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쾅.
주위에 누가 있었다면 깜짝 놀라 돌아볼만큼 세게 차문을 닫아버린다
- 너, 지금 듣고 있는 거야? 그래서 대체 어쩔 거야? 이게 대체 몇번째인 줄 알아?
귀찮은 듯 한쪽 눈을 찌푸리며 살짝 휴대폰을 떼었다가 짧게 한숨을 쉬고는 도로 갖다댄다
분명 차 문을 닫는 소리가 건너 들렸을텐데 아랑곳 없이 벌써 십분째 같은 이야기를 반복 중이다
운전 중이라고 끊으려고도 해봤고 도착한 후에는 이제 들어가봐야한다고 그만 하려고도 해봤지만
도무지 수화기 건너편의 상대는 지칠 줄 모르고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
아니 오늘만 특별한 건 아니다
지금 수화기 건너편에서 줄줄이 나열되고 있는 사건들이 벌어지던 때마다 들었으니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다
두번만 더 들으면 백번,이라고 대답해줘야하나 쓸데없는 오기가 슬쩍 솟고 만다
- 라헬이 너 지금 듣고 있어? 대답 좀 해봐
"어, 듣고 있어요"
어깨에 메고 있던 작은 가방 안에서 태블릿을 꺼내서 한 손을 휙휙 넘기면서 건성으로 대답한다
한쪽 어깨에 억지로 휴대폰을 끼우고 태블릿 PC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곁눈질로 길을 확인하면서도
10cm는 족히 되어보이는 킬힐은 한번 비틀거리거나 머뭇거리지도 않고 또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똑바로 걸어간다
제대로 듣고 있지 않은 걸 알아챘는지 수화기 건너의 목소리가 화난 듯 한 톤 낮아진다
- 오늘 집에 들어와, 얘기 좀 하자. 대체 어쩌자는 거니?
집에 들어와,라는 말을 듣자 빠른 속도로 걷던 킬힐이 또각.하고 그 자리에 멈춘다
라헬은 어깨에 건성으로 끼우고 있던 휴대폰을 고쳐든다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빠르고 짧게 말한다
"선 안봐요. 그 기사, 아무 일 없었어요. 오늘은 집에 못 가요."
- 얘 너, 진짜....!
원하는 대답을 해드렸는데도 오히려 더듬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라헬은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수화기를 든 채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인기척 없는 주차장에 아스팔트를 울리는 또각거리는 굽소리만 들린다
몇 초 간 헉헉, 숨넘어가는 소리만 나던 수화기 너머에서 마침내 평정을 잃은 듯 낮은 목소리가 들린다
- 아니, 왜 싫다는거야. 집안 확실하고 게다가, 제국그룹만큼은 아니어도 성진그룹도 재계 순위 3위 안에 들어가
이런 자리가 흔하게 나오는 줄 알아? 게다가 한달에 한번 꼴로 소문이 도는 너를, 그 집안에서 잘 봤다는데 뭐가 싫다는 거야
대체, 이번에 그 남자는 또 누구니? 마술사? 너 그런 거 콜렉팅하는 취미 있었니? 차라리 그림을 사, 왜 남자를 콜렉팅해?
이 세계에서 네 마음대로 사람 만나고 그런 거 안되는 거, 이미 너 잘 알고 있잖니?
"성진그룹 막내, 개차반이라고 소문 자자해. 그런 개자식이랑은 얼굴 마주하는 시간도 아까워요"
상대만 바꿔가면서 똑같은 레퍼토리가 몇번째인지, 그리고 이렇게 대답하는 것 또한 몇번째인지
정말로 백번을 채우는 건 아닐까,아아 이러다간 재계 서열 50위권 내 상속자들은 한번씩 다 거론해보겠네,
하는 어이없는 생각을 떠올리며 라헬은 차갑게 대답한다
"겨우 하룻밤 소문 하나 가지고 그러지 말아요, 아무 일도 없었고 루머는 앞으로도 돌테니까.
지금까지 나왔던 개자식들은 그것보다 더한 소문도 돌아, 엄마나 내가 굽신거릴 이유 없어요
그리고,"
주차장 끝 철문 앞에 또각,하고 구두가 선다
손잡이를 잡은 채 어울리지 않게 잠깐 망설인다
어린애 투정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기어이 그 말을 하고 만다
"적어도 난 결혼을 무기로 활용할 생각은 없어요. 엄마가 그걸 아직도 기대하고 있다면, 그만둬요
난, 내 스스로 무기가 될 생각이니까"
- ... 너...!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질끈 깨문다
하지 말았어야 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결정적인 순간에 불리한 감정을 드러내는 불같은 성격을 다 잠재우기엔 아직 너무 젊었다
아니,
수화기 건너편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같은 건 상관없다
지금만으로도 충분히 의무는 다하고 있으니까.
"나 현장 왔어요. 들어가봐야해요. 이만 끊어요. 들어가세요"
- 얘! 얘! 라헬아! 유라헬!
급하게 부르는 이름을 무시하고 그대로 종료버튼을 누른다
잠깐 심호흡을 하고 손잡이를 돌려 세게 잡아당긴다
철문을 열자 천장이 높고 얼기설기 철제 봉과 장비들이 어지럽게 놓여있는 을씨년스러운 콘크리트 복도가 나타난다
어둑어둑한 복도를 걸어 또다른 철문을 연다
"거기! 조명! 각도가 틀렸잖아!"
"모델 스탠바이 됐어? 확인해봐"
문을 열자 시끌벅적 사람들이 북적이는 또다른 세계가 있다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세트와 온갖 장비, 소품을 들고 이리저리 흩어졌다 모이고
지시하는 사람들의 시끄러운 고함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빠른 비트의 음악소리까지
마치 세상의 모든 소음을 모아둔 것 같은 공간 속으로 라헬은 홀로 고요하게 다른 속도의 걸음걸이로 걸어들어간다
"어? 유대리님 오셨어요?"
"감독님! 유대리님 오셨어요!"
저를 부르는 말에 고개만 까딱해서 대답한다
입사 3년차 대리 직급이지만 아무도 왜 라헬이 이 현장에 나타났는지 의구심을 품지 않는다
대리, 라는 직급보다 RS인터내셔널의 상속녀, 다른 이름으로는 광고주님 이라는 신분을
적어도 이 현장의 치프들은 인지하고 있고, 라헬도 위화감없이 이 분위기를 받아들인다
부서 전체를 경험해봐야한다는 어머니의 경영 수업 방침에 따라 마케팅 실에서 근무한지 어언 일년반,
오늘과 같은 메인 브랜드의 촬영 현장에 업무 상 온 것은 처음이지만
경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전에도 어머니를 따라 여러번 다녔던 현장이다
이런 분위기에는 이미 익숙하다고 해야할 것이다
라헬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스태프들에게 목례로 답만 하면서 익숙한 듯 현장 중앙으로 망설임없이 걸어간다
촬영 세트 옆쪽의 모니터 앞에 앉아 있던 남자가 구둣소리를 들은 듯 돌아보더니 라헬을 발견하고 일어서 다가온다
"어? 라헬 왔어?"
친한 척하며 어깨에 손을 올리는 남자의 손을 귀찮은 듯 털어낸다
인사 대신 손에 들고 있던 태블릿 PC 화면에 촬영 콘티를 띄운다
"최종 콘티, 보내준 게 마지막이예요?"
라헬이 보여주는 화면을 스윽 하고 건너본 남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삼십분 전에 보내준거네. 왜 마음에 안 들어?"
“감 떨어졌어요? 클로즈업 엔딩이라니 언제적이예요, 컨셉에 안 맞잖아요”
“그건 모델이”
“.. 모델이 하자고 하면 다 찍어줘요? 촬영 접어볼까요?”
“알았어, 알았어. 하여간 깐깐하기는. 원안이 좋다는 거지?”
촬영 취소를 거론하는 라헬의 말에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한다
어정쩡하게 대답하는 남자의 말에 라헬은 오히려 냉정하게 일침을 놓는다
“최소한 최종이면 원안보다 나은 게 왔어야죠. 안일하게 찍을거면 그만둬요. 찍을 사람 거기 말고도 많아”
“오케이 거기까지만, 넌 몇달만에 본 사촌한테도 어쩜 그렇게 잔인하냐”
손사래를 치며 남자가 라헬의 말을 끊는다
"누가 그쪽 사촌이예요"
“혈연 관계를 없는 걸로 하지 마라. 확 항렬 따지는 수가 있어”
“좋으시겠네요 아저씨. 그래서 콘티 수정은 어쩔거예요? 모델한테 설명 안해요?”
“하면 되잖아, 할거야. 광고주님 말인데 어떻게 거역하겠어”
싱글거리며 대답하는 남자에게 라헬은 그저 고개를 살짝 끄덕여보인다
사촌.이라고 간단히 말하기에는 조금 복잡한 관계인 선욱,은 굳이 따지자면 7촌 아저씨 뻘로
라헬의 증조 할머니와 선욱의 할아버지가 5남매의 맏이와 막내여서 후손들의 나이 차이가 지기 시작한지라
라헬의 대에 이르러서는 한 대를 걸렀음에도 라헬과 선욱의 나이 차가 10살 이내로 들어오게 되었다
겨우 일곱살 차이이지만, 엄연한 7촌 아저씨.
사실 그렇게 먼 친척까지 알고 지낼 이유는 조금도 없는 관계지만
라헬의 유학시절 마침 선욱도 그곳에서 영상 연출 공부 중이었고 에스더가 선욱에게 현지에 도착한 라헬의 픽업을 부탁했다
'반갑다, 김선욱이다'
'... 유라헬이예요,'
처음 공항에서 만났을 때 서먹하게 거리를 두는 라헬의 태도에도 아랑곳않고 멋지게 웃어보인 선욱은
그 후로 아주 가끔 자신이 내킬때만 연락을 해왔다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지낼 수 있는지라 괜한 간섭이라고 생각했고 혹시나 감시역이 아닐까,하는 의심에 거리를 두려고도 했지만
선욱은 제가 감당할수 없을 정도로 자유로운 사람이었고 오히려 라헬이 너무 갑갑해보인다며 충동질하는 일이 더 잦았다
덕분에 학교와 집만 오갔던 유학 생활의 몇 안되는 이상한 기억은 선욱 때문에 벌어진 일이 대부분이었다
기겁해서 돌아왔던 레이브 파티라던지, 대체 어떻게 알게 된건지 조차 궁금한 온갖 이상한 사람들.
지금 라헬을 둘러싸고 빈번히 터지는 스캔들들은 절반 이상은 그때의 기억에 빚지고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정작 그렇게 놀기만 할 생각인가, 싶던 선욱은 라헬의 유학 중간쯤 드디어 귀국해서 광고 감독으로 일을 시작했고
의외로 성실하게 일에 매진해서 몇 년 전부터는 RS 인터내셔널의 TV 광고 촬영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막내야!"
선욱이 손을 번쩍 들고 큰소리로 누군가를 부른다
이 시끄러운 가운데 어떻게 들었는지 단번에 쪼르르 달려온 여자애에게 씩 웃어보이더니 현장 반대쪽을 가리킨다
"가서 김수현씨 스탠바이 상탠지 확인하고 와 최종 콘티 변경 사항 설명드린다고 시간 되시냐고"
“네”
고개를 끄덕하고 대답하는 여자에게 선욱이 멋지게 씩 하고 웃어보인다
순간 당황한 듯 멈칫한 여자가 얼른 선욱이 가리킨 방향으로 달려간다
하여간...
못마땅하게 옆에서 팔짱을 끼고 바라보던 라헬이 싱글거리며 돌아서는 선욱에게 핀잔을 준다
"그만 좀 흘리고 다니지? 순진한 애인거 같은데"
“내가 뭘?”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선욱을 차갑게 노려본다
외양으로야 멀쩡하고, 꽤나 잘생겼다고 해야할 선욱은 자신의 매력적인 외모를 라헬의 기준으로는 무자비할 정도로 마구잡이로 활용해댔다
여자들이 대체 왜 아무렇게나 흘리고 다니는 선욱에게 홀리는 건지
책임지지도 않을 거면서 홀리는 선욱이 나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해할 수가 없다
"실력 없으면 당장 아웃이야"
“그래서 나는 실력이 있지”
“증명해봐”
얼마든지, 라는 듯 허리를 숙여보인 선욱은 우아하게 손을 들어 오른쪽의 현장이 한눈에 보이는 자리로 안내한다
내키지 않는 듯 그러나 익숙하게 감독 모니터 옆의 간이 의자로 걸어가 앉은 라헬은 그제야 꼼꼼하게 현장을 둘러본다
태블릿 피시의 콘티 배경과 현장의 배경, 모니터로 보이는 영상의 차이를 비교해본다
배경의 색감이 영상으로 보니 조금 둔해서 제대로 원하는 그림이 나올지 걱정이 된다
이제와서 바꿀 수는 없겠지만, 오늘 모델이 입을 메인 컬러와 순식간에 머리에서 매치해본다
카메라가 켜진 채 세트의 영상을 모니터로 보내고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 듯,
최종 동선을 점검하려 세트 위에 서서 오락가락하는 스태프들이 화면에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한다
라헬은 마치 스태프들이 투명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그저 머릿속에 그려낸 모델을 화면의 배경 위에 세워본다
음.. 역시 색감을 조명으로 조금 날려달라고 하는 게 좋으려나.
고민하면서 무심하게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던 라헬의 눈동자가 콘티와 모니터 사이를 바삐 오가다가 일순 멈춘다
제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믿을 수 없다는 듯 큰 눈이 더 커진다
카메라를 인지하지 못한 듯이 끼어든 남자의 얼굴이 화면에 가득 찬다
푹 눌러쓴 모자 챙에 깊게 그늘진 얼굴은 겨우 콧날과 입만 제대로 보일 뿐이지만,
각진 턱선과 무전기에 대고 뭐라 지시하고 있는 입매는 분명 낯익은 것이다
한참을 뚫어져라 모니터를 보고 있던 라헬은 낮은 목소리로 선욱을 부른다
"팀에 사람 새로 들였어?"
"누구? 아아.. 우감독?"
라헬의 말에 모니터를 바라본 선욱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선욱의 촬영팀을 만난 적은 여러번이다
그러니 오늘도 현장에 들어서자부터 익숙한 스태프들이 자신을 알아본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 한번도 저 낯익은 얼굴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대체,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알아야겠다
"누구야?"
의외로 절박하게 대답을 기다리는 라헬의 기세에 선욱은 조금 놀라 갸우뚱한다
"아는 사람이야?"
"... 아니."
라헬은 어설프게 얼버무린다
"메인 브랜드 광고는 비밀 엄수인 거 몰라? 외부 사람 막 들이고 그러면 계약 위반 아니야?"
"야아, 뭐 그정도까지"
넉살좋게 넘어가려고 하던 선욱은 노려보는 라헬을 깨닫고 머뭇한다
"오늘 조감독 빠져서 대타 썼어, 영화하는 친군데 괜찮아 센스도 있고. 비밀 유지는 걱정말아, 그정도는 믿을만한 친구니까"
"... 어떻게 알게 된 사람인데"
"영화판이 다 거기서 돌고 돌잖아, 건너건너 알게 됐지 뭐."
"... 이름은."
"우감독? 어 그러게, 우감독 이름이 뭐지?"
대체 이름을 부르고 있으면서 이름이 뭐지, 라고 하는 건 무슨 소린가 싶어 라헬은 팔짱을 끼고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린다
선욱은 아랑곳 않고 저 혼자 고개를 갸우뚱한다
"... 우감독이 이름 아니야?"
"아, 그건 별명. 아니 크레딧 이름이라고 해야하나. 하여간 작업할 때 쓰는 이름.
부르기 편해서 우감독 우감독 하다보니 정작 진짜 이름을 못 들었네"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라헬은 못마땅한 듯 고개를 돌려버린다
모니터를 채우고 있던 얼굴이 볼일이 끝났는지 뭔가 무전기에 대고 한번 더 지시한 뒤 휙 하고 사라진다
라헬은 저도 모르게 눈을 들어 모니터에서 사라진 모자의 뒷모습을 좇는다
미심쩍게 라헬을 바라보던 선욱이 슬쩍 입맛을 다시더니 묻는다
"왜? 궁금해? 물어봐줘?"
선욱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세트 뒤쪽으로 돌아들어가는 모자를 눈으로 확인한 라헬은
여전히 그 뒷모습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딱딱하게 대답한다
"아니, 필요없어"
알 것 같거든.
그 이름.
=
휴우.
삐빅거리는 무전기로 오가는 대화를 건성으로 흘려들으며 손가락 사이에 들고 있는 담배를 급하게 물었다가 연기를 길게 뱉어낸다
갑작스런 콘티 변경에 조명 재설치까지 광고주 측 담당자가 도착했다는 말이 떨어진 직후 벌어진 사항을
촬영 예정 시간에 맞춰 단시간 내 조정해내느라 세트장 위를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모른다
막 첫번째 컷 촬영이 들어간 후에야 몰래 촬영장을 잠시 빠져나왔다
조감독이 자리를 비우다니, 문제가 터진다면 분명 말이 나오겠지만
촬영장에서 겨우 2분 거리의 문 밖에서 담배 한대 태우고 들어가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현장을 비운 것에 마음이 영 편하지는 않아서 급하게 담배 연기를 빨아들인다
아직 채 절반밖에 타지 않은 담배를 마지막으로 쪽,하고 피운 뒤 뒤쪽에 놓인 재털이통으로 돌아서서 비벼끈다
아깝지만 뭐.
남은 담배를 보며 쩝, 하고 아쉬워하는데
뒤쪽에서 끼익,하고 무거운 철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촬영이 한창일 시간에 겁도 없이 자리를 비운 스태프가 저말고 또 누가 있나 싶어서 천천히 돌아서다가
문을 가로막고 선 인물을 확인하고 멈칫 한다
무표정하게 저를 노려보고 있는 그녀는 이미 다 알아버린 듯 보여서
순간 머릿속을 스친, 모르는 척 지나갈까,하는 생각을 이내 단념한다
한참 모자에 가려진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는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빠르게 다가온다
그리고는 피할 틈도 없이 단번에 손을 뻗어 모자를 벗겨버린다
탁,
하고 모자가 바닥에 떨어진다
당황한 눈동자가 이글거리는 눈을 마주하고는 잠시 흔들리다가 이내, 차분해진다
그리고는 굳어있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금새 태연한 웃음을 짓는다
"유라헬, 잘 지냈어?"
마치 어제 만났던 것처럼 능청스러운 태도에 겨우 눌러참는 듯 꼭 쥐고 있던 라헬의 두 손이 파르르 떨린다
"... 할 말이.. 그것뿐이예요, 선배는?"
"뭐야, 다시 선배야? 우리 졸업한지도 벌써 꽤 지났는데, 다른 말도 있잖아 효신 오빠. 라던가"
싱긋 웃으며 다가온 효신이 살짝 라헬의 머리를 톡톡,하고 쓰다듬는다
"반갑다, 이렇게도 만나네"
겨우겨우 참고 있던 감정이 울컥하고 올라온다
제가 어떻게 지나왔는지도 모르는 시간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듯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효신이 밉고
그럼에도 단번에 효신을 알아본 자신이 믿을 수 없이 싫다
입술을 꼭 깨문 라헬은 탁, 하고 제 머리 위 효신의 손을 쳐낸다
분노한 듯 이글거리는 눈으로 올려다보는 라헬을 마주하고
효신은 그제야 놀랐다는 듯 엄마야,하고 조금 과장되게 물러선다
"미안, 싫었어?"
싫었냐고? 싫었냐고 물은 거야 지금?
너무 뒤늦은 질문에 화가 결국 폭발해버린다
짝 -
번쩍하고 효신의 눈 앞에 불꽃이 튄다
라헬의 오른손이 벌처럼 날아올라 효신의 왼뺨을 강타하고 그 반동으로 효신의 얼굴이 완전히 반대쪽으로 돌아간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든다
아니 정신이 나가버린다
효신은 얼얼한 뺨을 문지르면서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너.."
뭐라 말을 하려다가 라헬의 얼굴을 보고 멈칫 한다
딱딱하게 굳은 채 라헬은 화를 참을 수 없는 듯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에 눈만은 붉게 충혈되어 있다
오래 전 그 어느 날처럼 그 얼굴이 마치 금새라도 울 것 같아서 효신은 차마 더 말을 하지 못한다
마치 숨조차 쉬지 않는 것처럼 소리 없이 그대로 올려다보기만 하던 라헬은 입술을 한번 깨물고는
지독하게 차가워서 금새라도 심장이 베일 것 같은 목소리로 말한다
"... 죽어버려요"
냉정한 말에 효신이 대답을 머뭇거리는 새 한 발 뒤로 물러선 라헬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돌아서서
또각거리는 소리만 남긴 채 단번에 촬영장으로 돌아가버린다
철컹.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효신은 비로소 정신을 차린다
... 여전하네 유라헬 성격은.
도대체 얼마만에 만난 건지,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무섭고도 반가웠다는 걸.
라헬은 알고 있을까.
아직도 얼얼한 것 같은 뺨을 다시 한번 가만히 쓰다듬는다
낯선 손길의 끝에 코끝을 스치고 지나간 낯익은 향기를 깨닫는다
저도 모르게 살며시 미소가 떠오른다
죽어버려요. 라고 저주하는 차가운 목소리와 익숙한 따스한 향기.
가만히 좀전의 상황을 곱씹다가 슬며시 고개를 숙이고 쿡쿡,거리며 웃는다
크게 소리내지 못하고 얼마나 웃었을까,
결국 무전기에서 제 이름이 등장하고 만다
"우감독! 너 어디야! 자꾸 날로 먹을래? 어?!"
"네, 지금 갑니다"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바닥에 떨어진 모자를 주워 대강 눌러쓴다
그리고 힘차게 철문을 연다
조금 전 라헬이 들어갔던 그 세계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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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ie! 냔의 글을 너무너무 재미있게 읽다가... 결국 나도, 응답했어!
사실 쓰던건 마무리하고 쓰려고 했는데, 그쪽이 약간 시간이 걸려서 먼저 떠오른 이 이야기부터..
본편에서 나왔던 김탄의 상상 따위 무시. 이건 18세 라헬과 19세 효신이 마지막으로 헤어진 이후부터 시작된 이야기..
효신 선배의 취향대로 치정이 될지 멜로가 될지 로코가 될지는 아직 미정... ㅋ
이것도 재미나게 읽어주었으면~ 읽어주는 냔들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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