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olita, light of my life, fire of my loins. My sins, my soul.
Lo-lee-ta : the tip of the tongue taking a trip of three steps down the palate to tap, at three, on the teeth.
Lo. Lee. Ta."
=
삑, 삑, 삑, 삑, 삑
삐리릭.
전자음과 함께 현관문이 열리고 반짝 등이 켜진다
또렷한 자세로 걸어들어와 하루종일 발을 괴롭혔던 높은 굽의 구두를 벗은 뒤
무표정하게 현관 앞 서랍에 넣어둔 솔을 집어 들어 먼지를 털어내고
구두장을 열어 단 한 자리 비어있는 칸에 가지런히 올려둔다
현관에 올라서서 보지 않고 전등 스위치를 누른다
바르르 떨리는 듯 몇번인가 희미하게 깜빡이며 밝아진 등에 거의 가구가 없는 미니멀의 극치인 거실이 모습을 드러낸다
주인의 성격을 고스란히 반영한 듯 온통 블랙앤화이트, 건조한 모노톤으로 가득하다
어깨에 달랑거리며 매달려 있던 가방을 소파에 올려두고 조금 지친 듯 방에 들어간다
금새라도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는 산소가 부족한 표정으로 옷장 문을 열고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비어있는 아래 칸에 걸어둔다
일주일에 한 번 들리는 세탁부가 한꺼번에 가져가 세탁을 해서 다시 가져다놓을게다
집에서 입는 덜 불편한 원피스로 옷을 갈아입고 침실에서 욕실로 통하는 통로에 위치한
여느 집의 작은 방만한 파우더룸에 들어간다
낮에 외부 회의가 있던 탓에 평소보다 약간 더 힘을 줬던 눈화장부터 꼼꼼하게 두 번 클렌징을 하고
피로한 듯 천천히 목을 한바퀴 돌리면서 욕실로 들어간다
간단히 샤워를 마치자 겨우 긴장했던 몸이 느슨해지는 것 같다
젖은 머리를 틀어올리고 가운을 여민 후 다시 파우더룸 화장대 앞에 앉는다
늘어선 화장품을 순서대로 바르다 멈칫 얼굴을 매만지던 손끝에 걸린 작은 돌기에 멈춘다
거울을 유심히 들여다보자 아직 채 붉어지지 않은 뾰루지가 솟아오를 채비를 하고 있다
반듯해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다
피부과 예약이 언제더라.
내일 아침에 당장 들러야겠다 생각한다
어지간해서 트러블은 생기지 않는, 좋은 피부는 타고 났다고 부러움을 샀는데 어째서 뜬금없이 뾰루지 같은 게 생긴 건지 모르겠다
엄격한 사이클이 무너질만한 원인이 있나 잠잠히 되짚어보다가 조금 전까지 신경 한 쪽을 계속 긁고 있던 말에 닿는다
'미친 놈이지'
애써 외면하고 있던 말이 또다시 떠오르고 만다
이번엔 제대로 인상이 구겨진다
'나도 직접 보기 전엔 농담인 줄 알았다니까'
저도 모르게 크림을 바르고 있던 손에 쑥,하고 힘이 들어간다
주인의 심경과 상관없이 길이 잘 든 익숙한 손끝은 피부 위를 부드럽게 미끄러진다
멍하니 얼굴과 목을 마지막으로 매만진 라헬은 틀어올렸던 머리를 풀어내리고 머리를 말리기 시작한다
왜앵 -
하는 시끄러운 드라이어 바람 소리에도 머릿 속의 목소리는 더 또렷하게 들려온다
'유명? 당연히 유명했지, 설마 한국인일 줄은 몰랐지만'
생각에 잠겨 있던 라헬은 순간 드라이어를 놓칠 뻔 한다
손에 들고 있는 드라이어가 갑자기 바위처럼 무겁게 느껴진다
자꾸 빠져나가려는 손잡이를 억지로 꼭 잡고 간신히 머리를 말린다
손가락 사이로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뜨거운 바람을 불어넣는 단순한 동작을 반복하자 긴장했던 몸이 느슨해진다
긴장이 풀리자 스륵 머릿 속의 자물쇠도 저절로 열려버린 듯 풀려나온 몇 개의 단어들이 머리 속을 마구 헤집는다
단어.
낯선 단어들.
'한마디로 말해서 앙팡테리블. 어디서 튀어나온건지도 모르는 놈이 온갖 영화제를 휩쓸었다 이거지.
어지간한 영화제 훑는 사람이면 다들 이름 한번쯤은 들어봤을걸 나도 물론이고.
몇 년 동안 같은 이름이, 아무리 단편이어도 매년 다른 작품으로 작품상 아니면 감독상에 오르내리는데,
그게 누군지는 한번도 정체가 알려지지 않았던거야.'
앙팡테리블.
영화제.
감독상.
효신을 만났던 현장의 첫날 촬영을 마치고, '광고주 접대'라고 낄낄대면서 선욱이 데려간 단골집이라는 라면집에서
고작 라멘 한 그릇 사주려고 데리고 왔느냐고 투덜거리는 라헬에게 선욱이 뜬금없이 말을 꺼냈다
'아무나' 현장에 들이느냐 라고 했던 라헬의 말이 걸렸던 걸까
무심한 듯 꽤나 필사적으로 효신의 이력을 설명하는 선욱의 말을 듣고 있던 라헬의 머릿 속은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단어들에 마치 눈내린 크리스마스 아침에 할로윈 악몽을 만난 것처럼 혼란스러워졌다
'게다가 작품 국적이 미국으로 표기되니까 설마 한국인일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거든
밝혀졌으면 언론에서 가만히 있었겠냐 자랑스러운 한국인 어쩌고 인터뷰 도배되고 난리났을걸
어떤 면에서는 대단한거지 그 경력의 소유자가 저렇게 젊은 한국인이라니, 누가 믿겠냐'
선욱은 자기가 말하고도 어이가 없는 듯 고개를 짧게 흔들었더랬다
'처음엔 나도 포트폴리오 가져온 거 보고 정말 본인이냐, 어디서 어설프게 경력 속이냐고 했는데'
'... 속인 게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하는데'
저절로 잔뜩 내려앉아버린 목소리에 긴장한 티가 난 걸까, 저도 모르게 선욱의 눈치를 살폈다
선욱은 오히려 라헬의 낮은 목소리가 의구심,이라고 판단한 것처럼
아니 그 순간의 황당함을 다시 떠올린 것처럼 언제나 반쯤 싱글거리는 표정을 놓친 듯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
'... 봤으니까'
'응?'
'우감독 마지막 작품, 1분짜리 티저처럼만 돌아다니는 미완성 영화라고 알려진 거, 그 완성본을 봤거든'
'...'
'내가 뭘 보고 믿어야 하냐,고 하니까 말없이 백팩에서 맥북 꺼내더니, 탁. 탁. 클릭 두 번으로 플레이.'
선욱은 날카로운 칼을 휘두르듯 손날로 허공을 짧게 그었다
'게임 셋이지. 더이상 무슨 말이 필요해'
어깨를 으쓱하며 휘파람을 짧게 부는 선욱의 얼굴을 바라보는 라헬의 표정이 묘하게 흔들렸다
'근데 왜'
'왜 밝히지 않느냐고? 그건 나도 모르지, 자기 얘긴 잘 안하는 친구라.
그리고 이 바닥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딨냐, 크던 작던 사연 하나씩은 있어야 감독도 해먹는거야 나만 해도..'
모자랄 것 없는 집안의 한량으로 태어나 제멋대로 살고 있으면서 대체 무슨 사연이 있다는 건지
쓸데없는 소리를 시작하려는 낌새에 라헬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무시하고 라멘에만 집중했다
급격하게 관심을 잃는 것이 명백한 라헬에게 투덜거리는 선욱의 목소리가 서서히 페이드 아웃되었다
그러나 라헬의 머리 속에 남겨진 몇 개의 단어들은 그후로도 며칠째 끈질기게 신경을 건드렸고
계속 그걸 애써 무시하느라 평소보다 에너지의 몇 배가 소모되었다
아마도 지금의 피로는 그 때문.
겨우 두피가 보송해졌다 느껴질 때쯤에야 드라이어를 내려놓는다
귓가에 시끄럽게 울리던 모터 소리가 순식간에 멈추자 갑작스럽게 고요가 큰 파도처럼 덮쳐온다
라헬은 제 모습이 비친 거울 너머를 초점없이 바라본다
영화제
마지막 작품
영화
우감독
우감독
우.
라헬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세차게 흔든다
분명 그,임에 분명한 낯선 이름은 아무리 되뇌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니 비단 이름만이 아니다
그토록 오래,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흔적도 찾을 수 없던 사람이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모습의 다른 이름으로 나타났을 때,
인간은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정상인걸까
무릎 위에 올려뒀던 손을 천천히 들어 허공에 무의미한 동그라미를 그려쥔다
마치 얼마 전 마주쳤던 그 얼굴을 그려보는 것처럼 허공을 더듬다가
아무래도 또렷해지지 않는 이미지에 툭 하고 손을 떨어트린다
변하지 않은 것은 다만 그 태연한 미소
언제나 모든 걸 먼저 알고 있는 듯이 그러했지
먼저 손을 내민 적도 없는데 불쑥 끼어들어서는 슬며시 저를 쓰다듬고 지나갔다
마치 세상에 미련 없는 사람처럼 툭,하고 무심히 던지는 말들에 저는 시나브로 무너지고 말았다
'너랑 자꾸 비밀을 공유하잖아'
비밀.
'나 군대가, 이것도 비밀이다'
비밀.
라헬에게 있어 비밀이란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되는 약점.
차갑게 얼어붙은 성벽 아래 숨겨놓은 부드러운 아킬레스 건.
비밀을 들킨다는 건 전쟁 중에 무방비한 뒷모습을 노출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
세상의 모든 사람은 '목적'이 있었다
라헬의 세계는, 적어도 그러했다
사랑이나 결혼 조차 '목적'에 따라 움직였다
그것이 당연한 세상의 진리였다
라헬은 아주 어릴 때부터 스스로를 포함한 모두를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에 익숙했다
그런 세계에서 '이용'당할 수 있는 '비밀'을 오픈한다는 건 치명적인 실수.
그런데 그는 라헬의 비밀을 그렇게 많이 알아챘으면서도 그걸 다시 언급하거나 이용하지 않았다
비밀은 약점, 약점은 이용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공식이 당연했던 라헬에게
그러한 효신의 태도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이었다
아니 효신은 어쩌면 비단 라헬 뿐 아니라 모두의 약점을 알고 있었고 누구의 약점도 발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악하고 어리석은 영혼이 득실거리는 제국고에 무혈 입성하고
모두의 신뢰와 약간의 두려움으로 졸업의 그날까지 제국고를 지배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사람은 뭐지 대체.
아무리 신경은 곤두세워도 어느새 스륵 다가와 제 뒷모습을 알아차렸다
잔뜩 곤두세운 가시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무심히 다가와서는
슬쩍 보드라운 잎새를 쓰다듬고 사라졌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듯한, 자연스럽고 무심한 배려.
원하지 않았는데도 너무 많이 들켜버렸고
원하지 않았는데도 너무 많이 알아버렸고
그런데 왜 그는 아무렇지 않고
저는 왜 그게 불편하지 않은 건지, 신기했다
'기다려줄 여자는 있어요?'
그때 그 말이 갑작스레 튀어나와버린 건.
먼저 '비밀'을 공개한, 그것도 '너에게만' '알려주는 거'라는 그 말에 부채감을 느꼈기 때문일까.
제가 말하고도 조금 놀라 눈을 깜빡이고 있는 라헬을 약간 놀란 듯 찬찬히 살피던 효신은
몇 초 후 예의 그 여유로운 표정으로 피식,하고 웃었다
'편지 써줄 사람은 없는데?'
대답 대신 돌아온 질문에 라헬의 얼굴은 가면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말똥말똥한 눈이 질문을 대신하고 있는 라헬의 차가운 표정에도 당황하지 않는 효신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싱긋 하고 웃었다
'편지, 쓰면 논술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데.'
'... 한국에서 논술 볼 일 없어요'
'아이비 어플라이는 에세이 필수였던 거 같은데, 글쓰기는 꾸준히 반복하는 게 도움이 되지 아마'
'... 에세이 만으로 어드미션이 나오는 건 아니죠'
'아아, 자원 봉사라고 생각해도 좋고, 고생하고 있는 국군 장병위 사기진작에는 소녀의 편지가 늘 효과적일걸'
'... 그런 취미 없어요'
어쩐지 설득당해버릴 것 같은 예감에 앉아있던 소파에서 슬쩍 옆으로 물러났다
'아직 새로운 취미를 가지기에 늦지 않았어, 어린이'
애써 뚱한 표정으로 시선 떨구고 있는 라헬을 보고
살짝 고개 기울여 눈을 맞추면서 앞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만 것이 패인.
그 촌스러운 '위문편지 교환'이 즐거웠다는 것이 또다른 패인.
그러나
마치 정말로 '논술 준비'를 위한 훈련이었다는 듯이 또는 '사기진작을 위한' '자원봉사'였다는 듯이
위문편지 교환의 종료, 즉, 효신의 제대와 동시에 효신은 증발한 것처럼 사라졌더랬다
유학 중이었던 라헬이 효신의 행방을 알아낼 방법은 많지 않았다
한국에 효신의 소식을 알만한 지인이라고는 보나를 포함해 서로 으르렁거리는 사이뿐이었고
어른들의 네트워크를 활용하기에 라헬은 어렸다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차라리 질식해버리는 편이 나았을텐데,
괜히 어딘가에 숨쉴 가능성이 있다고 기대따위 걸지 않았던 편이, 좋았을걸.
그게, 라헬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저 그렇게 라헬은 하나의 문을 영원히 폐쇄해버렸다
그랬는데,
그렇게 사라졌던 사람이
5년 만에
마치 늘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그렇게.
'잘 지냈어?'
하!
태연하던 효신의 얼굴과 익숙한 목소리를 떠올리고 라헬은 짧게 헛웃음을 흘린다
잘 지냈냐니, 잘 지냈을리가.
대체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가 있지
라헬은 주먹을 꼭 쥐고는 벌떡 의자에서 일어선다
빠른 걸음으로 거실을 지나 서재로 들어선 라헬은
짙은 흑단에 가까운 색에 커다란 오크 책상에 앉아 컴퓨터 전원을 켠다
위잉 소리를 내며 켜진 컴퓨터에 크롬 화면을 띄우고 잠깐 멈칫하다가 빠르게 검색어를 입력한다
D I R E T O R W O O C L E R M O N T F E R R A N D I N T E R N A T I O N A L F I L M F E S T I V A L
엔터를 누르자 잠깐 흰 색으로 바뀌었던 화면이 마침내 검색 결과를 내 놓는다
지난 몇 년간, 무의미한 희망을 품고 '이 효 신' 으로 검색할 때마다
페이지 40번 대를 넘어서도 의미있는 정보를 찾아내지 못했던 검색 엔진은
단번에 Director Woo의 정보를 토해낸다
선욱이 말했던 '우감독'의 현재까지 최고 작품으로 꼽힌다는, 클레르몽페랑 영화제 대상 수상작 'Hide & Seek'의 영상부터
관련한 다른 단편 영화들과 필모그라피가 첫페이지부터 주욱, 화면 가득 나열된다
선욱의 말대로 영화계에서 '우감독'의 이름은 꽤나 유명한 것인지
화면을 가득 메운 정보들에 어쩌면 '이효신'보다 더 가치있고 의미있는 존재처럼 보인다
라헬이 모르는, 지난 5년간의 효신이 거기에 있다
제멋대로 떨리는 손으로 첫번째 영상을 클릭한다
자연스럽게 웹페이지는 유튜브의 채널로 넘어간다
동영상의 전체 화면 설정을 누르자 모니터는 고풍스런 흑백의 화면으로 가득찬다
'Hide & Seek'
30년대 흑백 무성 영화를 모방한 듯, 화면을 가득 채운 타이틀 글씨가 바르르 하고 인위적으로 떨린다
흑백의 화면과 달리 정작 영상 속 세계는 자연스러운 현대,
주인공으로 보이는 남자는 평범한 거리를 걷는다
가게의 종업원과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커피를 한 잔 집어들기도 하고 신문을 뒤적인다
그리고 길 끝에 있는 지하철 역사로 걸어내려간다
그렇게 주인공이 지하철 역 안으로 사라지는 것으로 그저 평범해보이는 일상이 짧게 지나가고
화면은 마치 처음으로 돌아간 것처럼 다시 길을 걷고 있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리고 조금 전과 똑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주인공의 옷과 거리에 비가 내리고 있다는걸 제외하면 같은 영상을 반복하고 있다고 믿을 정도다
세번째 상황이 반복되던 날 변화가 일어난다
주인공의 행동이 미묘하게 느려지고 덕분에 지나치던 사람과 세게 부딪히고 만다
예쁜 여자다, 어쩌면 앞의 이틀 동안 지나쳤을지도 모르겠다
부딪혀 길거리에 나동그라진 주인공은 우스꽝스럽게 떨어트린 가방을 줍는다
여자는 주인공을 내려다보며 뭐라고 차갑게 소리지른다
여기까진 마치, 채플린의 영화 같다
그리고 다시 네번째 날.
다섯번째 날.
여섯번째 날.
남자는 첫날과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그 와중에도 미묘하게 흐름에서 어긋난 행동으로 거리의 균형을 깬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처음에는 이건 뭐지 하고 시큰둥하게 보다가
혹시 채플린과 같은 슬랩스틱 코미디 혹은 블랙 코미디 인가, 하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라헬은 STOP 버튼을 누르는 것을 잊고 그대로 멈춰버린다
마치 1984와 모던 타임즈를 떠올리게 하는 잔혹한 결말에 라헬은 다시 한번 크레딧을 확인한다
이게, 정말로 이.효.신.의 세계라고...?
머뭇,하던 라헬은 뒤로 돌아가기를 누르고 검색창에 뜬 효신의 다른 작품을 클릭한다
유튜브에 떠돌아다니는 몇 개의 작품을 보고나서도 여전히 믿을 수가 없다
가장 경악했던 작품은 - 수상 명단에는 이름이 없었던 - 베를린 영화제 상영작인 'Seasons of gold'였다
우아하게 차려입은 여자가 지나가면 길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바라보고
집에는 시중드는 사람이 몇이나 있어서 손가락 끝까지 받칠 것처럼
옷장에 가득한 화려한 옷을 꺼내 입혀주고 씻겨주고 머리를 빗겨주고
식사 때는 온갖 진수성찬이 차려져서 방으로 들어오고 꽃과 선물들이 가득하고
그러나 그런 대접을 받고 있는 여자는 어딘가 신경질적인 태도로
내내 무심히 하는 대로 몸을 맡겼다가 이내 짜증내는 듯 상자를 내던지고
사람들의 경이에 찬 시선 또한 안 느껴지는 듯 무시하다가
이내 짜증 내며 선글라스를 꺼내쓰다가 그것조차 못 참겠다는 듯
혐오스러워하는 태도로 소리를 지르며 격분했다
내내 파괴의 여신이나 질투의 여신이라도 된 양
단 한번도 호의에 감사하거나 미소짓는 일 없이 퉁명스럽게 구는 여주인공에
슬슬 짜증이 날 무렵
순백의 드레스와 금 장신구로 치장한 여자가
양쪽 팔을 건장한 남자들에게 단단히 붙들린 채
애써 발걸음을 멈춰보려고 멈칫 거리다가 저를 끌고가는 남자들의 힘에 못이겨
힘없이 발끝을 결국 미끌어트리며 끌려왔다
커다란 문 앞에서 여자는 여전히 붙들린 채 공포에 질린 듯 떨고
주변에 여자를 방금 전까지 떠받을며 모시던 남자와 여자들이 싱글싱글 웃으며 에워쌌다
그리고 가장 여자에게 큰 꽃다발과 선물을 바쳤던 중년의 남자가 웃으며 문 쪽을 손짓했다
문이 열리고 암흑의 공간이 슬쩍 드러나고
여자는 눕듯이 미끄러진 것도 소용없이 단번에 문 안 쪽으로 밀어넣어지고
짧은 비명과 알 수 없는 으르렁거리는 소음이 채 소리를 키우기 전에 굳게 문이 닫히고
그리고 침묵.
긴 침묵
암전.
블랙아웃된 화면이 몇초쯤 계속 되고
갑작스럽게 확 화면이 밝아지면서 평온한 거리의 일상이 짧게 스케치하며 지나간
카메라는 마침내 평범한 어느 집 현관 앞을 비췄다
여느 집과 같은 현관 앞에 서서히 선물상자와 꽃다발을 놓고 가는 손들이 겹쳐져 보이고
마침내 선물과 꽃다발이 잔뜩 쌓인 더미를 클로즈업하면
아까 문 안으로 밀쳐진 여자가 걸고 있던 금장신구의 일부가 보였다
카메라가 팬하면 현관문이 열리고 어떤 여자가 부스스하게 등장하고
집 앞에 쌓여있는 선물을 보고는 놀랐다가 경악하고 금새 냉정하게 표정이 굳어버린다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그리고 다시 블랙아웃.
크레딧이 올라가는 걸 확인하고서도 이게 무슨 내용인건지
라헬은 차마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이 멍해졌다
'우감독'이라고 알려진 효신의 이야기들은,
언젠가 좋아하는 장르라고 입에 달고 다녔던 '치정'도 아니었고
몰래 겨우 구해보았던 학생영화제의 '금상' 수상작, '그룹스터디'의 느낌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룹스터디'는 화면이나 흐름이 상당히 세련되었을 뿐, 학생다운 치기어림이라고 해야할지,
어두움과 밝음 모두 어딘가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한 '흉내'의 흔적이 느껴졌고
그렇게나 강조하고 다녔던 치정이라기 보다는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에 가까웠다
그래서 꽤나 절망적이었던 결말에도 불구하고 크게 몰입하지 않고도
가끔은 꺼내보면서 18세의 효신의 세계가 이러했구나, 귀엽다,고 생각할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체 지난 5년 동안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이 온통 절망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세계는 무엇일까
정상적으로 보이는 세계와 숨겨진 광기, 은밀한 폭력과 드러내지 않는 공포
짐짓 정상임을 가장해서 더 기괴하고 고통스러운 이미지들과 이야기들
대부분의 작품은 인물이 말은 하되 대사가 들리지 않고
대신 마치 그 영상을 위해 제작한 것처럼 그 모든 감정을 대변하는 음악만 들렸다
그 배경 음악은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던 종류의 것으로 때때로 소음이나 소리에 가까웠고
등장인물의 '말'을 직접 들을 수 없다는 것이 미묘한 불편함을 증폭시켰다
한결같이 평범하고 심지어 밝기까지한 제목은 또 어떠한가 말이다
그런 제목의 영화가 이렇게나 극한으로 몰아가는 내용일거라고 누가 짐작할 수 있을까
적어도 그건 제가 알고 있던 이효신과는 너무 달랐다
두려움 반, 호기심 반이 섞여 온통 머릿 속이 혼란스러워진 라헬은
대체 5년 남짓한 기간동안 이런 작품을 찍은 게 정말 제가 아는 효신이 맞는 건지 답을 찾기 위해
구글 검색 결과의 모든 링크를 타고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한다
선욱이 '한마디로 미친 놈'이라고 한 이유를 곧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단편영화라지만, 이렇게 단 시간내에 이렇게 많은 작품을 찍을 수 있는 걸까
이 모든 작품이 정말 효신, 우감독의 작품이란 말인지 헷갈릴 정도로 인터넷에 업로드 되어있는 작품만 십수편.
그 중에 일부는 공동 연출이거나 촬영으로 참여한 것이긴 했지만 그런 걸 감안한다고 해도 우감독,의 작품 속도는
잘 모르는 라헬이 봐도 보통의 몇배이리라 확신할 수준이었다
마치 무엇이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마치 죽음을 앞두고 모든 에너지를 불태워버리는 불꽃처럼.
검색 결과 페이지를 한참 넘긴 후에야 라헬은
아마도 효신의, 아니 우감독의 팬인 듯 보이는 사람이 만든 유튜브 채널 페이지를 찾아낸다
몇 개의 추천영상을 타고 들어간 채널에서 처음 발견한 것은
어떤 시상식장이나 출품 영화제에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는 효신의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일 선댄스 영화제 GV 장면이었다
역시나 출품작이 수상을 하지못해서 그다지 회자가 되지않았던 모양인 영상에서
다른 단편영화 출품자들과 나란히 서 있는 효신의 모습은
의도적인지 실수였는지 포커스가 흐릿해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관객의 꽤나 바보같은 질문에 피식,하고 웃음소리가 슬쩍 흐르는 느낌이나
그러면서도 차분하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라헬이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 여서,
지금까지 의구심을 품어왔던 - 우감독 = 이효신 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영어로 유창하게 대답하는 효신의 목소리가 낯설고도 낯익어서
라헬은 멍하니 몇번이나 그 영상을 되감아 들었다
그리고 혹시나, 다른 인터뷰나 GV영상이 더 있지 않을까 하고 들어간 채널에서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영상을 발견한다
'Serial 3: Ray Of Sunshine'
효신의 영화 몇 개를 본 후부터 그러했듯이 단번에 재생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린다
화사해보이는 썸네일에 오히려 이젠 무슨 반전이 있을까 두렵기까지 하다
망설이던 라헬은 결국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전체 화면으로 전환한다
막상 플레이된 영상은 좀전의 GV보다는 초점도 맞고 또렷하지만
아마도 상영 중에 도둑촬영되거나 적어도 스크린을 촬영한 것처럼
미묘하게 필터를 하나 끼운 것처럼 한단계 멀리 보인다
검은 화면에 탁탁탁,타자기 소리와 함께 흰 글씨로 'RAY OF SUNSHINE' 이라는 문구가 차례로 떠오르고
동시에 확 하고 강렬한 빛 속으로 문장이 사라진다
그리고
밝은 빛이 쏟아지는 창가로부터 음악이 시작된다
느릿한 피아노 연주가 한 음, 한 음 짚어나가자 영상을 바라보고 있던 라헬의 표정이 숨길 수 없이 굳어진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이곳에서는 잠이 온다는 걸 느끼기도 전에 잠들어버려
하지만 가끔 잠이 오지 않는 밤, 골드베르크가 듣고 싶어지지
원래 자장가 용으로 만든 곡이라고 들어서인지 수면제 대용으로 꽤 효과 있었어
한번 시험해봐, 시험 결과를 알려줘도 좋고'
몇 번인가 편지가 오고간 뒤 효신이 편지에 흘리듯 언급한 곡이었다
말한 '결과' 대신 '고삼에게 잠이라니 무슨 악담이예요'' 라고 까칠한 회신을 짧게 적어 보냈지만
조금은, '잠이 안와서요' 라는 자신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마음에
뇌리에 깊숙이 그 제목이 박혀버렸다
효신의 배려라고 해야할지 충고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가 사라진 후에도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습관처럼 찾아들었으니 잘못 들었을리 없다
멍해진 라헬의 눈 앞에 펼쳐진 모니터에 뜬 영상은 멈춰버린 머리와 관계없이 천천히 움직인다
느릿한 타건에 맑은 피아노 소리가 울리고 카메라가 서서히 뒤쪽으로 빠지면
그제야 긴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자의 뒷모습이 잡힌다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는 여자는 하늘거리는 옷 때문인지 소녀처럼 보인다
창으로부터 비정상적인 정도로 쏟아지는 빛에 갈색 머리는 거의 햇빛 같은 금발로 빛나고
카메라가 흔들리면 금새라도 빛 속으로 사라질 것처럼도 보인다
카메라는 다시 천천히 여자 쪽으로 다가가 어깨 너머로 훔쳐보듯이 책상을 비춘다
넘겨다본 책상 위 여자의 손은 뭔가 쓰고 있다.
아예 노란 빛으로도 보이는 종이와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릴 것처럼 달리고 있는 펜.
역시나 강렬한 빛에 글씨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카메라 앵글 한켠에 걸려있던 어깨가 움찔,하고 그에 따라 화면도 살짝 흔들리고
그러는 바람에 종이의 각도가 달라지면서 보이지 않던 글씨의 일부가 드러난다
miss you
어릿하게 드러난 글씨를 확인하고 라헬은 왜인지 모르게 숨을 헉,하고 들이삼킨다
아주 짧게 지나간 일곱 글자에 확,하고 얼굴이 달아오른다
발그레해진 라헬의 얼굴이 점점 더 달아오르는 동안
천천히 다시 뒤로 빠진 카메라는 열중하고 있는 소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서서히 음악의 볼륨이 높아진다
피아노 소리가 정지한 것처럼 보이는 화면을 압도할 때쯤
갑작스럽게 지직 거리는 것도 같고 바스스 하는 것도 같은 소음 같은 소리가 끼어든다
마치 테이프의 처음 음악이 나오기까지 몇초간 등장하는 무의미한 소음이 고조된 피아노에 슬쩍 묻어 들리다가
땅, 하고 높은 음에 맞추기라도 한 듯 알아들을 수 없는 낮은 목소리가 짧게 등장한다
마치 그 소리에 반응한 것처럼 내내 뒷모습 뿐이었던 여자가 홱하고 고개를 돌린다
여전히 얼굴을 보여주진 않지만 상반신에 살짝 걸린 입매에 미소가 걸리는 걸 카메라는 스치듯 보여준다
두 팔을 활짝 벌린 여자가 카메라 앞으로 확 뛰어들고 그대로 뒷쪽 창에서 내내 비정상적으로 강하게 쏟아지던
빛 속으로 여자의 모습이 녹아버리 듯 사라지는 것으로 페이드 아웃.
3분.남짓 되는 짧은 골든베르크 협주곡의 일부에 맞춘 듯 음악과 영상이 동시에 끝난다
감독과 촬영, 배우 이름의 단 세 줄인 짧은 크레딧은 배경음 없이 무심하게 떴다 사라지고
이내 검게 된 모니터를 그대로 둔 채 라헬은 자신이 방금 본 영상을 어색하게 복기한다
이건 지나친 자의식일지도 모르지만,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고 스스로 조차 잊고 있었으니,
효신이 알았으리라고 생각하는 건 지나친 억측이겠지만,
그러나 저 뒷모습은 꼭 자신의 것인 양 느껴진다
그 순진한 소녀 시절
당신에게 편지를 적어내려가는 내 모습이 얼마나 바보같고 들떠있었는지
마치 저 영상 속의 그녀처럼 부드럽고 연약하게
그러나 나는 단 한번도 당신에게 내 마음을 말한 적이 없는데
가끔 엄마나 아줌마가 전해주는 그의 편지를 무심하게 귀찮은 듯 받아들고
정작 방에 돌아와서는 잠금 서랍에 넣어두고 얼마나 반복해서 읽었는지 모른다
그 모든 문장을 하나하나 되짚고 외워버릴 듯이 상상해서
나중에는 그 문장들이 곧 그라는 존재 자체인 것처럼 느껴졌다
혹여나 그 모습이 들킬까봐
효신에게조차 그런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래서 달뜬 마음과 달리 답장은 늘 무미건조하고 시니컬했다
저 일곱글자를 속으로 되뇌이기만 했을 뿐 정작 그에게 보냈던 문장에는 포함시키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게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이라는 걸
이건 치명적인 약점이 되리라는 걸
누구에게도
당사자인 효신에게는 더더욱이나
절대로 들켜서는 안된다고
그렇게 다잡았는데
그래서 효신이 그렇게 증발해버렸을 때
그래도 이렇게 사라질 사람에게 약점을 잡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그나마 그건 안심해도 좋다고 애써 위로했는데
해서는 안될 일을 들킨 것처럼 수치심이 밀려온다
갑작스럽게 꼭꼭 숨겨놨던 아주 약하고 부끄러운 살점이 드러난 것처럼 발가벗겨진 기분이 된다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아니 자신도 몰랐던 탄에 대한 분노를
탄에게는 아깝다는 자신의 가치를 먼저 알아차린 사람이니
모르리라고 생각한 것이 오히려 어리석었을까
조심한다고 했어도 아마 그때의 자신은 뭔가 단서를 남겼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는 해도.
라헬은 수치심으로 빨갛게 되어버린 얼굴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다
용서할 수 없다.
그렇게 사라져서는,
남의 약점으로 이렇게 공개적인 영상을 만들다니
절대,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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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어어어무 오랜만이라 기억하고 있는 냔이가 있을지;;
새해들고 너무 바빠서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어서 내내 마음에만 담아둔채 끙끙 앓다가 드디어 여유가 생겨서 얼른!
덕분에 이야기가 (띄엄띄엄 쓰느라) 매끄럽지 않은 것 같지만... 수정이라는 좋은 기능이 있으니까.
이제 연휴가 곧이니까 얼른 나머지 이야기의 속도를 좀 낼 수 있기를 기대하며..
혹시 아직도 기억해준 냔이가 있다면 감사 ㅠ
길고 느릿하지만 그래도 즐거워해주길 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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