아니야, 그건 누구의 탓도 아니었어"
지난 몇 달간 내내 윤진의 작은 가슴을 짓누르던 말이었다
그건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고
그건 당신이 혼자 짊어질 책임이 아니라고
우리는 이 시간을 '함께' 견뎌야한다고
그러니
제발,
날 봐달라고
윤진의 손가락에서 흘러내린 핏방울이 치마자락을 붉게 물들였다
윤진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목덜미를 축축하게 적셨다
호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진심을 다한 굳은 언약
세상으로부터 지켜주겠다던 그 말
스스로에게 지웠던 그 책임,
한때 기쁨으로 했던 그 약속이, 이제와 지키지 못한 호준 자신을 공격하고 스스로를 가둬버렸다
날마다 지옥 속을 허우적 거리면서 애써 혼자 감당하려는 호준을 그저 바라만 봐야 하는 것이 윤진의 지옥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절망은.
윤진은 말없이 멍하니 선 호준을 바라보았다
초점 없는 눈동자
그 언젠가
장례식장에서,
병실에서,
자신이 마주했던 것과 같은 그 텅빈 눈.
다만 그때와 달랐던 것은
그 어느 때인가 텅빈 지옥에서 호준을 불러냈던 자신의 목소리가 이번엔 아무 힘도 없다는 것.
가장 끔찍한 사실은,
이제 더이상 그 절망에서 자신이 호준을 구해낼 수 없다는 것.
아니 자신이 그 절망의 원인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걸 확인하지 않기 위해 그동안 그토록 자신을 피하는 호준을, 자신 또한 피해왔는지 몰랐다
"... 내.. 탓이 아니야"
윤진은 다시 한번 힘없이, 말했다
윤진의 말이 벽에 던진 돌멩이처럼 툭,하고 호준에게서 튕겨져나왔다
데구르르 바닥에 구르고 있는 자신의 말이 무의미하게 사라지는 걸 지켜보면서
윤진은 그토록 외면해왔던 그 어둠이 사실은 내내 제 앞에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송글송글 맺히던 피가 멈추고 윤진의 치맛자락의 핏방울이 그대로 검붉게 굳어갈때까지
서로 제자리에 서서 바라보고 있기만 하던 몇 분, 아니 몇 시간, 어쩌면 영원
손가락에 난 상처보다 더 깊이 마음에 생채기가 그어졌다
윤진은 견딜 수 없다는 듯, 그날 이후 처음으로 호준에게 다가가 틈을 주지 않고 팔을 잡았다
출근 준비였던 듯 입고 있는 하얀 와이셔츠에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붉은 지문이 남았다
호준은 윤진에게 팔이 붙들린 채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날 봐,"
윤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건 슬픔이 아닌 분노
"지켜준다며, 곁에 있을거라며, 나한테 그랬잖아, 약속했잖아"
아니 어쩌면 슬픔
차라리 울었다면, 감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차라리 네 탓이라고 했다면 그마저도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혼자 끌어안은 채 매일 조금씩 죽어가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윤진의 말에 호준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나 지금 너무 힘들어, 이러지마 응?"
호준을 붙들고 있던 윤진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한마디 한마디 마다 떨리던 호준의 눈은 어느새 더 깊은 절망으로 깊어졌다
"... 제발,"
결국은 애원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를 붙잡고 있던 손이 저절로 툭,하고 힘을 잃고 떨어졌다
풀린 다리가 휘청,하고 흔들렸다
그 자리에 주저앉을 것 같아서 윤진은 저도 모르게 팔을 뻗어 호준에게 몸을 기댔다
불에 데인 것처럼 떨면서 호준은 윤진을 밀어냈다
쿵.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둘 다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좀더 걸렸다
밀쳐낸 그대로 굳어버린 호준과
바닥에 쓰러진 윤진은
조금 전 서로에게 벌어진 그 일을 믿을 수 없어서
차마 상대를 바라보지 못했다
안 그래도 침묵 뿐이었던 공간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이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 삐리릭,
호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굳어있던 둘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 여보세요"
쉬지 않고 들리는 벨소리에 잠긴 목소리로 호준이 전화를 받았다
"어, 아니 지금 나가, 어, 그래 먼저 진행해"
출근하지 않는 호준을 찾는 회사에서의 전화를 받는 동안 윤진은 소리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 탁,
문소리에 전화를 받던 호준이 돌아봤다
- 달칵.
윤진이 방금 닫고 들어간 방의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멀리 손톱만해보이던 조각 구름이 몰고온 폭풍우.
나비의 연약한 날갯짓이 일으킨 회오리 바람.
미루고 미뤘던 비극.
불과 며칠이 걸리지 않았다
그가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을 더 고통스러워한다는 걸
자신을 볼 때마다 그 고통스러운 기억 또한 매번 불러내고 만다는 걸,
지키지 못한 약속을, 부숴져버린 미래를, 그는 매번 그렇게 자책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기까지.
그 며칠동안 침대에 누운 채 소리없이 울고 울고 또 울면서 생각했다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을 하는 방법.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방법.
당신을 떠나는 일.
며칠 후 아침,
출근하는 호준을 기다리고 있던 윤진이 서류 봉투를 내밀었을 때
호준은 마치 올 것이 왔다는 듯 놀라지 않았다
호준의 이름과 도장만 있으면 완성되는 간결한 윤진의 글씨로 채워진 서류를
호준은 회사에서 검토하는 사업 계획서라도 되는 것처럼 꼼꼼하게 살폈다
"화분은, 두고 갈게"
윤진은 그런 호준을 바라보다 겨우 말했다
호준은 손에 여전히 서류를 든 채 멍청하게 윤진을 쳐다봤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물만 주면 돼, 흙이 마르지 않게만"
사소한 흔적에라도 걸고 싶었던 부질없는 희망이었다
언젠가, 제발 가까웠으면 하는 먼 미래에, 혹시나 모를 가능성.
"일주일에 두 번이야,"
대답하지 않는 호준에게 다시 한번 말한다
간절히, 간절한 마음을 담아,
그러나 들리지 않도록,
기억해 줘.
잊지 말아줘.
=
1) 5화의 숨겨진 큰 거짓말은, 호준이 떠난 것이 아니라. 윤진이 떠났다는 것.
어설프지만 야구장에서 호준이 붙잡고 있던 손을 윤진이 놓아달라고 하고 나가는 것과 겹쳐서 쓴 건데.
그러니까 - 손을 놓은 건 윤진, 하지만 보내준 건 호준. 모두에게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 두사람. 하지만 그렇지 않았던 결과.
2) 또 몇가지의 겹쳐지는 이야기, 의미, 상징들이 있지만 - 알아차려준다면 기쁘고.. 아니라고 해도 좋지만..
대부분의 질문에 대한 답은 다 등장한 것 같고. 이제 결말을 제외하면 하나의 질문과 두 개의 상징만이 남았어...
'reply - h&y > forget me no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응답하라1994][해태x윤진] Forget Me Not. 12 (1/2) (0) | 2013.12.17 |
---|---|
[응답하라1994][해태x윤진] Forget Me Not. 11 (0) | 2013.12.14 |
[응답하라1994][해태x윤진] Forget Me Not. 9 (0) | 2013.12.08 |
[응답하라1994][해태x윤진] Forget Me Not. 8 (1) | 2013.12.07 |
[응답하라1994][해태x윤진] Forget Me Not. 7 (1) | 2013.1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