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in-paris







"Day before yesterday I saw a rabbit, and yesterday a deer, and today, you." 





"Shout to all my lost boys shout to all my boys We rowdy" 


자동 문이 열리고 쿵쾅거리는 시끄러운 음악이 울려퍼지고 있는 공간으로 들어선다 
아직 붐비기 전의 비교적 조용했던 거리에 익숙해있다 갑작스럽게 큰 소리가 덮쳐오자 
이미 한 발 내딛었던 걸음을 저도 모르게 도로 빼려다 바로 따라들어오던 발에 걸린다 
어, 하고 휘청, 균형을 잃고 무게중심이 뒤로 넘어간다고 느낀 순간 
이미 반쯤 뒤로 넘어갔던 어깨가 보드라운 침대에 닿은 양 자연스럽게 통,하고 튕기듯 제자리로 돌아온다 


"괜찮아?" 


뒤쪽에서 들리는 조금 놀란 목소리에 붉어지려는 뺨을 감추려고 번쩍 고개를 치켜들고 뒤 대신 앞을 바라본다 
아직 한가한 매장에 울리고 있는 쿵쿵쿵 하고 심장마저 흔드는 비트의 음악에 괜히 눈살을 찌푸린다 
이렇게 요란한 음악이라니 앞으로는 매장의 음악 선곡에도 관여해야겠어.라고 마음 속으로 엉뚱한 핑계를 댄다 


괜한 트집이다 
평소 라헬이 간혹 매장 조사 차 들렀을 때와 달리 오늘은 아침부터 매장에 드문드문 꽤 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이정도 규모의 고객이 움직이고 있다면 막 개장한 아침이라고 해도 유동성을 높이기 위해 빠른 음악을 트는 게 맞다 
계산대 옆 가장 목이 좋은 한쪽 코너에만 유독 몰려있는 사람들을 보고 의아해할 찰나 
금요일인 어제부터 디자이너 콜라보 상품 판매가 시작되었다는 걸 기억해낸다 
콜라보를 추진했던 디자이너는 라헬도 꽤 힘을 실었던 인물이었고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샘플도 꽤 마음에 들었던지라 
고객들에게 반응이 나쁘지 않은 것을 확인하자 라헬은 속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우쭐해진 마음을 감추느라 
더 새침한 표정으로 무심하게 매장을 슥 둘러본다 

매장 안 쪽 계산대에서 막 개장한 매장의 준비를 마무리하고 있던 매니저와 눈이 마주친다 
라헬을 알아보고 놀란 표정으로 다가오려고 하는 걸 작게 손짓해서 저지한다 
제가 누군지 이런 사적인 시간에까지 괜히 한 번 더 각인하고 싶진 않다 
효신에게 각인시키고 싶지도 않고. 


"이거 어때?" 


잠깐 잊었던 목소리에 돌아본다 
어느새 집어들었는지 치렁치렁한 밑단이 레이스마냥 무릎 아래 길이로 늘어진 흰 니트 원피스를 들어보인다 
활동하기 편한 옷을 입어야한다고 굳이 데려왔으면서 저런 옷을 집어드는 건 무슨 생각인가 싶어 
황당함을 감추지 않고 하, 헛웃음을 내뱉자 그제야 농담인 것을 들켰구나 하는 표정으로 싱긋 웃는다 


"별로?" 
"당연하죠." 


진저리치기 직전의 표정으로 잔뜩 경계하는 목소리에 효신은 순순히 원피스를 내려놓는다 


"그럼..." 


또다시 다음 타겟을 찾아 매장을 배회하기 시작한 시선이 한 곳을 포착하고 
바로 그 옷걸이에 걸린 옷을 집어들려고 하는 걸 본 라헬이 다급하게 
전면에 큰 호랑이 프린트가 되어 있고 곳곳에 화려한 스팽글이 박혀있는 티셔츠를 먼저 낚아챈다 


"가만히 있어요 아무것도 손대지 말고" 
"응?" 


도저히 말을 유하게 거를 수가 없다 
영화도 예술인데 어쩜 이런 끔찍한 미적 감각을 지녔는지 
아니 깔끔하게 떨어지는 본인의 옷을 보면 지금 저를 놀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이 순간에마저 


"영화는 선배가 전문가인지 몰라도 여긴 내 영역이예요. 아무것도 건드리지 말아요" 


절대로 내어줄 수 없다는 듯 효신의 시선이 닿았던 티셔츠를 끌어안고 으르렁에 가까운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는다 
효신은 작게 어깨를 으쓱하더니 웃음기가 보일 듯 말 듯한 태연한 표정으로 뒤로 한 발 물러선다 
여전히 효신을 경계하면서 들고 있던 티셔츠를 제자리에 걸어놓은 라헬은 틈을 주지 않고 재빨리 
마치 눈에 띄는 대로 마구 집어드는 것처럼 탁, 탁, 탁 하고 옷걸이들을 꺼내든다 


"잠시만요" 


너무 빠른 손놀림에 감탄할 새도 없이 라헬은 안고 있던 옷들을 들고 탈의실로 사라진다 
남겨진 효신은 무료한 듯 몇 개의 옷걸이를 건드려 흔들어 놓다가 
달랑거리는 구슬이 달린 머리끈과 운동화 같은 밑창이 대어진 낮은 구두를 무심히 들어보고는 
뭔가를 가늠하고 도로 내려놓기를 반복한다 

처음에는 고막을 찢을 것처럼 크게 울리던 음악이 아무렇지 않게 느껴질만큼 꽤 긴 시간이 흘렀다 생각할 때쯤 
또각거리는 익숙한 구두소리가 시끄러운 소음 사이로 또렷이 들린다 


화이트진에 단순한 기학적 무늬가 들어간 흰 티셔츠를 받쳐입고 
효신이 입고 있는 셔츠와 톤이 비슷한 하늘빛의 블루종을 입고 나타난 라헬은 
아무렇게나 고르는 것 같아도 아니었구나,하고 감탄하는 효신의 눈빛을 못 느낀 척 
묘하게 새침한 표정으로 효신을 지나쳐 거울 앞에 선다 


어색하다. 


라헬은 거울에 비친 모습을 낯설게 바라본다 
거울 속의 그녀도 영 어색한 듯 어정정한 표정으로 건너본다 

이런 옷은 평생 한번도 입어보지 않았다 
매 시즌 모델에 피팅한 신제품을 수도 없이 살폈고, 디자인 결정에도 꽤 어릴 적부터 참여했으니 
이 디자인이 어떤 패턴이고 왜 이 컬러로 했고 어느 부분을 집어서 포인트를 줬는지 망설임없이 설명할 수 있지만 
정작 자신이 만들고 결정해왔던 그 옷들을 실생활에서 입어본 적은 없었다 
특히나 이렇게 캐주얼한 라인의 옷은 애초에 취향이 아닌지라 하이엔드 라인업 제품은 간혹 하곤 했던 샘플 착장도 해본 적 없다 
영 익숙하지 않은 감촉과 라인에 저도 모르게 이리저리 천천히 몸을 돌려 옷태를 살피다가 
거울 속에 비친 제 뒤에서 하는 양을 보고 있던 효신과 눈이 마주친다 


"마음에 들어?" 
"..어떤데요?" 
"난 괜찮은 것 같은데, 어울려 그런 옷도" 


효신의 대답에도 미심쩍은 표정으로 이리저리 반쯤 몸을 돌려 뒷매무새를 한번 더 확인한 라헬은 
여전히 불만족스럽게 고개를 까딱 한다 


"그럼 이걸로 할게요" 


어느새 곁에서 입고 왔던 옷을 한쪽 팔에 걸고 기다리고 있던 매니저에게 간단히 끄덕해보이자 
뒤로 물러서있던 효신이 그제야 점퍼 안주머니의 지갑을 꺼내려 손을 집어넣는다 
라헬은 거울에 보이는 효신을 보고 마음에 들지 않는 듯이 눈을 찌푸린다 


"됐어요," 
"응?" 
"회사 비용으로 처리하면 되요. 제품 시험 착장으로" 


그런 게 있었나 하고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매니저의 얼굴이 거울 끝에 잡히지만 
못 본 척 뻔뻔하게 괜히 소매 끝을 잡아당겨 날을 세운다 
지금까지 없었으면 이제부터 있는 걸로 하면 그만이다 
이럴 때 쓰라고 권력을 갖고 기꺼이 그 무게를 짊어져온 것 아닌가 말이다 

속으로 스스로 설득하는 말이 얼마나 어이없는 줄 알면서도 그저 그걸로 납득해버린다 
불편한 표정으로 여전히 한 손은 안주머니에 넣은 채 지갑을 만지작거리던 효신은 
무심하게 옷태를 살피고 있는 라헬에게 한 발 다가선다 


"그래도, 내가 사주려고 한 건데" 
"됐다니까요" 


라헬은 살짝 몸을 기울여 다가온 효신에게 속삭인다 


"그냥 입어도 되는 걸 뭐하러 돈을 써요" 
".... 정말 그래도 되는 거야?" 


의아하게 묻는 효신에게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여보인다 

그래도 될 리가 없다 
이미 한번 입었던 옷을 손님에게 다시 내놓는 일 같은 건 자존심의 문제다 
그렇지만 효신에게 부담을 지우는 일도 하고 싶지 않으니 눈에 보이는 거짓말이라도 믿을 수 밖에 없도록 뻔뻔해질밖에 

효신은 미심쩍은 듯 눈을 가늘게 뜨더니 라헬 옆에서 옷매무새를 잡아주고있던 매니저에게 시선을 돌린다 


"그래도 되는 건가요?" 


갑작스런 질문에 안 그래도 까칠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라헬이 아침부터 무슨 일로 들렀을까 짐작이 되지 않아서 
안절부절 못하는 기색을 감추려고 내내 긴장하고 서있던 매니저의 표정이 뜨끔 놀란다 
라헬이 효신은 보지 못하게 얼른 눈치를 주자 매니저는 그제야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네, 직원분들께는 근무 시 혜택으로 제공되고 있습니다" 


피차간에 말을 맞춘 적은 없건만 제가 생각했던 것과 똑같은 변명에 라헬은 조금 안도한다 
여전히 찜찜한 표정으로 효신은 아쉬운 듯 지갑을 꺼내려고 점퍼 안쪽에 집어넣었던 손을 내린다 

옷에 붙은 가격표를 조심스럽게 떼어내는 점원에게 몸을 맡기고 선 라헬을 멋쩍게 보고있던 효신의 시선은 
비교적 캐주얼한 옷차림에 어울리지 않는 홀로 우아하게 조금씩 방향을 틀고 있는 하이힐에 가 닿는다 
가늠하듯 눈을 살짝 뜨고 구두를 바라보던 효신은 이내 휙,하고 매장을 둘러보더니 
조용히 매장 한쪽으로 걸어가 꽤나 붐비는 매대 사이에서 뭔가 집어들어든다 

막 가격표를 모두 떼어낸 라헬은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다 
등 뒤로 손을 감춘 어색한 자세로 돌아온 효신을 발견하고 한쪽 눈살을 찌푸린다 


"... 뭐.. 뭐예요" 


뒷짐진 채 성큼 걸어온 효신에 라헬은 움찔한다 
아랑곳하지 않고 효신은 라헬 앞에 한 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그제야 감춘 손에 쥐고 있던 빨간 플랫슈즈 한 켤레를 얌전히 내려놓는다 

보통 한 디자이너에게 토탈 코디네이션을 의뢰하는 콜라보 프로젝트에서 유일하게 별도로 진행했던 품목이었다 
봄에 맞춰서 키치적이고 소녀풍의 디자인이 특징인 이번 콜라보 프로젝트의 디자이너를 선정한 뒤 
슈즈 라인만은 따로 섭외를 해서 진행했더랬다 
디자이너가 슈즈 라인은 자신이 없다고 했던 탓도 있고, 
평소 그 디자이너의 구두는 현실에서 신기 어려운 고스 풍에 가까운 통굽이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 
슈즈 라인을 빼고 진행할 것인지 별도로 의뢰를 할 것인지를 놓고 결정만 기다리고 있던 때 
초안으로 보내온 소녀 풍의 디자인들을 보는 순간 한 플랫 슈즈 브랜드를 떠올렸다 
원래 발레리나 슈즈 라인으로 출발했다는 그 플랫슈즈들은 우아하고 소녀다웠다 
그래서 라헬은 평소 자신이 혼자 사무실에 있거나 운전할 때 신기 위해 상비해두긴 했지만 
그런 아기자기하고 상냥한 느낌의 구두를 신는다는 것이 어쩐지 제 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것 같아서 
대외적으로는 늘 사람 하나쯤 밟아죽일 수 있을 것 같은 킬힐만 신곤 했다 
그래서 좋아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 콜라보 대상으로 추천은 하되 되도록 자신은 연관되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리고 조금 전 이 매장에 들어서기 전까지 콜라보 제품이 판매되기 시작했다는 걸 잊어버렸듯이 
이 구두에 대해서도 잊어버렸다 

그랬는데. 


제 앞에 놓인 그 빨간 구두가 잊고 있던 불길한 기억이라도 일깨운 것처럼 저도 모르게 반쯤 한 발을 뒤로 뺀다 


"이건 내가 선물하고 싶은데" 


가지런히 구두를 내려놓은 효신이 고개를 들고 라헬을 올려다본다 
채 다 물러서기 전에 그 눈과 마주친 라헬은 더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버린다 


"뭐든, 하나는 하게 해줘" 


대답없이 큰 눈만 도르륵 굴리면서 딱딱하게 서 있던 라헬은 
동의를 구하듯 싱긋 웃는 미소에 홀린 듯 작게 고개를 끄덕한다 
그제야 효신은 라헬의 가느다란 발목을 감싸고 있던 힐의 스트랩에 조심스럽게 손을 뻗는다 
살며시 닿는 손끝에 라헬은 발을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고 그저 주사바늘이라도 참는 듯 움찔한다 
효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스트랩을 풀고 한 손으로 라헬의 발목을 받치듯 들어올린다 
자연스럽게 라헬은 하이힐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와 살포시 빨간 구두에 내려앉는다 

갑작스럽게 아주 잠시 전까지 보던 시선에서 10cm는 족히 낮아진 풍경에 어리둥절한 기분이 든다 
어색하게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던 라헬은 그제야 부스스 일어선 효신과 눈이 마주친다 
묘하게 웃음을 참고 있는 듯 입매가 올라가다 말고 굳은 표정이 라헬과 눈이 마주치자 파르르 입꼬리가 흔들린다 


"왜요? 뭐가 그렇게 우스워요?" 
"아니, 그냥" 


꼭 비웃는 것처럼 보이는 부자연스러운 표정에 잔뜩 날이 곤두선 어조로 시비걸듯 묻지만 
이미 웃음기가 감돌기 시작한 얼굴은 감출 수가 없다 
불만스럽게 거울 너머로 버럭,할 기세로 째려보자 그제야 손을 휘휘, 내젓는다 


"그게 사실은," 
"사실은 뭐요" 
"... 원래, 생각보다 아담했구나 유라헬" 


효신은 손으로 제 어깨에 닿을까 말까한 라헬의 키를 재는 시늉을 한다 
꽤나 기분이 나빠도 무방하리라 생각되는 손짓에 그제야 거울에서 시선을 볼려 째릿,하고 날카롭게 노려보지만 
아까보다 한참 아래로 내려가버린 위치 탓에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다 


"진짜..! 선배 자꾸 그럴 거예요?" 
"으음...대체 구두가 얼마나 높았던거야? 그런 걸 신고 걸어다닐 수 있다니 대단한데" 


본격적으로 키를 가늠해보려는 듯 효신이 성큼, 라헬의 앞으로 다가선다 
물러설 타이밍을 놓친 라헬은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린다 
휙,휙 하고 제 머리 위로 큰 손이 지나가는 공기의 흐름이 느껴진다 


"발 상해, 높은 거 자주 신지마" 
"... 선배가 패션을 알아요?" 


다정한 목소리에 라헬은 불만스러운 듯 고개를 떨군다 
사실은 너무 가까이 효신이 다가서는 바람에 시야가 온통 효신의 몸으로 가려지는 통에 
조금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한 걸 감추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반작용이다 


"어른이 말하는 거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단 말 몰라?" 


우씨, 누가 누구더러 어른이래. 


발끈해서 휙 고개를 들어올리자 빙글빙글 웃고 있던 효신과 눈이 마주친다 
그 눈빛에 저도 모르게 기세가 한 풀 꺾인다 
멈칫,하는 라헬이 사랑스러운 듯 효신은 라헬의 머리를 토닥토닥한다 


"예쁘다" 


무방비 상태에서 들린 말에 라헬의 뺨이 확 붉어진다 
그 얼굴을 본 효신의 미소가 더 커진다 


"선배, 진짜 이러기예요?" 


저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본 라헬은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매니저의 얼굴을 확인하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효신에게 작게 으르렁거린다 
효신은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린 건지 아무렇지도 않게 싱글싱글 웃으며 태연하게 지갑을 꺼낸다 


"응, 진짜 내가 사줄건데?" 
"... 그 말이 아니잖아요 지금" 
"그래? 그럼 뭔데?" 


빤히 다 알고 있으면서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싱글거리는 저 표정 좀 보라지 
차라리 얼른 나가는 게 낫겠다 싶어서 얼른 효신의 등을 두 손으로 민다 


"얼른 계산해요 얼른" 


이젠 정말, 오늘 또 무슨 일이 생길지는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겨우 여기 오려고 그 소동을 피운 거예요?" 
"마지막으로 와 본 게 언젠데" 
"... 놀이공원 따위..." 


라헬은 대답을 완성하지 못한다 
채 맺지 못한 말이 공중에 흩어지는 걸 들으며 효신은 아무렇지 않게 한 번 웃는다 


이런 곳은 보통 아빠나 엄마, 그도 아니면 연인이나 친구, 그런 사람들과 함께 오는 곳, 이라고 했다 
TV 속에서도 그랬고 누군가를 통해 들을 때도 그랬다 
그리고 그런 정의의 관계들은 라헬과는 오랫동안 연관이 없었다 

그러니 이런 곳, 와 본 적 없다 
시시하다,고 생각했다, 늘 
그렇게 생각하고 쭉 무시해왔다 
이런 곳에 다니는 사람들과 마음 한 켠에서 가고 싶어,라고 말하는 스스로를. 


"생각보다 즐겁지 않아?" 


멀리 아래로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며 효신이 무심히 묻는다 
라헬은 무심코 시간을 확인한다 

어느새 오후 여섯시 즈음. 

벌써 일곱시간 째 이곳에 머물고 있다 
끝까지 행선지를 밝히지 않았던 효신은 역시나 이 놀이공원의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에도 막무가내로 라헬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롤러코스터부터 이곳에 있는 모든 놀이기구를 섭렵할 기세인 효신의 손에 이끌려 
내키지 않는 듯 시시해서 죽을 것 같다는 표정으로 탑승했지만 
TV 속에 나오는 장면을 보면서 시시할거야 분명, 저런게 뭐가 재미있다고. 했던 온갖 놀이기구들이 사실은, 조금, 즐거웠다 

왜냐면 그건 아마도, 


당신과 함께니까. 


그 말은 하지 않는다 
대신 조금 심술궂게 웃는다 


"재미있었어요 선배 표정이" 


처음 와보는 놀이공원이었지만 의외로 강심장이었던지 그 어떤 놀이기구도 망설임 없이 타는 라헬과 달리 
효신은 이내 창백하게 얼굴이 질리곤 했다 
꺄악,하고 비명을 내지르는 건 둘 다 마찬가지였지만 
라헬의 비명이 '즐거워!'에 가까웠다면 효신의 것은 분명 생존의 절규였다 


"아아, 난 그런 건 영 약하니까. 유라헬, 역시 그릇이 달라" 


효신은 아무렇지 않게 싱긋 웃는다 
금새 인정해버리자 어쩐지 김이 샌다 
그런 적이 없다던가, 오늘만 그렇다던가 하고 변명이라도 해야 재미있는 건데. 

저도 모르게 뾰롱통해진 라헬은 퉁명스럽게 묻는다 


"그러면서 여긴 왜 오자고 한 건데요" 
"보여줄게 있어" 
"그러니까 대체 그게 뭔데요" 
"조금만 기다려봐" 


효신은 느긋하게 길게 벤치에 기댄다 
라헬은 못마땅하게 효신을 보다 포기한 듯 역시 벤치에 등을 기댄다 

저 멀리 놀이공원의 놀이기구들 너머로 보이는 호수를 낀 하늘이 아직 파랗다 
약간 높은 지대에 위치한 벤치라 놀이공원의 꽤 많은 부분이 시야에 들어온다 
어디선가 꺄악하는 비명소리가 들린다 
일부러 여기까지 올라오는 사람은 둘 뿐인지 사람이 꽤 북적였던 아래쪽과 달리 다른 공간인 양 한가롭다 
살랑 불러온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을 귀찮은 듯 뒤로 넘긴다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은 채 벤치에 기대있는 효신을 힐끔 본다 

대체 무슨 생각일까 

내내 속시원히 말해주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오늘만이 아니다 
라헬은 문득 자신이 효신의 입으로 직접 들은 이야기는 거의 없다는 걸 깨닫는다 
늘 알 수 없는 얼굴로 라헬이 하자는대로 따라왔다 
라헬의 질문에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표정뿐인 느긋한 저 얼굴 뒤에 무슨 생각이 숨겨져 있는지 짐작할 수 없다 


".. 선배" 
"응?" 


내내 함께 있었는데도 갑자기 훅,하고 사라질 것만 같은 느낌에 효신을 부른다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제 쪽을 향하는 얼굴을 마주하자 하려던 말을 잃어버린다 
머뭇거리던 라헬은 대신 다른 말을 꺼낸다 


"... 저거 다시 타고 싶어요" 


라헬이 가리키는 쪽을 본 효신은 좀전의 기억을 떠올린 듯 창백해진다 
아마도 효신이 가장 괴로워했을, 2백미터 던가의 상공에서 수직하강을 자랑거리로 내세운 놀이기구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라헬은 만족스럽게 웃는다 
이런 반응의 효신은 자신이 확인한 대로, 예측한대로여서, 겨우 손에 잡히는 존재 같다 

희미하게 번지는 라헬의 웃음을 본 효신의 굳은 얼굴은 조금 풀렸다가 짐짓 심각해진다 


"그렇게 웃어도 안 타줄건데?" 
".. 내가 웃었어요?" 
"응, 엄청 예쁘게." 


고개를 끄덕,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이 장면이 낯설지가 않다 
라헬은 갑자기 소환된 먼 기억에 멈춰버린다 


".. 어쩜 선배는 그대로예요" 


중얼,하는 라헬의 말에 그제야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알아차린 듯 효신도 멈칫 한다 
어째서인지 예전의 기억같은 건 내내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다 
계속해서 눈 앞의 현재에만 집중하려고 해왔다 

의식하지 못한 채 그래왔지만, 
지금 갑작스럽게 소환된 한 때의 순간에 
둘 사이에 계속 애써 외면했던 위화감이 덮쳐온다 


"...." 


다음 말을 어떻게 이어가야할지 몰라 망설이는 새 침묵이 길게 흐른다 
어색한 공기가 둘 사이를 더 멀리 갈라놓으려는 찰나 효신의 전화가 울린다 
번호를 확인한 효신의 표정이 조금 굳는다 


"...누군데요" 


어색함을 깰 기회라고 생각한 라헬이 전화를 받지 않고 머뭇거리는 효신에게 묻는다 


"아아.. 차 주인," 


이상할 정도로 한참을 망설이던 효신은 
첫번째 전화가 끊어지고 두번째로 다시 울리기 시작할 때에야 비로소 석연치 않게 대답한다 
효신이 머뭇거리는 이유가, 차주인과 뭔가 차를 빌리는 과정에서 일이 있었거나 
아니면 차를 이제 와서 돌려달라고 하기라도 하는 건가, 하고 짐작한다 
라헬은 마침 울리기 시작한 제 휴대폰의 발신자를 확인한 뒤 짧게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받으세요 저도 전화" 


손짓으로 동시에 울리고 있는 두 대의 휴대폰을 재빨리 가리키자 효신이 고개를 끄덕한다 
라헬은 빠른 걸음으로 벤치에서 걸어나와 거리를 두고 떨어진 후에야 통화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통화가 연결되기 전 미리 송화기 부분을 귀에서 조금 뗀다 


"유라헬!" 


아니나다를까 쩌렁쩌렁한 고함소리가 분명 안전거리를 확보했는데도 고막을 뒤흔든다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전화기를 멀리 떼어내고 만다 

일단 소리부터 지르는 걸 보면 그동안의 패턴으로 볼 때 이건 분명 남자 문제다 
이정도로 다짜고짜 제 이름을 신경질적으로 외쳤던 건 지난번 성산 그룹 둘째 망나니를 한시간 내내 쏘아붙여 돌려보낸 후 처음이다 

라헬은 살짝 눈살을 찌푸린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짐작가는 일이 없다 
요즘은 선을 보러나가기는 커녕 개인적인 용무를 보기 위한 시간조차 내기 어려울 정도로 바빴다 
게다가 늘 에스더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루머의 온상, 클럽에서의 만남 같은 건 시도도 할 수 없었다 
지난 몇 달 얌전히 숨죽이고 살아드렸건만 이렇게 화를 내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네, 엄마. 말씀하세요" 


이번엔 무슨 일인가 싶어서 일단 차분하게 대답한다 
설마 그새 회사에 무슨 일이 생기거나 제가 처리했던 일 중에 문제가 생긴 건가,하고 
라헬은 재빨리 머릿속으로 최근의 업무 일지를 뒤적여본다 


"이번엔 또 누구야?" 
"에?" 
"아주 당당하게 데리고 다녔다면서. 이번에도 아무것도 아니니? 그냥 소문이야?" 


라헬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추궁하는 에스더의 말에 당황한다 
대체 누굴 당당하게 데리고 다녔다는 걸까 
물론 자신이야 언제나 당당하게, 소문 날테면 나보라는 식으로 다니긴 했지만 지난 몇 달 간은 정말 바빴다 
에스더가 들이미는 온갖 선도 핑계가 아니라 정말 바빠서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겨우 여유 시간이 생기면 효신을 만나느라 .. 


거기까지 생각한 라헬은 그제야 아!하고 짧은 탄식을 내뱉는다 


"성영 그룹 셋째랑, 대산그룹 맏이 선 자리는 그렇게 바빠서 도저히 못 나간다더니 남자 만나고 다닐 시간은 있었어?" 
"엄마, 그건" 
"너 엄마가 몰라서 가만히 있는다고 생각하나본데, 다 듣고 있어 
 매번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서 내가 너 믿어주고 있는 거니까 엄마 실망시키지마. 
 그 많은 명문가, 재벌가 자제들 다 마다하고 만나는 거니 어지간한 사람 아니면 절대 허락 못해." 


다다다 쏘아붙이는 에스더의 말을 듣고있던 라헬은 자연스레 시야 한켠에 걸리는 효신을 힐끔 본다 
에스더가 어떻게 효신의 존재를 알았는지, 그리고 효신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보다 
오히려 수화기에 귀를 대고 그저 듣기만 하는 듯 딱딱하게 굳은 효신이 지금 누구와 통화를 하는 건지 궁금해진다 


"너어, 설마 무슨 경호원이랑 사귀겠느니 아니 회사원이랑 만나느니 이딴 소리 할거면 말도 꺼내지 마. 당장 접어." 


으름장을 놓는 에스더의 말에 라헬은 냉소적으로 소리내지 않고 웃는다 


지금 누구랑 같이 있는 줄 알면 기절하시겠네. 
명예로운 법조가문의 black sheep,은 용납할 수 있는 수준일까 아닐까 
가문의 명예로야 뒤지지 않을테지만 망나니 짓도 엄마 기준에서는 지금껏 들이댄 재벌가 망나니들에 비할 바는 아닌데 


"그런 거 아니예요" 
"그런 거 아니야? 확실해? 너 일하는데 남자 데려온 적은 한번도 없었잖아. 이번에도 믿어도 되는거야?" 


아침의 RS Blue를 들렀던 간단한 소동이 일하는 곳에 남자를 데려온 딸.라는 커다란 의미로 둔갑할줄이야 
라헬은 채 생각하지 못했던 엄마의 상상력에 쯧,하고 못마땅하게 혀를 찬다 


"그런 사이 아니예요 그냥" 
"그냥 뭐" 
"그냥" 


라헬은 멈칫한다 
제가 하려던 대답이 뭐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뭐라고 하려고 했던 걸까 
친구? 선배? 그냥 아는 사람? 도와주는 사람? 

막 혀 끝까지 맺혔던 단어를 하나씩 짐작해본다 
음성을 덧씌우기만 하면 되었던 그 말이 어느새 흩어져버린 것인지 어느 쪽이건 음절조차 낯설게 느껴진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던 그 말을 무엇이 멈추게 했을까 
머리 속이 새하얗게 텅 비어버린다 
라헬은 몇번인가 소리를 내보려고 머뭇거리다가 막막하게 효신 쪽을 돌아본다 

여전히 통화 중인 효신의 얼굴에 저와 함께 있던 조금 전까지의 해사했던 미소는 찾을 수 없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심하게 찌푸린 얼굴은 전에 보지 못했던 그늘을 드리운다 


낯설다. 


라헬은 문득 한기가 덮친 것처럼 바르르 떤다 


몸에 배인 정갈하고 단정한 자세의, 
모두의 선배이자 리더로서의 당당함을 타고난, 
아는 건 많을 수록 좋다던, 세계의 모르는 일이 없던, 
그리하여 언제나 자신을 앞질러 알던, 
상냥한 목소리로 부끄럽지 않게 손을 내밀던, 
부드러운 미소가 떠나지 않는 얼굴은 곧 신뢰의 상징이었던, 
그러면서도 가끔은 냉소적이고 날카로운 농담으로 정곡을 찔러 웃게 했던 
능숙하고 어른스러운, 

이효신. 

유라헬이 알고 있던 이효신은 
자신의 선배이자 학생회장이자 멘토인, 
세계의 일부분은 어쩌면 그로 인해 형성되었을 

그 이효신. 



그러나, 

단 것을 좋아하고 쇼핑을 좋아한다고 말했던, 
마치 지난 7년의 세월이 없었다는 듯이 시종일관 지나치게 밝고 해맑은, 
그래서 대체 당신의 영화 속 그 잔혹한 세계는 어째서이냐고 차마 물어볼 수 없었던, 
그 능숙한 밝음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웠지만 확인하는 것이 두려웠던, 

찰나의 순간 드러났다 자취를 감추는 끝없는 고독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 
그리고 지금, 
저토록 차갑게 얼어붙은 얼굴의 그는, 

저 이효신은, 


대체 누구일까. 



라헬은 말을 잃는다 

끝내 외면하고 싶었던 순간이 지금일지도 모른다 
7년만에 효신을 만나고 모든 것이 익숙한대로 흘러간다고 생각하면서도 때때로 라헬은 효신이 낯설었다 
지금의 효신에게 익숙해질수록 더욱 그랬다 
내내 마음 한 켠을 괴롭혔던 이질감이 지금 이순간 모습을 드러낸다 


어느 쪽이 이효신일까. 
라헬이 믿고있던 그 이효신은 대체 어느 쪽일까 

통화를 마쳤는지 수화기를 떼고 멍하니 앞을 바라보는 효신의 옆모습이 석상처럼 차갑게 굳어있다 
아무런 감정도 흔적도, 지나온 시간마저 읽어낼 수 없는 그 선들은, 

허깨비. 

금새라도 사라질 허상.처럼 느껴진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던 관계마저 안개마냥 해가 뜨면 사라질 채비를 한다 


당신, 누구야. 



"얘, 라헬아, 듣고 있니? 얘?" 


수화기 너머 신경질적으로 저를 찾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다 


"네, 듣고 있어요" 
"하여간, 누구든 얼토당토 않는 놈이면 엄마 용납 못해, 당장 접어" 
".. 걱정마세요" 
"나서서 찾아내려면 알아내는 건 문제도 아닌 거 알지? 네가 현명하게 잘 처리할거라고 믿어서 그냥 두는거야. 
 괜한 일에 품위없이 얽히고 싶지도 않고, 네가 그정도는 문제 안 일으키고 해결할 수 있지? 믿어도 되지?" 
"네" 
"대강 듣지 말고! 내가 나서기 전에 확실히 정리해, 너! 듣고 있어?" 


라헬은 여전히 시선을 효신에게 고정한 채 건성으로 대답한다 
잔소리가 몇마디 더 이어지지만 이미 라헬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그저, 


머리 속에 가득한 질문은. 


당신, 누구야. 


그리고 


우린, 뭐죠. 



금새라도 폭발할 것처럼 세계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무성의하게 통화를 끝낸 라헬은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감추고 효신을 바라본다 
조금 전 통화를 마친 후 내내 같은 자세로 그저 앞을 바라보고 있는 효신의 얼굴은 
오히려 라헬의 쪽이 감정적이라 할만큼 멈춰선 바람이나 차라리 차갑게 굳은 돌같다 
언제나 덧씌워진 미소가 사라진 그 얼굴을 보며 한발짝 내딛는다 


익숙한 또각거리는 구둣소리가 들리지않는다는 걸 그제야 새삼스레 깨닫는다 
라헬은 낯설게 제 발을 내려다본다 

낮은 굽의 빨간 구두 
효신의 선물 

운동화에 가까울 정도의 고무굽은 편의성도 높지만 무엇보다 거의 구두굽 소리를 내지 않는다 
사뿐,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자신의 걷는 소리가 어색하다 

마음으로는 어색하게 
하지만 몸은 자연스럽게 

효신을 향해 한 발 내딛는다 



어느 쪽이 진실일까 


걸음마다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진다 



여유로운 미소 
어디에서나 주인같던 태도 
상냥한 에스코트 
눈매를 감추는 깊은 챙의 모자 
차가운 얼굴 
제 발목에 닿던 조심스런 손길 
파르페를 나눠 먹은 카페 

그리고. 


파노라마 처럼 지나가는, 제가 알고 있던 효신의 모습을 떠올리던 라헬은 
순간 효신이 얼마나 깊숙이 삶에 들어와버렸는지 깨닫는다 
이렇게 많은 장면들이 지나가게 될 줄이야 
그저 한두달 남짓의 그 짧은 시간에 언제 이렇게 많은 흔적을 안게 되었는지 아찔하다 

순간 어질,하고 시야가 흔들리는 것 같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샌가 이미 효신의 앞에 선 자신을 발견한다 


"선배" 


라헬은 작게 효신을 깨운다 
그게 신호였던 것처럼 효신은 허공으로부터 부름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공허하게 꺼져있던 눈동자에 라헬이 담기자 반짝,하고 생기가 돌아온다 


"통화, 잘했어요?" 
"아, 응" 


효신은 미소짓는다 
언제 차가웠냐는 듯이 
이 세계를 떠난 적이 없다는 듯이 
언제나와 같이 다정하게 


라헬은 그 상냥한 미소 너머에 감춰진 진실을 상상한다 
방금 자신이 소환하기 전까지 효신이 헤메고 있었을, 
생명력을 다 빼앗긴 것처럼 차갑게 굳은 영혼만이 유랑할 수 있을 그 이계를. 
얼마나 거대할지 
얼마나 희박할지 
얼마나 멀리 있는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이효신과 Director Woo 사이의 간극 
칼같던 수트와 구겨진 점퍼 사이의 간극 

언제든지 상대를 알아낼 수 있다던 에스더가 찾아내는 건 
제국고 학생회장 이효신일까 천재 감독 Director Woo일까 
어느 쪽의 흔적일까 
어느 쪽의 존재일까 
어느 쪽이 진실일까 
나는 어느 쪽을 진실이라고 믿고싶은 걸까 


라헬은 궁금해진다 


당신은 누구. 
우린 대체 무엇. 
그리고 난 지금, 

당신과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하는 라헬이 이상했던지 효신은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싱긋 웃는다 
그리고 말 대신 탁탁,하고 아까까지 라헬이 앉아 있었던, 제 옆자리를 두드린다 


"앉아" 


라헬은 그 청에도 꼼짝않고 멍하니 효신을 바라본다 
기억 속의, 능숙하고 늘 어른인 그가 저를 보며 예의 그 미소를 짓는다 


"무슨 일 있었어?" 


효신은 그제야 걱정스럽게 묻는다 
저 얼굴, 저 목소리, 저를 향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 
당연했던 모든 일이 당연하지 않게 느껴지고,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이 세계의 균형이 깨지고 그가 그대로 흩어져버릴 것만 같다 


둘을 향해 덮쳐오는 파도의 환영을 본다 

더이상 어리지 않은 스물여섯의 유라헬이라면 
넘실대며 다가오기 시작하는 파도가 모든 걸 삼켜버릴만큼 높아지기 전에 
뒷걸음질쳐 누구의 손도 닿지 않을 안전한 곳으로 피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라헬은 생애 처음으로 언제나 의식적으로 피해왔던 
에스더로부터 물려받은 기질을 해방시키기로 결정한다 

수세에 몰릴수록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던져서 
적진의 심장을 향해 겨냥하는 과감하고 전략적인 베팅 

이미 오래 전부터 잠재되어있던 그 기질이 

싫었다 

잔인하고 냉정하게 너무 많은 사람을 상처입힌 그 기질이 
저에게도 흐르고 있을까봐, 아니 흐르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영원히 묻어둔 채 살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베팅의 상대가 가치있다면, 
그 과녁이 정확하다면, 


"선배" 


라헬은 마침내, 효신을 부른다 
여전히 꼿꼿이 선 채로 두 눈은 효신에게 고정하고, 결심한 듯 목소리는 비장하기까지하다 
낮게 울리는 부름에 효신은 더이상 라헬을 앉히려는 노력을 그만두고, 라헬의 말에 응답한다 


"응" 
"나와 함께 있는 게 괴롭지 않다고 했죠?" 


갑작스런 말에 효신은 잠시 답을 찾아 허공을 더듬다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의미를 찾아낸 얼굴에 여유로운 미소가 넘친다 


"아아, 그래" 


장난기마저 느껴지는 미소에 라헬은 두 손에 습기가 차는 착각이 든다 
긴장한 듯 몇번인가 가만히 두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한다 
조용히 날뛸 준비를 하는 심장에 라헬은 짧게 숨을 내쉰다 


"내 마음이 풀린다면, 이었으니까, 조건이 충족하지 못하면 바꿀 수 있는 거죠?" 


라헬은 뚫어져라 효신을 바라본다 
갑작스런 말에 당황하는가 싶던 효신은 잠깐의 침묵 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뭐로 바꾸고 싶은데" 


라헬은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킨다 
무의식적으로 초조하게 손을 쥐었다 놓는다 
효신은 그런 동요하는 라헬이 낯선 듯 올려다보다 안심하라는 듯 상냥히 웃어보인다 


"다른 걸 원해요" 
"뭐든 말해봐" 


불안한 마음을 다독이는 차분한 대답에 라헬은 훅,하고 숨을 들이쉰다 


저 여유로운 미소. 
언제나와 같은 태도. 
한번도 떠난 적이 없었다는 듯, 
익숙한 모습, 그 목소리. 

때로 흔들릴지언정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견고한 가면 
하지만. 


"마음을 줘요" 


재판정에 울려퍼지는 최종 선고처럼 단호하고 냉정한 목소리에, 
아니 그 목소리가 선포한 두 마디 문장에 담겨있는 의미에 그때껏 여유로 무장하고 있던 효신의 세계가 한 켠 무너진다 
완벽한 곡선을 그리고 있던 입술 끝이 당황한 듯 일그러지는 모습을 확인한 라헬은 
그제야 내내 심장을 압박해왔던 긴장이 조금 풀리는 해방감이 든다 


당신은 내내 신기루처럼 
과거의 당신으로 내게 머무르다 
어느날 사라질 셈이었겠지만. 


"날 좋아해요, 가능하면 진심으로" 


싱글거리던 효신의 표정은 오래 전에 사라졌다 
마치 버려진 성벽처럼 순식간에 풍화되어버린 가면은 거칠한 표면을 드러낸 채 
불완전한 성채 안 쪽의 황폐해진 거리를 언뜻 드러낸다 
오직 믿을 수 없다는 듯 라헬을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만이 숨기지 못한 경악을 드러내며 
조소하듯 마주해오는 라헬의 눈을 피하지 못하고 격렬히 흔들린다 


이게, 진짜. 이효신. 
지금껏 내게 보여주지 않으려고 했던 당신. 


제가 던진 말이 일으킨 파장이 안전하고 평온해보였던 효신과의 세계를 균열내고 
그 균열 앞에 드러난 효신의 불안과 경악이 어쩌면 제 제안에 대한 거절일지도 모르는데도 
오히려 라헬의 마음은 말을 꺼내기전의 불안 같은 건 모두 환상이었던 것처럼 평온해진다 
빙글빙글, 제 꼬리를 잡으려 제자리를 맴돌던 강아지마냥 
아무리 따라잡으려해도 볼 수 없었던 그림자의 끝을 붙들자 천천히 얼굴이 굳는다 
당혹.에 휩싸인 거부. 
그 얼굴을 바라보는 라헬의 심장에 길게 붉은 생채기가 난다 


결국 이렇게 되어버리는거지. 


라헬은 속으로 냉소적으로 중얼거린다 

진심으로 원했던 모든 것은 잃게 된다 
그렇다면 진심을 원하면 어떻게 되는걸까 
진심으로 진심을 원하면 진심을 잃게 되는 건가 
진심으로 가식을 원했다면 가식만을 잃게 되었을까 

지금까지 그가 저에게 주었던 그 순간들은 
그렇다면 진심이었을까 가식이었을까 


울컥, 슬프면서도 
차라리 오기가 생긴다 


당신은 그렇게 이슬처럼 해가 뜨면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이미 늦었어. 

이미 당신은 내 세계에 너무 많은 흔적을 남겨버렸는 걸 
우리가 조금만 더 머뭇거리면 내 세계 전체가 당신을 좇기 시작하겠지 
당신이 원하지 않아도 당신을 찾아내고 추적해서 검증하려고 들거야 

이미 덮쳐오기 시작한 파도는 멈출 수 없어 
그 일이 벌어지기 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뒷걸음질쳐 도망치거나 함께 맞서 돌파하는 일뿐. 


"뭐든, 갚겠다고 했잖아요 내 마음이 풀린다면" 


라헬은 마음을 슬프게 하는 수많은 말들을 언어로 치환하는 대신 차가운 표정 뒤로 삼켜버린다 

생기가 모두 사라진 딱딱하게 굳어있던 효신의 얼굴이 서서히 창백해진다 
마치 조금 전 라헬의 손을 이끌고 탔던 롤러코스터에서 막 내렸을 때처럼 하얗게 핏기가 사라진다 

지금은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것도 아닌데, 
지금 우리는 평지에서 대화를 하고 있을 뿐인데. 

라헬은 속으로 냉소한다 
무모한 말같은 건 하는 게 아니었다고 벌써 후회하지만 
그러나 이미 시작한 게임은 멈출 수가 없다 


"유라헬, 그건..." 


창백해진 효신이 겨우 내뱉는 말마저 힘없이 공중에 흩어진다 
아무런 색채도 띄지 못한 말은 의미없이 서로의 사이에 채 완성되지 못하고 맴돌기만 한다 

완전히 거부당했다고 생각해야 마땅한데도 라헬은 애써 베팅을 걸었던 그 찰나의 순간에 가느다란 희망을 건다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고 해도, 그 순간의 눈빛은 진심이었을거라고 믿어본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게 주세요 선배의 진심" 


이미 시작되어 버렸어 
없던 일로는 할 수 없어 
당신은 이미 내 세계의 일부가 되어버렸는 걸 

곧 우리를 덮쳐올 저 파도가 보이지 않나요 


나는 선택했어요 

이제 내 손을 잡아 






















============================ 
천천히...라기엔 너무 느리게지만.... 
기억해주는 냔들이 있다면... 고마워. 미안해. 고마워. 

이제야 겨우 사건,이랄게 등장할 조짐이.... 


처음의 배경음악은 뱅가랭. 
그리고 몇 개의 대사가 그대로 쓰였어. 예를 들어 나를 좋아해, 가능하면 진심으로. 같은 거.







veil 1

기다리고 있었어ㅜㅜ 역시 먼저 행동으로 옮기는건 라헬이군어 효신 선배 고생좀 할듯ㅋㅋㅋ

.155 
veil 2

드디어왔구나 언제나 긴 글 좋다..진짜 이제야 사건이 샹기려고하네 ㅋㅋ냔이글은 어쩜그리잘쓰는지 무슨 글쓰려고 헉원다니냐능 ㅎㅎㅎㅎㅎㄹㄹ ㅋㅋ 암튼 아침에 잘봤어.언능 새수해야지 ㅋ

.155 
veil 4

효신아ㅠㅠ 너의 마음이 나도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제발 ㅠㅠㅠㅠㅠ ㅋㅋㅋㅋㅋ 냔아 기다리고 있어ㅠㅠㅠ 고마워ㅠㅠ

.31 
veil 5

으엌ㅋㅋㅋ댓글이 잘못 올라갔네ㅠㅠㅠㅠㅠ 냔아 항상 잘 보고 있어!!!! 언제 올라오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힝 
난 왜 자꾸 저런 효신이가 아슬아슬할까ㅠㅠㅠㅠㅠㅠㅠㅠ효신아 너의 마음을 보여줘ㅠㅠㅠㅠ

.213 
veil 6

둘다 생각이 너무 많아. 가진게 많은 아이들이라 그런가? 
라헬이가 먼저 움직이다니...효신이 이놈 부끄러운줄 알아라! 그리고 늦은만큼 분발해라, 이눔아!

.118 
veil 7

으악ㅋㅋㅋㅋㅋ 송것 위에 서있는것 같은 날카로움!!! 효신이가 언제나 보이는 것처럼 느긋하게 웃으면서 일방적으로 라헬이의 텐션을 느슨하게 해주는 존재라는것 보다 날카로움을 애써 가장한 여유인데 그걸 딱 알아채주는 라헬이가 너므 좋다 ㅜㅜ

.145 
veil 8

으헤헤ㅔ헤헤헤헤헤ㅔ 
기쁨의 깨춤추고 싶다

.108 
veil 9

=8 선리플 후감상할게 냔아 고마워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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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와따ㅠㅠㅠㅠ 냐나 기다렸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224 
veil 11

라헬이 멋있어ㅠㅠ

.123 
veil 12

냐니의 글을 기다리고 있어. 어른인데 오히려 어른이라 힘들까. 라헬이는 던졌고 효신은... 선배, 선배의 마음도, 몸도 다 라헬이에게 줘요.

.3 
veil 13

효신은 이미 진심인데 가능하면 진심이라니 ㅠㅠㅠ 그냥 고백해뿌러!!

.82 
veil 14

라헬이 멋있다ㅜㅜㅜ 효신이 상황이 다 안나온거 같은데 라헬이랑 극복가능한 상황이면 좋을텐데ㅜㅜㅜ

.93 
veil 15

라헬이 잘한다 더 밀어붙여 버려

.211 
W 16

뒤늦게 덧붙이는.. 본방 볼 때 "나를 좋아해, 가능하면 진심으로."라는 대사가 참 무겁고 슬프고 막막하다 생각했는데... 대본의 앞뒤도 못 받쳐줬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대사 소화가 제대로 안 되어서 그냥 지나가버린게 아쉬웠어.. 그래서 조금 다르게, 써봤어

.234 *
veil 17

그러게. 이렇게 보니 저 대사... 좋잖아? 
아 사실 이게 마지막편일까봐 아껴가며 읽었는데 이제 시작이라니 기쁘다 ㅎㅎㅎㅎㅎ

.88 
veil 18

...나를 좋아해, 가능하면 진심으로.. 
라헬인 눈질끈 감고 용기를 냈고.. 효신선배. 당신맘은 어떤가요?..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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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너무 재밌쟈나ㅠㅠㅠㅠㅠㅠ

.41 
veil 20

효신아... 라헬이가 내민 손을 잡아ㅠㅠㅠㅠ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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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기다리고 있었어.. 이제야 제대로 들여다본 효신이에게 당당히 요구하는 라헬이 멋져!!!!!

.180 
veil 22

헐 라헬이 존멋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136 
veil 23

라헬이 박력있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207 
veil 24

구두 사주지마.....구두사면 라헬이 훨훨 날아가면 어딱해ㅠㅠㅠㅠㅠㅠㅠ 
저렇게 몇번이나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고 말하는데 우리 디렉터ㅇ우는 뭐하는거에어ㅠㅠㅠㅠㅠㅠ

.227 
veil 25

라헬 멋져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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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렸어 ㅜㅜㅠㅠㅠㅠ

.185 
veil 27

신발은 사주는거 아닌데... 왜 신발을 사준거야~~~

.186 

veil 28

ㅠㅠㅠㅠ 디렉터 우 라헬이 좀 잡아요!!

.125 


Posted by april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