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쏴아,
하고 바람이 든다
철썩,
하고 파도 소리가 들린다
눈을 감고 테라스의 의자에 길게 기대앉아 바닷바람을 맞는다
멀리 들려오는 규칙적인 파도 부서지는 소리에 숨소리도 천천히 맞춰진다
잠이 든 것처럼 고른 숨소리만 들린다
느슨히 기댄 채 천천히 시간이 흘러가는 걸 느낀다
- 따르릉
요란한 전화벨 소리가 정적을 깨트린다
화들짝 놀라 기대고 있던 등받이에서 몸을 떼고 안쪽을 멍하니 들여다본다
벨소리가 저렇게나 컸던가 새삼 놀라워하다 생각해보니 이 방에 온 뒤 저 전화가 먼저 울린 것은 거의 최초가 아닐까 싶다
내내 침묵하기만 하던 이 전화를 울린 것이 대체 누구일지
마치 공포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전조라도 되는 것처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동안 전화가 뚝 끊긴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려다말고 끊긴 전화에 멈칫 한다
혹시나 서울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좀더 빨리 전화를 받을 걸 그랬나, 하고 후회하고 있자니 또다시 요란하게 벨이 울린다
여전히 내키지 않는 듯 천천히 그러나 조금 전보다 약간 성급하게 방으로 들어가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 야 이노무 가시나야! 니 진짜 이랄래!
다짜고짜 버럭 화부터 내는 수화기의 목소리에 멍해진다
대체, 그녀는 이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아낸 걸까
어째서 마치 어제인 것처럼 익숙하게 단숨에 성큼 이 공간으로 들어와버리는 걸까
울컥해오는 감정을 겨우 추스린다
그리고 담담하게 대답한다
"어짠 일이여"
- 어쩐 일? 니 확 쌔리삘라 마. 어? 일년 넘게 연락 한 통 없던 년이 뭐어? 어쩐 일?
파르르 넘어갈 듯 데시벨이 한껏 높아지는 목소리에 오히려 후우 하고 웃음이 샌다
아아 그리웠다 이 목소리가
"잘 지내냐? 아, 글고 보니 갓난쟁이 벌써 돐 지났겄네, 아는 잘 크제?"
- 잘 안 크믄, 니는 그날 수록 한번 들다보지도 않고, 이제 와서 새삼 관심있는 척 하지 마라
불퉁불퉁 하고 있을 얼굴이 눈앞에 그려진다
"... 나정아"
- ....
"미안혀"
- ... 가시나,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나, 연락이라도 좀 하지. 누가 니 잡아묵는다 카드나, 끌고 온다 하드나
나직한 사과의 말에 수화기 너머 나정이 울먹,한다
결국 이렇게 한번에 풀려버릴거면서 매번 한껏 화를 내고 성질을 부리는 게 나정답다고 해야할까
수화기를 든 채 가만히 웃는다
훌쩍거리는 소리가 몇번인가 들리던 수화기 너머에서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 잘 지내나?
"잘 지내, 괜찮어"
- 괜찮기는.. 오빠야가 니 약 잘 챙기 묵는가 걱정하더라
"소개시켜주신 병원 잘 다니고 있응게 걱정 마시라고 혀"
어떻게 나정이 이 전화번호를 알았을까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이 등장한다
모두에게 알리지 않고 잠적했지만, 해윤에게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제가 떠난 이후 호준을 부탁하기 위해서도 그랬고,
일단은 제가 품고 있는 병 때문에 그랬다
잠시 떠나있을 예정이라고, 괜찮을거지만 혹시 모르니 약을 좀 처방달라고 요청했을 때
해윤은 한참 한숨만 쉬면서 '꼭 이렇게까지 해야하느냐',고 여러번 만류하다가
자꾸 그러면 그냥 사라지겠다고,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윤진의 의지를 확인한 후에야
결국 긴 한숨과 함께 처방전 대신 주소를 하나 써주었다
'내 아는 분이 고향 내리가가 하는 병원이다, 니 간다고 전화도 해놓을게 잘해줄기다'
해윤은 아주 가끔 소개해준 그 의사 분을 통해서 연락을 해왔다
대개는 그저 윤진의 상태가 어느 정도인가 체크하는 수준,
서울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윤진이 먼저 묻지도 해윤이 먼저 말하지도 않았다
- 병원 아직도 다니는 거가? 니 혼자 괘얂나? 아직도 마이 아프나
"아녀, 많이 좋아졌어. 인자 약도 거의 끊었구"
- 맞나..
안심시키는 윤진의 말에 나정이 흐릿하게 수긍한다
대체 해윤에게 자신의 연락처가 있는 걸 나정이 어떻게 알아낸 건지 모르겠다
아니면 해윤이 이제는 나정이 저와 연락을 해봐도 좋다고 생각한 건지도 모른다
"근디 내 번호는 어찌 알었냐?"
- 어찌 알기는, 김해윤이 그 인간한테 받았지
"오빠랑 그렇게 연락혀도 재준이가 별 소리 않냐?"
- ...가만 있겠나 가가, 아주 잡아물라 칼거를
모든 일에 그저 나정이 하자는 대로 응응, 순하게 잡혀살면서도
유독 해윤과 관련된 일이라면 날카로움을 감추지 못하는,
애써 티내지 않으려는 그 질투심이 오히려 귀엽다고 나정이 낄낄거리곤 했던
하얀 얼굴의 칠봉을 떠올리고 윤진은 수화기를 든 채 피식 웃는다
"근디 오빠랑은 어찌 연락을 한겨, 설마 그짝서 먼저 혔어?"
- ... 아니
"니가 먼저 헌겨? 재준이 알믄 난리나겄구만"
- 니 어딨는지 알라믄 별 수 있나, 니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연락도 없고,
내가 우리 집 평화 깨지는 거, 아니 내 주도권 뺏기는 거 각오하고 니 찾은 기데이
니 우리집 파토나는 거 볼라는 거 아니믄 또 도망갈 생각하지 마라, 알긋나?
가시내 협박도 가지가지로 헌다.
아마도 해윤에게도 이렇게 협박했으려나
윤진은 속으로 웃는다
"알았다니께, 하여간에 가시내, 쓸데없는 승부욕하고는. 간난쟁이 델꼬 대단허다 대단혀"
- 알믄 연락 좀 하고 살아라, 진짜 잘 지내는 거 맞나?
"진짜 잘 지낸당게, 거기는 어뗘? 엄니, 아부지 다 잘 계시제? 건강은 괜찮으시고?"
- 그게 궁금한 가시나가 일년 넘게 잠수를 타나, 그래 걱정이 되믄 연락을 좀 하든가
걱정되면 걱정이 풀릴 때까지 툴툴거리는 성나정 성격, 또 나왔다
윤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는다
"미안, 미안허다고 안허냐 가시내, 끈질기기는. 니 뒷끝을 늘이믄 지구를 한바퀴 돌리고도 남을 것이여,
- 뒤끝 부리게 니가 안하나
".. 하여간에 아는 잘 크제? 칠봉이는, 잘허냐? 하그사 시즌 시작혔겠네"
- 우리 남편이야 잘 하지, 잘 안하는게 이상한 양반이다 아이가, 가 일본 진출 하자마자 20승 한 인간이다
만날 티비 나오는 게 우리 남편 얼굴인데, 니 육지 떠났다고 야구도 끊었나, 그래도 용케 시즌 시작한 건 기억했다?
구박으로 시작해서 지 남편 자랑으로 끝나는, 기-승-전-김칠봉의 묘한 재주.
조금 더 내버려두면 아예 연락이 없었던 지난 시즌에 칠봉이 몇 승을 했는지 올해 전망이 어떤지까지 시시콜콜하게 나올 것이 분명하다
윤진은 다급하게 나정이 숨을 들이마시는 새 다른 이의 안부를 묻는다
"동준이는 잘 있냐? 언니도 잘 지내시제? 성균이는, 글고 본 게 그짝집도 아그 나올 때 지났지 않어? 쌍디라 했든가?"
- 가시나 별 게 다 궁금타, 다 잘 있지, 니만 빼놓고 여기서 다들 지지고 볶고 하면서 잘 지낸다
동준이는 아직 대학병원 있고, 언니는 개업한다 카데, 성균이야, 니도 알제, 몸이 두 개라도 모자라다
회사 일 하랴 쌍디 아빠 노릇하랴, 가가 어데 요령이라는 게 있는 놈이가, 지만 죽어나지 뭐
한참 따발따발 속사포처럼 쏘아대던 나정이 흠칫, 숨을 삼킨다
- 윤진아
"... 왜"
성균의 이름을 꺼냈을 때부터 아마 동시에 떠올렸을 이름에, 멈춘 줄 알았던 심장이 찌릿 하고 아프다
아니 사실은 나정의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이 순간을 예감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이름을 듣는 게 두렵다
- .. 안 궁금하나
한참 망설이던 나정이 주어 없이 묻는다
- 가, 어째 지내는가, 와 안 묻노
"... 잘 지내겄제.."
수화기를 든 채 한참, 침묵이 흐른다
나정의 긴 한숨,
윤진은 여전히 수화기를 귀에 댄 채 멀리 창 밖을 바라본다
저 너머 어딘가에 있을 그를,
- ... 그래, 잘 지낸다. 그 자슥 너무너무 잘 지내고 있다
무엇에 성이 났는지 잔뜩 가시돋힌 목소리로 나정이 대답한다
윤진은 눈치채지 않게 참았던 숨을 살며시 내쉰다
"잘 되얐네,"
- ... 가시나 독하다 독해
담담한 윤진의 말에 나정이 결국 또 꼬리표 달 듯 험한 말을 중얼거린다
나정의 혼잣말에 윤진은 그제야 전화기 옆에 놓인 의자에 천천히 걸터앉는다
그리고 다시 창 밖을 바라보며 다짐하듯 중얼거린다
".. 잘 지내믄 좋지 뭐.. 좋은 일이제.."
- ... 좋기는.. 가시나 진짜..
나정의 목소리 끝이 흐려진다
애써 가라앉힌 마음이 함께 흔들린다
수화기 저 너머의 그녀는 또 울고 있을까
차마 눈물을 흘리지도 못했던 자신 대신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던 그날 밤들처럼.
윤진은 문득, 자신이 마지막으로 울었던 것이 언제였나 세어보고
슬프게도 그게 아주 까마득한 기억이라는 걸 깨닫는다
- 니는? 뭐하고 사노? 잘 지내는거 맞나? 혼자 뭐하고 지내는데?
마음을 추스린 듯 나정이 조금 꾸며낸 높은 톤으로 새삼스럽게 윤진의 안부를 묻는다
"나야 뭐 만날 바다 보다가 사람 구경허고, 맛있는 거 먹고, 주변 산책도 허고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그라제"
... 처음 이 방에 왔을 때는 그저 매일 바다만 바라봤다
생과 사의 경계선에 서 있는 것 같은 매일.
겨울의 바다는 금새라도 삼켜질 듯이 쓸쓸했다
하지만,
이내 봄은 왔다.
겨우내 2층 창 밖에서 바람에 흔들리던, 아파트 마당의 앙상한 나무에서
하얀 꽃망울이 밀어올라오고, 결국 순백의 목련이 피는 걸 보면서
윤진은 어째서인지 내내 서 있던 사선에서 한발짝, 한쪽으로, 생의 한가운데로 내딛고 말았다
살아야겠다고.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다시는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없다고 해도
그러나 나와 같이, 그도 살아있기를 바라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봄날의 산뜻한 바람
여름의 뜨거운 공기
가을의 충만한 태양
윤진은 걷고 또 걸었다
집 주변을 산책하는 것에서 조금씩 반경을 넓혀서
트래킹이나 피크닉이라고 불러야할 수준까지 멀리 나가기도 했다
걷지 않을 때는 글을 썼다
살아온 이야기
살아갈 이야기
소중한 것과 괴로운 것
그리고 그에 대해서
그와 있었던 모든 일에 대해서
처음엔 1시간도 걷기 힘들었던 산책의 범위가 넓어지고
떠올리기만 해도 아프던 이름을 자꾸 꺼내 어느덧 익숙해지면서
매일 밤 괴롭히던 악몽과 불면증도
사라지지 않던 가슴의 울렁증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해윤이 소개해준 이곳의 나이 지긋한 의사 선생님은
약도 중요하지만 상담과 스스로 이겨내려는 의지가 중요하다,는데 비중을 두는 편이었고 다행히 윤진과 상담 패턴도 잘 맞는 편이어서,
윤진이 하고 있는 노력들을 격려하고 조언하는 수준에서 약을 처방해주었고 덕분에 약도 조금씩 양을 줄여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힘들었지만,
매우 느리게
윤진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도 그렇길 바라면서.
- 맞나? 하이고, 팔자 조-옿다, 신선 놀음이 따로 없네
"부럽냐?"
- 길 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라 안 부러버할 사람 있는가, 아아 내도 니처럼 살고 싶다, 자유-우!
절규하듯 외치는 나정의 마지막 말에 윤진은 결국 웃고 만다
후훗,하고 숨소리 섞인 웃음을 듣고 나정은 조금 안심한다
- 니, 연애는 좀 하나,
"... 연애?"
- 니 좋다는 남자 없나? 거기 남자들도 눈이 있으믄 니 좋다 할텐데
"... 나정아 우리 나이 많어야, 누가 아줌마 좋다 그르냐"
- ... 와, 아줌마는 연애도 몬하나? 니 그런 편견을 버리라
... 야가 시방 뭐라는 거여...
윤진은 저절로 어리둥절한다
나정의 말이 어디까지 진심이고 어디까지 농담인지 모르겠다
이 말 혹시... 재준이 듣기라도 하면...
"니 농담이 지나치다잉, 재준이 들으믄 엄청 섭섭해할텐디"
- 섭섭은 무슨, 십년 넘어가면 가족이다 그냥 가족. 얼굴만 봐도 지겹다. 나도 이제 좀 설레고 싶다고오! 거기 쓸만한 연하남 없나?
너.. 조금 전까지 나한테 니 남편 자랑 겁나 했거든요..?
그리고 어떤 연하남이 감히 니 남편한테 덤비겄냐..
아마 살벌하게 쏘아보는 눈빛만으로도 사람 하나는 거뜬히 태워죽이고 남을텐데
윤진은 한숨을 쉬며 대답한다
"없어, 그런 사람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응게 언능 정신차려야.
하여간에 니는 드라마를 너무 믿는 게 탈이여, 이번엔 또 뭘 봤길래 연하남 타령이여?"
- ... 없으믄 없는 거지, 니가 와 내 꿈과 환상을 깨는데, 아줌마는 꿈도 못 꾸나.. 안 그래도 아-들이랑만 있어가 매일 늙는구마는
"아-들 데리고 놀러와야, 놀러와서 니도 좀 쉬고 나도 니네 이쁜 아들 구경도 좀 허자"
- 진짜? 진짜제? 내 진짜 간다?
신난 듯 몇번이고 되묻는 나정에 윤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암때나 와야, 재워줄텐게, 근디 니 시즌 시작혔는데 칠봉이 두고 와도 되냐?"
- 지 혼자 잘한다, 아 때문에 어차피 주말부부 신센데 뭐, 니 보러 간다카믄 얼씨구나 하고 보낼걸
과연 그게 얼씨구나,일지 모르겠지만.
떨떠름하게 다녀오라며, 나 두고 가니 좋겠다고 투덜거릴 칠봉의 표정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고 훗,하고 웃는다
- 아-들 다 델고 간데이? 니 딴소리 하지 마라?
"나도 보고 싶은게 훈이랑 다 델고 와, 걱정말고"
흥분해서 언제 가야하나, 표 알아봐야하는데 표가 있을까, 요즘 날씨가 좋으냐 등등
속사포로 질문을 쏟아내는 나정에게 하나하나 반응해주고 있던 윤진이 마지막으로 나직하게 덧붙인다
"나정아, 근데"
- 응?
"... 이번엔 니 혼자 와야, 부탁헌다"
윤진의 말에 수화기 건너편 활기가 뚝, 끊긴다
잠시 침묵하던 나정이 어렵게 묻는다
- ... 내 혼자?
"... 어, 니만 보고 싶응게"
잠깐의 정적 후 짧은 한숨을 내쉰 나정이 짐짓 거드름 피우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 알았다, 서울서 내 혼자 내리가믄 되는거제? 니 혼자 아 셋 델고 다니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아나? 내 내리가믄 확실히 모시라이, 알았나?
"걱정 말고 내려 오랑게, 가시내 쓸데없이 허삐 말만 많어야"
나정의 으름장에 안심한 듯 윤진이 고개를 살짝 젓는다
윤진의 그런 모습이 보이는 것처럼 피식 웃는 소리가 들린다
- 내리 가는 날짜 결정하믄 다시 연락할게, 근데 진짜 거기 괜찮은 남자 없나? 그냥 구경만 해도 되는데
=
"그럼, 그 안건은 차주 화요일까지 검토해서 최종안 보내주시고요,
말씀드렸지만 조직에 충격을 최대한 적게 주는 방향으로 갔으면 좋겠네요"
"... 일단 그렇게 검토는 하겠습니다"
"부탁드려요, 김.대.표.님."
싱긋 웃으면서 하는 마지막 말에 화상 회의를 하고 있던 화면 건너편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대표? 야, 니 이라기가 진짜,"
".. 뭐가 말여, 니 대표 맞잖여, 서울 본사 대표"
"와... 이자슥이 이름 하나 달랑 달아주고 죽을 때까지 부려먹을라고 하네, 니 어데서 그딴 거 배워왔노? 어?"
버럭하는 성균의 말에 호준은 그저 배시시 웃는다
"그라믄 어짜냐, 나가 서울에 없는디, 누군가는 대표해야 하잖어"
"그라니까 왜 제주도에 내리가가 사람을 이래 번거롭게 하노, 니 때문에 이게 뭔 고생이고? 주말마다 이래 꼭 화상회의 해야겠나?"
"니가 바빠서 주중엔 나랑 회의 잡을 시간이 안되잖어"
"그러니까 니가 서울에 와서 일하면 되는거 아이가, 대체 이게 뭔 짓이고"
"... 나야 건강도 그렇고...."
시무룩해지는 호준의 표정에 성균이 멈칫 한다
"... 나가 여그서 이라고 있는 것이 다 니 덕인 것을 나가 어찌 잊겄냐...."
".. 됐다 이 새끼야 일절만 해라,"
점점 더 시무룩해지는 호준의 말을 성균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툭 끊어버린다
"지낼만하냐?"
"여기야 좋지, 공기도 좋고 여유롭고"
"... 니 그 여유가 내가 화장실도 못 가고 1초 단위로 쪼개쓰면서 일하는 덕분인 걸 잊지 마라"
여유로워보이는 호준을 건너다보며 성균이 투덜거린다
호준이 기억을 찾고, 회복을 거쳐서 일상 생활에 복귀한지 10개월 남짓, 회사 업무에 복귀한 건 8개월 정도다
회사에 돌아오자마자 호준은 직원 복지와 근무 환경 개선,을 위해서 조직의 절반을 제주도로 이전하겠다는 계획을 제시했고
지금은 그 준비를 위해서 아예 제주도에 내려가있는 상태였다
덕분에 주말마다 화상회의를 통해서 중요한 의사결정들을 내리고 있는 터라
성균은 몇달째 계속된 주말 출근에 집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해있었다
애가 적기나 하면 모를까.. 셋이나 되다보니... 이게 아무리 대표 월급을 집으로 고대로 송금한다고 해도.. 커버가 될 수준이 아니다
"야, 나도 여그서 열심히 일 허고 있거든? 주말에도 나와서 니랑 지금 회의 허잖냐"
"... 아- 봐야하는 내도 나와서 일하는데 니는 당연히 나와야지, 딸린 식구도 없이 혼자면서"
"....."
혼자,라는 말에 순간 표정이 굳어버리는 호준에 성균이 당황한 듯 입을 다문다
잠깐 시선을 깔았던 호준이 씁쓸하게 웃는다
성균은 아무 말이 없는 호준을 보다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 아직이가"
"... 그렇지 뭐"
서울에서 실무야 성균이 꼼꼼히 챙기고 있다고는 하지만
조직의 절반을 제주도로 옮기겠다는 계획이 사옥만 짓는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어서
직원 주거, 조직 운영, 사옥 설계, 부지 선정 등등을 지휘하고 있는 호준 또한 업무량이 만만치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 몇달째 조금만 여유시간이 생기면, 아니 시간을 쪼개서라도 사람을 찾고 있다는 걸, 성균은 잘 알고 있었다
윤진은 대체 어디로 숨어버린 것인지, 심지어 실종 신고까지 했는데도 찾아지질 않았다
여러번 넌지시 연락했던 윤진의 여수 본가에서는 윤진이 해외로 연수를 떠났다고 알고 계셨고
그렇게 얻은 정보로 출입국 기록까지 조회해봤지만, 윤진이 한국을 떠난 기록은 없었다
마치 증발한 것처럼, 사라져버린 윤진을 호준은 먼저 입에 올리는 일은 없었지만
때로 성균이 이렇게 실수로 먼저 이야기를 꺼내버리면 저렇게 세상을 잃은 표정을 짓곤 했다
괜히 미안해진 성균은 오랜만에 울상이 된다
"미안하다, 괜히"
성균의 말에 시선을 화면으로 돌렸다가 -ㅅ- 표정을 하고 있는 성균을 보고 호준은 쓸쓸히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그런 표정 하지 말어야, 나 진짜 뭔 일 있는 거 같잖어"
... 뭔 일 있지 임마, 차라리 말을 하든가.
속상해진 성균은 말없이 화면 건너의 호준을 뚱하게 바라보기만 한다
잠깐 숨을 고른 호준이 여전히 -ㅅ- 표정인 성균을 보고 배시시 웃는다
"그라지 말고, 언제 아그들 다 델고 놀러와야, 여그 날씨 좋다 요즘"
"... 거 가는 게 어데 놀러가는 거가, 회사로 일하러 가는기제, 내 가믄 니가 내 쉴 시간이나 주겠나"
"하기사, 그것도 그릏다잉?"
흐흐, 하고 웃어버리는 호준을 가만히 보던 성균은 뭔가 말을 하려다, 무슨 다른 생각이 떠올랐는지 그저 침을 꿀꺽 삼킨다
그리고는 퉁명스럽게 웃는 호준에게 핀잔을 준다
"인자 뭐할기고? 주말이다 아이가"
".. 뭐 집에 가야제, 헐 일도 없고"
"만날 천날 집에만 붙들리가 있어가 되겠나? 제주도는 꽃 필 때 안됐나? 거기도 벚꽃 피나?"
성균의 질문에 문득 생각난 듯 호준은 책상 위로 시선을 돌린다
무의식적으로 한 켠에 올려뒀던 워터볼을 만지작, 한다
"... 유채꽃이여, 제주도는"
슬쩍 손에 굴리고 있던 워터볼을 뒤집었다 놓는다
손을 잡고 있는 연인 위로 노란 눈처럼 쏟아지는 꽃잎.
윤진이 떠난 휑한 거실에서 발견한 워터볼.이었다
제가 샀던 기억도, 둘이 함께 제주도를 갔던 기억도 없는 물건.
윤진의 흔적이 사라진 집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기억을 잃었던 동안의 윤진과의 추억.
워터볼을 만지작하며 순식간에 가라앉는 호준을 발견하고 성균이 큼, 하고 헛기침을 한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든다
"불쌍한 새끼"
"어?"
"... 내가 함 내리 가께, 얼굴 좀 보자, 이래 말고 직접 좀 보자, 니가 서울 안 오니까 우짤 수 없지"
"그려 암때나 내려 오기만 하랑게, 나 있는 집 넓다, 미니축구해도 될 정도여"
"우리집 식구 다 델고 간다? 아-들도 다 델고?"
"방 많응게 그딴 씰데없는 걱정은 말고 내려오기나 혀, 제수씨 바람도 좀 쐬라고 허고"
순순히 대답하는 호준을 물끄러미 보다가 성균이 무표정하게 덧붙인다
"... 동준이네랑도 같이 간다?"
"그르든가"
"... 해윤 성님도"
".. 맘대로 혀"
"... 나정이도"
성균의 마지막 말에 호준이 당황한 듯 고개를 갸우뚱한다
"해윤 성님이랑 나정이랑.. 같이 온다고? 괜찮것어?"
".. 안될 건 또 뭐 있나, 하여간 다 같이 가자고 할 거니까 니는 딱 돈 쓸 준비나 하고 기다리라"
허공에 카드를 긋는 시늉을 하자 보고 있던 화면 너머 호준은 낄낄 웃는다
"걱정 말어, 나가 가진 게 인자 돈밖에 없다 안허냐,"
성균과 똑같은 동작으로 허공을 긋는 호준을 보고 성균은 뭔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다, 추진해서 연락 주께, 한번 복작복작하게 놀아보자 오랜만에"
"그려, 기대하고 있으께. 신촌하숙 모임 한번 거하게 해보자."
=
(사실 글을 쓰면서 들었던 건 거미의 날 그만 잊어요, 와 엑소의 12월의 기적, 오지은의 윈드블로즈,였지만 말이야)
===============
12화의 절반. 내내 끌어안고 있다가 길어져서.. 텀이 길어지는 것 같아서 일단 절반만 먼저 올려.. 거의 끝이란 얘기지 으음.
기대하고 읽어준 냔들 고마워, 이 글의 본질보다 더 좋아해줘서 ㅠㅠ 나냔은 늘 으아 이렇게 잘 써야하는데 라고 감격해 ㅠㅠ
그 기대에 모두 부응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생각해 늘... 생각만;;
(숨김글은, 좀 쓸데없는 이야기)
+
- 잘 지내나?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를 알아차리고 해윤은 반사적으로 수화기를 귀에서 떼고 바라본다
잠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수화기를 바라보던 해윤은 다시 전화기를 귀에 댄다
"어어, 어짠일이고"
나정이 먼저 전화를 걸어오다니 분명 엄청난 일일텐데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 것이 불안하다
해윤은 언제든지 전화를 끊어버릴 준비를 하고 천천히 대답한다
- 얼른 대라
"어?"
다짜고짜 윽박지르는 말에 저절로 고개를 갸우뚱한다
- 윤진이 전화번호, 알제? 얼른 불러라, 빨리!
해윤은 손에 수화기를 든 채로 그대로 굳어버린다
대체 나정이 이걸 왜 저에게 묻는 건지 모르겠다
강력하게 확신하고 있는 목소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해윤의 목을 턱,하고 막히게 한다
"... 내가 그걸 우예 아노..."
힘없이 항변하자 수화기 너머에서 쯧,하고 어이없다는 듯 혀차는 소리가 들린다
- 내가 아- 업고 가가 드러누워야 말할기가? 어데가 좋노? 병원? 집? 새언니가 차암 좋아하겠다, 그자?
"... 쩡아...."
니 진짜 내한테 와이라노...
울먹하는 목소리가 저절로 나와버린다
저도, 나정도 결혼한 후 지난 몇년간 잠잠하다 했는데 오늘 나정은 예전처럼 집요하다
- 얼른 말해라이, 오빠야가 알고 있는 거 다 안다. 거짓말 할 생각하지 말고
".... 우예 알았노"
반항하는게 무의미하다
해윤은 한숨 쉬면서 묻는다
- 그동안 몰랐던 내가 빙신이다, 가가 어데를 가도 오빠야한테는 약 때문에라도 말을 하고 갔을긴데 우예 지금까지 그 생각을 몬했는가
너무 정확한 추리에 그날 혹시 나정이 도청이라도 했던 건가 싶어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 얼른 말해라, 확 오빠 집 쳐들어가기 전에
"... 쩡아"
- 아니믄 칠봉이한테 확 꼰지르는 수가 있다, 가 아직 앙심 다 안 푼거 알제?
하아...
"니 그거 알아가 뭐할긴데"
- 당연히 잡아 와야제, 오빠 니는 호준이 저래 밖으로 도는거 보고도 입 다물 생각이 나드나, 윤진이도 똑같을 거 아이가
"... 윤진이 잘 있다, 니 걱정 안해도 된다"
- 그건 내가 판단한다 안하나!! 얼른 번호나 불러라!
괜히 말로 달래보려고 했다가 버럭 하는 고함소리만 들었다
해윤은 저도 모르게 수화기를 떼고 얼굴을 찡그린다
얼마전 통화했던 윤진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벌써 윤진이 서울을 떠난지도 1년이 지났다
소개해준 선배로부터 들었던 경과도 괜찮았고, 그곳에서의 생활에도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으니
지금쯤이면 윤진도 다시 사람을 만나고 세상에 돌아올 준비가 된 건 아닐까
잠깐 생각한 해윤은 진지하게 수화기 너머의 나정에게 말한다
"알았다, 말해줄게 근데에"
- 근데 뭐
"윤진이도 다 사정이 있고 이유가 있어서 내려간기다, 억지로 끌고 오고, 혼내고 이랄거믄 내 니한테 말 못해준다"
- .....
"... 니가 준이 델고 와서 드러누워도 말 안해줄기다,"
해윤의 협박에 멈칫한 나정은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 알았다, 그냥 연락만 할게,
"... 진짜제"
- 걱정된다 안하나, 흔적도 몬 찾고 일년이다. 오빠야 니도 진짜 독하다 우리 이래 다 발 동동 구르는 거 알믄서 숨기고 싶드나
성나정의 오지랖은 삼십대가 되고 아이가 생긴다고 줄어드는게 아니었으니
해윤에게 짜증을 내다가 서서히 울먹이는 목소리에 마음이 흔들린다
해윤은 그냥 말해버릴까 하다가, 떠나기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잔뜩 메마른 윤진의 얼굴을 떠올리고 간신히 침착하게 다시 확인한다
"그래서 우얀다고?"
- ... 알았다, 진짜 내가 딱 윤진이 안부만 물어볼게, 딱 목소리만 들으면 된다
"니 아 한테 절대 부담주거나 그라믄 안된다 알겠제?"
- 알았다, 알았다고오. 내가 무슨 어린애가? 몇번을 확인하노, 얼른 전화번호나 불어라
퉁퉁거리면서 재촉하는 목소리에 해윤은 천천히 책상 아래 집어넣어둔 수첩을 꺼낸다
"있어봐라, 여 어디 적어놨는데.... 에...."
- .... 얼른 찾아라! 준이 들어올 시간 됐다,
".. 잠깐만.. 에..."
- 오빠! 니 진짜 이랄래!
".. 있어보라고! 쫌! 가시나 성격 몬돼가, 니 칠봉이 한테 감사합니다,하고 살라고! 가 아니면 누가 니 거둬가노! 에에 아! 여깄네,"
- 얼른 불러라 얼른
"있어봐라, 조윤진, 에.. 064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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