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y before yesterday I saw a rabbit, and yesterday a deer, and today, you."
=
"야, 저기"
"뭐"
"..저기.."
"어? 우..와..."
"그치?"
명백하게 저를 향하고 있는 소근거림이 전혀 들리지 않는 것처럼
한때 소리 쪽을 향했던 것이 마치 목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던 양 피곤한 듯 천천히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짙은 선글라스 뒤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린다
조금 더 이어졌던 수군거림은 라헬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동안 서서히 잦아들고
이내 다른 관심사로 옮겨간 듯, 꺄르르 하는 크고 높은 웃음소리에 흩어진다
라헬은 목소리들이 완전히 멀어진 후에야 못마땅한 한숨을 탁,하고 내뱉는다
효신을 만나기로 한 곳에 나와 선지 겨우 몇 분 지났을 뿐인데 벌써 몇번째인지 모르겠다
만날 약속 장소만 정했을 뿐 어디에서 어떻게 오는지는 듣지 못한 탓에
익숙하지 않은 버스 엔진 소리나 지하철 계단을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만 들려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무심하게 외면하기를 반복해야했다
마치,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일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던 누군가처럼
기다리는 몇 분 동안 섣부른 기대로 인한 실망은 반복해서 작게 긁힌 자국을 남긴다
그러면서도 또다른 발자국 소리에 기대감이라는 보드라운 거품이 몽글몽글 솟아나 순식간에 그 흔적들을 덮어버린다
언제나 자신을 위해 준비된 시간, 준비된 장소에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주인공이었던 라헬은
타인을 기다리게 할지언정 자신이 기다리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아니 의도적으로 기다림을 피해왔다.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라헬에게 있어 기다림은 주도권을 빼앗기는 행위에 불과했다
일방적으로 상대에 미래의 결정권을 넘긴 채 무기력하게 처분을 기다리는 일.
그리고 그 결과가 유의미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아니 과정과 그로 인한 결과 모두를 혼자 견디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그런 고통은 이제 됐다고,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처음 결심했던 것이 언제였더라.
다섯살도 채 되지 않았던 어린 시절, 혼자 악몽을 꾸고 일어나서 아무리 울어도 오지 않았던 엄마를 기다리면서였을까
저를 대신 키우다시피 했던 유모가 어느날 갑자기 일을 그만두고 사라졌을 때 즈음이었을까
결정적인 순간은 결혼은 비즈니스지, 라는 말을 쿨하게 받아들이는 척하면서도
내내 그래도 언젠가 나를 찾아오겠지 라는 가느다란 희망의 끈을 놓지 못했던 아빠의 부고를 들었을 때였을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 그 저주받은 기다림,이라는 희망이 어떻게 사람을 서서히 고통에 마비시키는지 깨달았으면서도
혹시나, 하고 또다시 기다리고 말았던 자신의 미련함이 제일 싫었다
기다리는 법 밖에 배우지 못해서, 놓아주지도 솔직할 수도 없어서
혼자 그 고통의 시간을 견뎌내다가 결국 서서히 뒤틀려가는 자신이 싫었다
고통스러운 일을 피하는 건 인간의 자기 보호 본능 같은 것 아니던가
더이상 기다리는 일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그동안 알고 있던 기다림에는, 기대감이라던가 두근거림 같은
그러니까 지금 제 머리칼 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부드러운 바람같은 감각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세계의 대부분이 무료했던 라헬은 몰랐던 새로운 감각에 새삼스레 놀란다
그제야 라헬은 언제나 늦는 법이 없던 효신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진다
기다리는 그 시간 동안 그도 역시 지금 자신과 같은 기분이었을까
기다림은 그에게 기대였을까 고통이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비로소 효신이 처음으로 늦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지하철 입구로부터 들려오는 계단 오르는 소리에 라헬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다
또각거리는 구둣소리인 것을 이미 귀는 확인했으니 내내 운동화나 컨버스를 신고 다니던 효신일리가 없는데도
차마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끝까지 그 발자국 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입구를 바라본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수수한 차림의 여자다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간단한 원피스에 옅은 화장을 하고 어색하게 메고 있는 가방을 소중히 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듯 낯선 표정으로 지하철에서 빠져나오다가 저를 향하고 있는 라헬의 시선에 멈칫한다
효신이 아닌 것을 확인한 라헬은 무심하게 시선을 거둔다
오히려 여자의 시선이 끈질기게 라헬에 따라붙는다
세상의 무엇도 하찮다는 듯이 홀로 거리에 도도하게 서있는 라헬은 그녀가 바랬던 이상형의 모습에 가깝다
아무렇게나 골라입은 것 같은 군더더기 하나 없는 재단의 면 원피스와 스카이 블루의 트위드 자켓,
곧게 뻗은 다리 끝에는 아마도 드라마에서나 등장했을 것 같은 킬힐이 자기 주인을 만난 것처럼 얌전히 자리하고 있다
단순한 디자인이지만 분명 섬세하게 공들여 제작되었을 것 같은 기품이 흐른다
여자는 저 옷과 가방, 구두는 대체 어디 것일지, 그리고 가격이 얼마쯤 할지 궁금해한다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라헬은 어깨에 메고 있던 조그만 클러치를 내려 손에 쥐면서
내내 눈동자의 행방을 감추고 있던 선글라스를 깊게 걷어올린다
앙증맞은 입술에 자리한 립색깔이 무엇일까 궁금해하던 여자는 라헬의 동작에
그제야 자신이 조금 노골적으로 바라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멈칫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그 시선이 사라지고 나서야 라헬은 습관적으로 다시 흘러내지도 않은 선글라스를 고쳐쓴다
어릴 때부터 주목을 받지 못하면 자신의 존재가치가 부정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등장하는 공식석상에서의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부러워하는 시선에 익숙한 라헬이지만,
오늘 오전에 몇번이나 받곤했던 불특정다수의 힐끔거림은 낯설고 불편하다
길에서 만나자고 했던 자신의 제안이 아무래도 잘못 되었단 생각이 든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가끔 지나가는 차와 그보다도 더 가끔 등장하는 사람들 뿐이지만
그래도 역시 혼자 길에 서있는 이 상황이 익숙하지 않다
라헬의 집 앞에서 만나자는 효신에게 몇번이나 그냥 본인이 바로 가겠다고 했지만
효신은 미리 어딜 갈지 알려주면 재미가 없다며 굳이 직접 데리러 오겠다고 우겼다
겨우 타협했던 것이 라헬의 집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 역 앞이었다
나름대로 대중교통을 타고 다닐 효신을 위한 배려였지만 라헬은 벌써부터 조금 후회하고 있었다
한번도 걸어서 나온 일이 없어서 몰랐는데 집에서 큰 길까지 나서는 골목은 상당한 오르막이었다
덕분에 힐을 신고 등산이나 다름없는 오르막을 꽤 오래 걸어나와야만 했다
그 몇 분을 걷고 또 기다리는 동안 벌써부터 발이 아파오려고 한다
힐을 신고서는 차를 타거나 앉아있는 일이 대부분으로 이렇게 오래 걷거나 서있어 본 적은 없어서
킬힐이라는 구두의 존재가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고 실용적으로는 매우 취약하다는 사실을 몰랐다
설마 오늘 하루종일 걸어다녀야하는 건 아니겠지.하는 불길한 예감에 저도 모르게 신고 있는 힐을 내려다본다
혹시나 버스나 지하철을 타자고 하면 절대로 택시를 타거나 제 차를 가지고 가자고 말해야겠다. 라고 생각한다
초조하게 라헬은 시간을 확인한다
아직 약속시간에서 5분 정도 지났을 뿐이다
라헬은 한숨을 쉬며 클러치 안에 휴대폰을 도로 넣고 무심하게 팔짱을 낀다
조금 전까지는 간간이 있던 버스와 인적이 순간적으로 끊기자 주변이 조용해진다
정적이 흐르는 거리는 늘 다니던 곳인데도 낯설다
익숙해서 낯선 거리의 모습에 라헬은 순간적으로 불안해진다
다시 한번 시간을 확인한다
6분.
잊은 걸까.
기다림에 필연적으로 수반되고 했던 불안감이란 고통이 새삼스레 라헬을 덮친다
희박한 불안감에 실존인 것처럼 사로잡힌다
아냐..
라헬은 후다닥 그 푸드덕거리는 불길함을 털어내버린다
거리 끝에서 부웅,하는 낮은 엔진소리가 들린다
라헬은 힐끔 고개를 돌리다가 버스나 택시 대신 날렵한 은회색 세단인 것을 확인하고 무덤덤히 반대쪽을 바라본다
7분.
아무래도 효신이 많이 늦을 것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어보인다
혹시나 오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들 실망하지 않을 마음의 준비를 하고 굳은 표정으로 휴대폰에서 효신의 번호를 검색한다
그런 라헬을 지나칠 것처럼 달려온 세단은 미끄러지듯이 라헬의 앞에 멈춰선다
제 앞에 선 차를 인지하고 낯선 차량에 움찔 한 발 뒤로 물러선다
귀찮게 되었다는 듯이 반사적으로 몇백미터쯤 떨어진 경찰서를 확인한다
대낮부터 이런 걸 걱정해야하다니 서울 치안도 엉망이구나,하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겉으로는 무덤덤하게 선글라스를 고쳐쓰면서 제 옆의 차 같은 건 안 보인다는 듯 쥐고있던 휴대폰으로 시선을 떨군다
외면하고 선 라헬 쪽을 향한 멈춰선 차의 조수석 차창이 스륵 내려간다
"유라헬"
익숙한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부른다
라헬은 그제야 차 안을 확인한다
돌아본 라헬의 얼굴이 잔뜩 굳어있었거나 당황스러움을 들킨 것이 틀림없다
그 얼굴을 마주한 효신은 어딘가 겁먹은 듯 불안한 표정을 확인하고 걱정스러워진다
"무슨 일 있었어?"
".. 아녜요, 아무것도"
조그만 요동도 놓치지 않던 효신이라면 인적없는 거리에서 백주대낮에 납치라도 당하는 건가, 하고
말도 안되는 상상에 겁먹었던 걸 들키는 건 눈깜짝할 새, 그대로 놀림당하고 말게다
효신이 뭔가 더 묻기 전에 재빠르게 조수석에 올라타 태연하게 안전벨트를 잡아당긴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운, 재게 움직이는 손놀림과
미묘하게 내내 피하는 듯 별 것도 없는 안전벨트에만 고정된 시선을
미세하게 탐색하던 효신은 뭔가 묻고 싶은 표정을 지우면서 그때껏 열려있던 조수석 창을 올린다
빠르게 움직인 손놀림에 비해 너무 느린 속도로 겨우 꼼지락거리며 벨트를 다 채운 라헬은 새침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본다
출발하려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리면서 확인하듯 다시 라헬을 훑어본 효신은 그제야 알아차린 듯 살짝 미간을 찌푸린다
"그렇게.. 입고 괜찮겠어?"
"... 뭐가요"
라헬의 미간도 저절로 흐려진다
나들이.라고 했다 분명
어디로 갈 예정이냐는 질문에 간단한 나들이,정도일테니 편하게 입고 나오라는 대답만 들었을 뿐이다
날마다 단벌 점퍼 하나로 버티고 있는 사람에게 TPO 같은 걸 설명해봤자 입만 아플 것 같아서
그 '편하게'라는 단어가 얼마나 많은 의미를 함축할 수 있는지 해석하기를 포기했다
덕분에 어젯밤, 늦은 시간에 퇴근해서 그 거대한 옷장을 거의 뒤집다시피 해야했다
'편하게'라는 말 때문에 일단 드레시한 옷은 제껴놓고 한두번도 입지 않은 반바지에서부터
샘플 의상으로 가져왔던 하늘거리는 원피스까지 이런 게 옷장에 있었나? 싶은 옷을 몽땅 입어본 후에야
결국 너무 신경썼다는 인상은 주지 않으면서 구김이 덜 가는 텐셀 섞인 면 원피스에 캐주얼한 느낌의 트위드 자켓 정도로 타협을 봤다
옷에 어울리는 간단한 스트랩의 힐과 클러치까지 실수한 부분은 없는데, 저 눈은 연신 곤란한 듯 제 옷차림을 훑는다
고민했던 어제의 스스로가 초라해지려고 한다
하지만 초라해진다.는 유라헬의 사전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
날카롭게 심장을 긁고 지나간 낯선 감정을 숨기려는 목소리에 날이 선다
"뭐가 마음에 안드는데요"
책망에 가까운 질문에 그게 아니라는 듯 효신은 고개를 절레, 젓는다
그리고 기어스틱을 쥐고 있던 손가락 끝으로 아래 쪽으로 가리킨다
"걸을 수 있겠어?"
걷는다고...?
갑자기 아까 잠시 스쳐지나갔던 불길한 예감이 스물 되돌아온다
설마 걷게 되는 거였던 건가. 그것도 높은 신이 걱정될만큼 많이?
조금 전 집에서 걸어온 몇분과 서 있던 몇 분만으로도 충분히 발이 피곤해졌는데 더이상 어딜 더 걸어야한다는 걸까
순간 어두워진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라헬을 보고 곤란한 듯 조금 전부터 심각하게 모아져있던 미간을 긁적한다
"... 어렵겠지"
"대체 어딜 가는데요, 어딜 가길래 걸어야한단 거예요"
처음부터 걷게 될 거라고 말해줬으면 - 물론 운동화 외의 낮은 신발 같은 건 어디 있는지 기억도 안나지만 - 알아서 신고 왔을 걸
애초에 제대로 정보를 주지 않은 건 자신이면서 이제와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골이 난다
무겁게 가라앉는 라헬의 어두운 기운을 느낀 효신은 슬쩍 흘러내린 머리칼을 넘겨주고 다시 핸들을 움직인다
"어디 가느냐니까요"
"일단, 어디 좀 들러야겠다"
뚱하게 골난 목소리에 반응하는 대신 앞만 보고 운전에 집중하던 효신은 한참 계속된 침묵의 주행 끝에 차를 세운다
언제나 주말이면 사람들로 가득 차서 마치 사람의 머리가 파도처럼 일렁이는 것 같던 번화가,
이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에서부터 온 건가 의아해하며 멈추는 대신 스쳐지나가기만 했던 곳이다
아직은 사람이 북적이기 전 큰 길의 뒷골목에 아무렇게나 차를 세운 효신은
망설임없이 차에서 내리더니 반대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문을 연다
갑작스럽게 열린 문에 눈을 깜빡이며 올려다보는 라헬에게 싱긋 웃으며 우아하게 한 손을 내민다
"잠깐이면 돼"
해맑게 웃는 얼굴을 보자 오히려 마음이 더 불안해진다
설마 해가 훤하게 떠있는 낮에 무슨 일이 생기거나, 효신이 저에게 나쁜 일을 할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통제된 일상에 익숙해진 라헬에게 예측할 수 없음.이라는 지금의 상황은 충분히 당혹스럽다
라헬이 손을 잡지 않고 무표정하게 빤히 얼굴을 쳐다보기만 하자
몇초간 손을 내민 채 굳어버린 자세를 취하게 된 효신은 그제야 의아한 듯 눈이 살풋 가늘어진다
효신의 표정이 변하는 걸 고스란히 확인하면서도 여전히 라헬은 제 손 내밀기를 망설인다
움직이려다 멈칫 머뭇거린 손가락이 까닥,하고 제자리로 돌아가고 만다
'하아'
대치하는 양 기다리는가 싶던 효신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덥석 라헬의 손을 잡는다
휙,하고 간단하게 잡아당기는 효신의 손에 이끌려 얼결에 차에서 내린다
라헬이 차에서 완전히 내리기를 기다렸다가 효신은 차문을 닫고 여전히 손을 쥔 채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오히려 아무렇게나 주차되어 있는 차가 신경쓰이는 건 라헬이다
아무리 평범해보이는 차라고는 해도 저렇게 마구 세워둬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주차 구역도 아닌 것 같은데 혹시 단속에 끌려가거나 차에 흠집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이러나,하는 걱정이
자꾸만 제 몸의 한쪽 끝으로 몰리려고 하는 신경을 분산시키기위해 다른 핑계를 찾던 라헬의 심기를 건드린다
"저렇게 둬도 괜찮아요?"
"응?"
"차,"
"아아, 빌린 거니까 괜찮아"
빌린 차라면 더 조심해야하는 것 아닌가?하는 미묘한 위화감이 들지만
효신은 그저 태연하게 대답하고는 다시 급한 일이라도 있는 듯 걸음을 재촉한다
여전히 손을 내준 채로 그 이상한 기분이 무엇인지 깨닫기도 전에 제법 세게 잡아끄는 손에 탈탈탈 이끌려
대로 한 편에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이 커다란 SPA 매장 앞에 도착한다
"잠깐만요"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서려는 효신의 팔을 그제야 급하게 끌어당긴다
"응?"
"지금 뭐하는 거예요?"
갑작스런 제지를 예상치 못한 듯 돌아보는 효신에게 라헬은 날카롭게 톡,하고 쏘아붙인다
사실은 아까부터 라헬의 마음에 맴돌았던 뒤늦은 추궁에 효신은 의미를 찾는 듯 잠깐 멍해진다
살짝 차가워지는가 싶던 얼굴에 이내 편안한 미소가 돌아온다
"아무래도 그 차림으로 다니기 힘들지 않겠어?"
"그래서요?"
"썩 마음에 들지 모르겠지만, 일단 여기서 편한 걸로 갈아입고 가자"
"..."
그제서야 설명하는 효신을 무표정한 얼굴로 빤히 바라보던 라헬은
효신을 한번, 쥐여있는 제 손목을 한번, 그리고 막 들어가려고 했던 SPA 매장을 한번, 차례로 돌아본다
마지막으로 못마땅하게 유리문에 박힌 SPA 브랜드 로고를 노려보며 내키지 않는 듯 낮게 중얼거린다
"이걸 지금 나보고 입으라고요?"
"아.. 좀 그런가?"
효신은 멋쩍게 반대쪽 손으로 뒷머리를 긁적한다
"오늘은 내가 사는 거니까 아무래도 비싼 건 힘들어, 이해해줘, 일단 오늘은 입고 나중에 버리든가"
이 사람이 진짜!
효신의 말을 들은 라헬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진다
대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길래 저렇게 쉽게 '버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건지.
생각하면 화가 났다가 상처가 남는다
진실에서 몇 광년이나 멀리 떨어진 짐작에 불편해진 심기를 숨길 수가 없다
아니 애초에 사실이 아닌 것을 그저 좋은 게 좋은 거지,하고 받아줄만큼 상냥한 성미도 못 된다
라헬은 일부러 더 과장되게 고개를 꺾으면서 효신을 노려본다
"영화, 만드는 거, 누가 쓸데없는 일.이라고 하면 기분 나쁘죠?"
"응?"
갑작스런 질문에 효신은 의아한 듯 눈을 깜빡인다
"근데 영화만 그런 거 아니예요. 옷도 다 정성과 영혼을 담아서 만들어요
비싼 브랜드는 더 정성을 쏟고 가격이 낮으니까 대강 만들고 그런 거 아니라구요."
"..."
"일단 입고 버리라니, 그거 저 안에 있는 옷, 디자인하고 만든 사람들 다 모욕하는 말이예요
영화 같은 예술만 그렇게 공들이고 소중히 다뤄야하는 거 아니라구요"
라헬의 책망을 듣고 있던 효신의 표정이 복잡해진다
여전히 머금은 여유로운 미소는 마치 박제된 것처럼 옅게 흔들린다
가만히 라헬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짧게 경이와 죄책감, 당황이 차례로 스쳐지나간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동요는 다만 효신과 라헬 사이의 공기를 무겁게 한다
제가 너무 일방적으로 쏟아낸 건가 싶어서 라헬은 입을 다문다
긴 침묵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찬찬히 저를 또는 제 너머의 무엇인가를 끊임없는 경이로 탐색하고 있는 효신의 시선에
라헬은 어쩔 수 없이 조금 전 제가 스스로 드러내고 만 진심의 순간을 되돌린다
무엇에도 관심이 없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것이 내 것인양,
무료한 여왕처럼 손짓, 고개짓 한번으로 훌쩍 누군가에게는 평생 넘을 수 없을 세계의 벽을 뛰어넘는 라헬을 두고
모두가 유라헬은 제멋대로 인생을 살고 있다고 말해도 굳이 자신도 소중한 것이 있다는 걸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옷을 그토록 좋아하고 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
그런 걸 말하는 건 어딘가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아니 어떤 종류의 진심도, 드러내지 않았다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
그랬는데,
왜 어울리지 않게 격렬하게 효신의 말에 항변하고 말았는지, 갑작스러운 그 순간이 부끄러워진다
"미안"
"..."
"함부로 말하려던 건 아니야. 부담갖지 말란 의미였는데, 잘못 말했네 미안"
생각을 고르는 듯 한참 말이 없던 효신이 마침내 정적을 깬다
채 시간을 헤아릴 수 없이 긴 침묵에 서서히 질식해가던 불안한 소녀는 사라지고
고고한 여왕은 세심하게 고른 사과의 말을 마치 당연하다는 듯 도도한 고개짓 한번으로 받아들인다
고개를 꼿꼿이 세운 라헬을 확인하고 효신은 싱긋 웃는다
"옷, 좋아하는구나"
라헬의 뺨이 아주 약간 붉어진다
진심을 정확한 문장으로 타인의 입을 통해 확인받으면 누구라도 그렇지 않을까, 하고 스스로를 애써 납득시킨다
예전엔 이렇게 눈치 없지 않았던 것 같은데, 굳이 사람을 부끄럽게 해야하는 걸까 하고 못마땅하게 입술을 꾹 다물고 힐끔 효신을 노려본다
마주한 효신에게선 여느 때의 장난기를 찾아볼 수가 없다
차라리 감탄하고 있다고 하는 편이 옳을, 진지하고 놀라운 표정이다
오히려 그 얼굴을 확인하자 기껏 가라앉으려던 홍조가 더 붉어지고 만다
".. 그럼 제가 싫어하는 걸 억지로 할 사람으로 보였어요?"
발그레해진 뺨과 달리 대꾸하는 목소리는 퉁명스럽기 그지없다
불안하게 방황하는 시선은 다음 말을 듣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효신은 대답 대신 가만히 고개를 흔든다
".. 부러워서."
어쩔 수 없이 새어나온 듯 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언뜻 한숨같은 쓸쓸한 바람이 느껴진다
".. 뭐가요,"
"..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거, 부럽다 유라헬"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말을 꺼내려다 쓰게 웃는 얼굴에 멈칫 한다
언제나 단정하고 상냥했던 효신은 모두의 기대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아니 사실 효신만은 아니었다,
그런 짐은 경중의 차이가 있을 뿐 제국고 모든 아이들의 어깨에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천형처럼 주어졌다
그러나 효신이 특별했던 건 그 기대가 다만 보통의 제국고 아이들처럼 가족이나 사업 단위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짐을 짊어지고 있는 모든 아이들을 포함한 학교 전체의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일게다
마치 효신은, 그때, 어떤 기준점과 같았다
상속자가 마땅히 짊어져야하는 짐에 마치 아무런 무게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가볍게 해치워버려, 모두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완벽한 허상.
효신은 언제나, 한 발 물러서서 한계단 위에서, 웃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어른.처럼. 어른.인양.
효신이 수능에서 백지를 제출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도, 기대를 걸었던 각자는 그 이유를 추측하고 스스로 납득시켰다
완벽한 기준점은, 주어졌던 길에서 완전히 이탈하면서 어떤 의미에서 신화,로 남았다
그런 추측과 각자의 대답에 효신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언제나와 같은 미소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재수생이 이러고 있어도 되느냐,는 가시돋친 핀잔에도
효신은 오히려 여유롭게 웃으며 자신은 언제든 영화를 할 수 있다고 대답했더랬다
허술한 십대 소녀의 공격 따위에는, 아니 허울좋은 세상의 호기심 따위야
제 손바닥 안에 놓아둔 것처럼 효신은 늘 매끄럽고 능숙했다
적어도 라헬에게 효신은, 지금까지 내내, 그래왔다
저런, 쓸쓸한 얼굴 같은 건, 어울리지 않는다
그게 유라헬이 부럽기 때문이라면 더더욱이나, 그럴리가 없다
저도 모르게 한 발 다가선다
도망칠 듯 멀찍이 선 채 였던 둘 사이가 한 발 가까워진다
라헬의 큰 눈이 씁쓸하게 웃는 표정 건너를 들여다본다
채 그 흔적의 끝을 잡아채기 전, 효신이 멈칫 하고 한 발 물러선다
조금 전과 같은 거리로 돌아간 것 뿐인데, 갑작스레 느껴지는 거리감에
먼저 움직인 라헬도 반사적으로 물러선 효신도 그 자리에 굳어버린다
".. 선배"
느슨히 라헬의 손목을 쥐고 있던 손에 순간 힘이 들어간다
생각보다 더 다정한 제 목소리에 당황해 다음 말을 잇지 못한 라헬은 강한 손아귀 힘에 놀라 내려다본다
간절하게 꼭 쥐고 있던 손은 이내 서서히 나른해진다
"갈까?"
차분한 목소리는 어느새 평소와 같다
다시 올려다보는 라헬에게 싱긋하고 웃어주는 표정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다
조금 전 쓸쓸했던 기운 같은 건,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지금은 태연하고 여유로운, 이효신.
유라헬이 알고 있었고, 알고 있는 이효신.
대답없이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는 라헬에게 고개를 갸우뚱 대답을 구하다 훗,하고 웃는다
눈을 크게 깜빡, 하고는 그대로 손을 이끌어 다시 매장 안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퍼뜩 정신을 차린 라헬이 다시 세게 손목을 잡아당겨 저항한다
".. 아무래도 그런 높은 구두에 짧은 치마로는 힘들.."
"그러니까, 나는 여기 옷 안 입어요"
다시 설명을 시작하려고 하는 효신을 향해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보인다
이 사람, 아직도 저가 무엇 때문에 들어가려하지 않는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응?"
이해되지 않은 아리송해진 표정으로 내려다본다
라헬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 흔들고는 검지 손가락 끝으로 길 건너편을 가리킨다
지금 서 있는 매장만큼이나 큰 또 다른 SPA 매장이 일부러 대칭으로 설계한 것처럼 길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라 멍하니 있던 효신은 건너편 매장의 브랜드 명을 확인하고서야 납득한 듯 피식,하고 황당하게 웃는다
라헬은 퉁명스럽게 그제야 효신이 알아차린 사실을 확인해준다
"내가 설마 경쟁사 옷을 입을 리가 없잖아요. 그것도 우리 매장이 버젓이 건너편에 있는데"
지나친 오기라고 하겠지만, 그래도 싫다 1원이라도 경쟁사의 매출을 올려주는 일 따위.
게다가 효신은 모르겠지만 지금 건너편에 있는 RS 인터내셔널의 SPA 매장, RS Blue 는
라헬이 유학에서 돌아와 처음으로 런칭에 관여한 브랜드였다
플래그십인 지금 저 매장의 인테리어부터 현재 판매되고 있는 주요 라인업의 디자인까지
라헬은 눈을 감으면 줄줄이 프리젠테이션 슬라이드를 넘기듯이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런 곳을 두고 내가 왜?
뾰롱통해진 얼굴을 보고 효신은 애써 웃음을 참는다
미묘하게 경련하고 있는 입꼬리가 의미하는 바를 알아차렸지만, 라헬은 모르는 척 RS Blue 매장만을 바라본다
잠시 입꼬리를 파르르 흔들리게 한 웃음을 참아낸 효신은 슬쩍 라헬의 손목을 놓아준다
그리고 자유로워진 손을 느끼고서야 돌아보는 라헬을 향해 우아하게 잠시 비어있던 손을 내민다
"그럼, 갈까?"
라헬은 내민 손을 잠시 바라보다 새삼스럽게 턱을 치켜세우고 가볍게 손을 얹는다
살며시 맞잡는 손에 라헬의 손가락 끝이 멈칫 흔들린다
동시에 그 흔들림을 알아차린 라헬은 모르는 척 딴청하고, 효신은 또다시 가만히 웃음을 삼킨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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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 한번 시키기 엄청 힘드네.... 창작방 글들을 읽다보면 좌절하여 비루한 글이 더 안써지는 악순환에 접어들고 말았...;;
원래 5편으로 구상했던 이야기의 절반일 뿐이지만 이대로라면 5편을 영원히 못 올릴 것 같은 불길한 느낌에 반쪽이라도 잘라서 올려봐..
그러면 나머지 반쪽은 더 빨리 쓰지 않을까 하는 근거없는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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