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loneliest moment in someone's life is when they are watching their whole world fall apart and all they can do is stare blankly."
=
"Un bel di vedremo"
=
"Un bel di, vedremo
Levarsi un fil di fumo
Sull'estremo confin del mare
E poi la nave appare"
(어느 개인 날 바다 저편에 연기를 뿜으며 흰 기선이 나타나면)
소리 없이 열리는 문을 열자 고요하게 흔들리는 소프라노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온 몸을 감싸든다
효신은 문을 열고 그 세계에 한 발을 내딛다가 그 자리에 서버리고 만다
어느 맑은 날,
자신을 두고 미국으로 돌아간 핀커톤을 기다리던 쵸쵸상이
저 맑은 하늘 너머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하얀 배가 모습을 드러내면
그때 그가 돌아올 것이라고, 자신을 찾아올거라고 희망에 차서 애절하게 부르던 노래.
결국 핀커톤은 그녀의 바람대로 돌아오긴 했지만 그녀가 바라던 모습대로는 아니었다
쵸쵸상에게, '나의 나비부인, 나의 오렌지'라고 부르며 다정하게 했던 약속들은,
쵸쵸상이 알고 있던 그 핀커톤은 모두 허상이었고, 그 맹세는 모두 거짓.
끝내 그 맹세에 자신의 인생을 걸었던 나비부인은 더이상 삶을 이어갈 수 없었다는 비극.
극중 누구도 쵸쵸상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고통스러웠던 결말.
그 결말을 생각한다면 지나치게, 지나칠 정도로 아름다운 이 아리아.
효신은 순간 강한 빛에 쬐이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질끈 감으며 그때껏 멍하니 쥐고 있던 손잡이를 놓친다
매끄럽게 제자리로 돌아간 문이 반동을 이기지 못한 듯 몇번인가 무겁게 흔들린다
그제야 카운터 옆 LP 음반이 빼곡이 들어찬 부스에서 내다본 주인이
아는 손님에게만 보이는 최소한의 호의로 간단한 눈짓 인사를 건네 아는 척을 하고는 제자리로 돌아간다
한국에 돌아와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오래된, 동네 도서관들을 전전하면서 종종 작업하다 발견한 공간이었다
역사로 따지자면 효신의 나이를 훌쩍 넘기고도 남을 만큼 오래된 음악 감상실이라고 했다
아무때나 찾아와도 눈에 띄는 손님이라고는 나이 지긋한 노신사나
고풍스런 외관에 끌려 들어온 독특한 취향의 젊은 뜨내기 손님 뿐.
처음에는 그런 뜨내기 손님에 불과했던 효신은 이내 이 특별한 공간에 익숙해졌다
탄과는 이곳에서 몇번인가 만난 적이 있었다
형의 취향은 갈수록 이해할 수 없다고 고개를 절레 흔드는 탄에게는 그저 말없이 웃어주었다
이미 얼굴이 익숙해질 정도로 종종 찾는 곳이지만 손님에게 사적인 관심이나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는
한발짝 물러서 손님과 주인일 뿐이라는 듯 선을 긋는 태도가 오히려 안심이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고풍스럽다 못해 허름한 이 공간에
마치 잡지책에서 오려내어 꼴라주 작업이라도 한 것처럼 공간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홀로 톡, 튀어나와있는 뒷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꼿꼿이 세운 등은 마치 세계의 무게를 견디고 있는 것처럼 의연하다
창에 새어들어온 빛은 머리칼에 채 닿기도 전에 부서져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굽이치는 갈색 머리칼은 반짝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떤 종류의 고고함은 그 어떤 어둠에도 가려질 수 없다
"Tienti la tua paura - Io con sicura fede lo aspetto!"
(두려워하지 말아요, 나는 그가 돌아오리라 확신해요)
소프라노가 결연히 기다림을 선언하고 아리아는 최고조에 이른다
흔들림 없이 믿었던 나비부인
결국 자신이 믿었던 허상에 배신당한 나비부인
그 허상을 마주하고 기만당한 현실을 깨닫는 순간
더이상 생을 지속할 수 없었던 그녀는
강철처럼 강하고
나비의 날개보다 약했다
핀커톤은, 영원히 허상으로 남았어야 했다
돌아와서 그 허상을 고백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게 나비부인을 영원히 희망 고문했더라도 그 꿈을 지켜줬어야만 했다
아아, 나의 나비부인
효신은 꼼짝않고 서서 대신 입술을 깨문다
나는 너에게 지금, 이 허상을 고백해야만 한다
지금 자신은 핀커톤보다 몇 배는 더 비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나비부인, 부디 그 순간을 유예할 수 있기만을.
차마 다음 걸음을 떼지 못하고 문과 뒷모습 중간 어디쯤에 서서 멍하니 뒷모습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그리스 조각상처럼 완전한 균형을 이루고 있던 어깨 한쪽이 스륵 흔들리며 내려앉는다
자연스럽게 들린 반대편 어깨 쪽으로 무심히 돌아간 시선은 뒤에서 소리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효신과 마주치고 조금 놀란 듯 멈칫 한다
그 틈에 어느새 완전한 표정을 쓴 효신은 아무렇지 않게 조금 전까지 움직이고 있던 중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발을 뗀다
효신은 기계처럼 앞으로 발을 내딛으면서 걸음의 무게가 꺼질 것처럼 무겁다고 생각한다
오른발
왼발
그리고 오른발
겨우 세 발자국.
그 거리가 멀고 멀어서 효신은 순식간에 피로해진다
제 앞으로 걸어온 효신이 테이블 건너편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앉을 때까지
라헬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뜨악한 표정으로 내내 시선을 떼지 않는다
효신의 움직임을 따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라헬은 일상 속에서 만나서는 안되는 이계의 존재와 마주치기라도 한 것처럼 창백해진다
저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에 효신은 난처한 듯이 깊게 눌러쓰고 있던 모자 챙을 버릇인 양 만지작 거린다
"잘, 지냈어?'
잠시 침묵하던 효신은 여전히 모자 끝을 만지작하며 눈을 반쯤 가린 채, 여상스런 목소리로 안부를 묻는다
라헬은 효신의 말에 멈칫한다
연기에 있어서라면 결정적인 순간에 감정을 감추지 못했던 라헬보다는 언제나 자신이 한 수 위였다
광고 현장에서 다시 만났던 그날도, 라헬의 표정은 저렇게 흔들렸었다
그리고 눈 앞이 번쩍하는 따귀 세례.
그랬지, 유라헬.
그 가시는 늘 날카로웠지.
효신은 저도 모르게 그날의 생각에 소리없이 웃고 만다
그 미소를 본 라헬의 표정은 못마땅하게 일그러진다
"그 모자, 좀 벗을 수 없어요?"
라헬은 더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쏘아붙인다
이 순간에조차 효신의 전부를 읽어낼 수 없다는 것에 화가 난다
효신은 몇 초간 망설이다가 천천히 모자를 벗는다
조금 눌린 머리를 몇번인가 손가락으로 흔들어 정리하면서 슬쩍 라헬의 시선을 피한다
모자 아래 감춰져있던 거칠해진 얼굴을 발견한 라헬은 조금 전까지 화를 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득 테이블 쪽으로 다가앉는다
"뭘 하고 다니길래 얼굴이 이래요?"
"아아"
효신은 멈칫 물러선다
"곧 촬영이라... 넌 좋아보이는데 잘 지냈지?"
명백히 거리를 두는 태도에 라헬은 자신이 왜 두번째로 그를 찾아내야만 했는지 기억해낸다
두번째로 그를 찾아내는 건 처음만큼이나 어려웠다
갖고 있는 단서는 두 배가 되었는데도 그 두 개의 이름으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결론은 없어서 오히려 더 혼란스러웠다
확실한 정보는 이 상황과 전혀 상관없어보이는 하나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탔던, 효신이 빌렸다는 차.
급하게 옷을 사러가면서 아무렇게나 길거리에 주차해둔 차가 걱정되어 차번호를 외우는 수고를 하지 않았다면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하고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자책했던 차의 소유주를 찾아낼 수 없었을테고
그랬다면 지금 효신을 겨우 실물로 만나는 일도 없었을 거다
라헬은 두번째 안부 인사에 대답하는 대신 이 모든 혼란의 열쇠가 묻혀있을 혼돈의 시작점을 찾아 물끄러미 그를 바라본다
자신이 효신이라고 알고 있었던 두 개이자 하나인 이름의 모든 정보들은
한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혼란스러워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알 수 없다
그저 날카롭게 노려보는 라헬은 다시 만났던 그 순간처럼 얼어붙어 있다
그러나 그 차가운 눈빛이 반짝, 흔들리며 슬퍼보여서 효신은 조금 전처럼 반가움에 웃음이 나는 대신 마음이 서늘해진다
흔들리지 않는 시선을 피해 머뭇 고개를 든다
시야에 들어온 하늘이 지나치게 파랗다
잔인하게도 지금의 이 상황에 완벽한 배경이라는 생각을 떠올린다
비극은 언제나 잔혹할정도로 아름다운 때에 더 극대화되는 법
이 상황, 자신의 인생에 비극 하나가 더해지는 이 순간마저
극적인 연출을 떠올리고 마는 스스로가 지겨워서 효신은 저도 모르게 허, 하고 헛웃음을 흘린다
절레 고개 젓고 싶어지는 걸 눌러참으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비극의 완벽한 배경으로부터 고개를 돌린다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라헬과 눈이 마주친다
다시 마주한 그 시선은 여전히 효신을 겨냥하고 있지만, 조금 지친 듯이 그 시위가 느슨해진 것처럼 느껴진다
약해진 시위가 과녁인 제 탓인 것 같아서 효신은 작게 한숨을 쉰다
효신의 한숨이 방아쇠였던 것처럼 팽팽하던 긴장감의 한 축이 무너진다
라헬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과녁이 어느 쪽을 향해 있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처음 해보는 일인 듯 서툴게 시위를 놓는다
"어떻게 된 거예요?"
갑작스런 말에 효신의 눈썹이 작게 꿈틀거린다
"...촬영 준비 때문에 바빴어, 크랭크인하면 바쁘다는 생각도 못하게 되겠지만"
무심히 웃는 효신의 표정이 지나치리만큼 평온하다
라헬은 세차게 고개를 흔든다
방금 들은 대답을 지워버리려는 듯이
그러면 그 시간을 모두 지워버릴 수 있다는 듯이.
"당신, 누구야"
격렬한 부정에 어울리지 않게, 고개를 든 라헬이 마침내 발사한 탄환은 소리 없다
마치 공포영화를 본 저녁, 인정할 수 없는 그러나 거부할 수도 없는 두려움이 묻어나는 애원
예상치 못한 질문에 효신은 순간 갈피를 잃는다
그저 미소와 이름이면 충분했을 그 결정적 순간, 머뭇거리는 효신에 라헬의 표정은 참담해진다
"... 세 명의 이효신이 있어요"
효신의 대답을 기다리던 라헬은 침묵을 깨트리는 것이 두렵다는 듯 작게 속삭인다
"하나는, 우리가 모두 알았던 이효신.
법조계의 명예 가문 상속자 답게 지금 보스턴에서 로스쿨에 다니고 있다더군요 또 누구는 런던에서 비즈니스 스쿨을 다니고 있다고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가 이미 그 모든 걸 끝내고 이미 로펌에서 근무중이라고도 해요"
효신은 아아, 하는 씁쓸한 미소를 저도 모르게 머금는다
라헬은 버거운지 순간 말을 멈추고 숨을 들이마신다
"영화를 한다는 이효신도 있죠, Director Woo 라는 웃기지도 않는 이름으로"
날카로운 원망이 묻어나는 비난에 효신은 으쓱 어깨를 움츠린다
"그 이효신은, 재미교포라더군요. 한국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미국 시민이예요"
차분하게 이어지는 라헬의 설명에 효신이 명백히 움찔한다
"필라델피아 출신의 재미교포 2세, 세탁소를 했던 부모님은 5학년 때 사고로 사망.
이후에 재능을 인정받아서 후견을 받아 성장했죠. 후견인은 미국의 딕슨 컴퍼니, 참고로 제국 그룹의 미국 파트너사죠"
애써 태연하게 무슨 말이냐는 듯이 라헬의 어깨 너머 어딘가 허공을 바라보지만
테이블 아래로 쥐고 있는 모자의 챙을 만지작거리다 못해 곧 형태가 사라질 것처럼 필사적으로 구겨진다
"이름만 같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죠 이 이효신은. 그리고 마지막으로,"
라헬은 힘겹게 말을 멈춘다
아무런 감정도 없이 말하는 것이 차라리 쉬웠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 생각하기 시작하는 순간 끝없는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같은 이름의 완전히 다른 두 사람,
그리고 자신이 만났던 이효신.
혼란 속에서 본인에게 직접 물어봐야겠다는 결론에 다다르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만 그 본인을 찾아내는 것과, 그리고 물어볼 용기를 내는 게 어려웠을 뿐이다
라헬은 자꾸만 물러서려는 마음을 다잡는다
"지금, 제 앞에 또다른 이효신이 있네요
앞서 말한 두 명의 이효신 모두이면서 어느 쪽도 아닌"
효신은 비극을 지나치게 빨리 마주한 사람처럼 얼어있다
겁에 질린 것처럼 보이는 그 얼굴에 라헬은 어쩔 수 없이 중얼거리고 만다
"누구예요 대체, 선배는. 누구예요"
효신은 악몽에서 깨어난 것처럼 작게 고개를 흔든다
이 모든 상황을 부정하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대체 라헬은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저는 어디까지 고백해야하는 걸까
이 순간마저, 조금이라도 숨겨보려고 하는 노력이 무의미하게 느껴져서 헛웃음이 난다
끈질기게 대답을 기다리던 라헬은 긴 침묵 끝에 답 없이 허탈하게 웃는 효신에
자신의 정중함이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딱딱하게 굳는다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까지 거짓인가요? 내가 알고 있는 이효신은 대체 누구죠?
내게 보여준 전부가 거짓인가요? 나를 기만한 거예요? 대체 누구죠 선배?"
한번 시작하니 멈추지 못하고 이어지는 질문에 효신은 체념한 듯 눈을 감는다
라헬의 가시돋친 공격은 그제야 힘을 잃는다
눈을 감아버린 효신을 바라보는 라헬은 지치기보다 슬퍼진다
서로를 침몰시키기에 충분히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라헬은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긴 정적에 무엇에인지 모를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Tu, es responsible de tu rose" (당신은 당신의 장미에 책임이 있어)
라헬은 짓누르고 있는 바위를 겨우 밀어올린 새순처럼 가냘프게 중얼거린다
그 말을 듣고서야 효신은 비로소 눈을 뜬다
그러나 그 시선은 갈 곳을 잃고 먼 곳을 헤멘다
총명함을 잃은 눈을 마주하자 갑작스런 겁이 나지만 라헬은 물러서지 않는다
여기서 물러설 거였다면 굳이 찾아내지도 않았을 거다
그대로 가게 두었어도 자신의 인생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겠지만.
그러나
"나는 대답을 들을 권리가 있어요"
라헬의 선언에 효신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린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얼굴로 결국 시선을 떨구고 바닥을 내려다보던 효신은
잠시 손에 쥐고 있던 모자의 챙을 또다시 만지작거리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다
돌발행동에 엉겁결에 효신을 따라 고개를 든 라헬의 머리 위에 툭,하고 효신의 모자가 떨어진다
라헬에겐 큰 모자가 쑥하고 내려와 순식간에 시야를 가린다
깊숙한 챙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아 라헬은 반사적으로 모자를 벗으려고 가지런히 테이블 아래 모으고 있던 손을 들어올린다
".. 잠시만"
채 손을 다 들어올리기 전 의지와 상관없이 손이 좀전과 같은 위치로 돌아간다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에 흠칫 놀라 고개를 들어보지만 그것마저도 모자 위로 머리를 감싼 손이 끌어당기는 바람에 실패한다
어느새 바로 곁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느낌에 라헬은 숨을 훅,하고 들이마신다
큰 손이 라헬의 머리를 살며시 끌어안는다
"... 이대로 있어줘 잠시만, 이렇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흔들리며 귓가에 흩어진다
라헬은 손을 뿌리치려다 제 손을 붙들고 있는 효신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가만히 끌어안은 머리가 아마도 효신의 어깨나 가슴팍에 닿았는지
뺨에 닿은 옷자락에 약한 담배냄새가 느껴진다
효신을 다시 만났을 때 입고 있던 옷에서도 이런 옅은 담배 냄새가 났었다
담배 냄새를 극도로 싫어하는 라헬에게 끊었다고, 끊을 거라고 하더니
영화 찍는다고 다시 피우는 건가, 라헬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한다
효신은 라헬의 시선을 차단하고 어둠 속의 라헬을 안은 채로 한동안 그저 있기만 한다
크게 숨을 고르는 숨소리만 들리고 숨을 내뱉을 때마다 오르내리는 파도 같은 움직임만 존재한다
라헬은 문득, 이 모든 상황이 어찌되어도 상관없다는 무책임한 평화로움마저 느낀다
효신은 지금부터 꺼내놓으려는 말의 무게를 가늠하면서 가만히 제 손 안의 라헬의 부드러움과 익숙한 향기를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그저, 할 수만 있다면 이 상태를 영원히 유지할 수 있도록, 이대로 일어나서 사라져버리고 싶은 충동이 효신의 필사적인 노력을 방해한다
아니 단지 그 순간을 유예하고 싶을 뿐인 스스로의 그 마음을 모르는 척
그저 품 안의 라헬의 모든 것을 기억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담배.. 다시 피워요?"
시간이 가늠되지 않는 침묵을 견디다 못한 라헬은 여전히 어둠 속에 갖힌 채로 퉁명스레 묻는다
효신은, 예상치 못한 그 말에 가만히 웃는다
미소가 보이지 않는데도 라헬은 전해지는 미동으로 효신이 웃고 있다는 걸 느낀다
별로 웃을만한 일이 아니었는데도 라헬이 전염된 것처럼 살짝 웃자 미소짓는 어깨의 흔들림에 굳어 있던 분위기가 약간 느슨해진다
효신은 살며시 감싸고 있전 라헬의 머리 끝을 만지작한다
이것이 마지막인 것처럼 효신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지고 입매가 날카로워진다
"... 김탄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있지?"
반갑지 않은 이름에 기껏 느슨해졌던 라헬의 어깨가 도로 딱딱해진다
굳어버린 그 어깨를 효신은 무의미하게 따라 긋는다
"... 원해서 안되는 사람을 원하고 가서는 안될 길을 선택한 댓가.
인생 전부를 아버지에게 회수 당했지. 주신 분이 그분이시니 가져가는 것도 당연한 결과일까"
건조한 효신의 목소리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건지 읽을 수 없다
갑자기 왜 김탄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인지, 필요에 의해 찾아가긴 했지만
과거의 기억이 희미해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탄을 긍정할 수 없는 라헬은 불편해진다
아무래도 얼굴을 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
라헬은 어둠에서 벗어나려고 움찔거리지만 효신은 라헬을 놓아주지 않는다
"... 그렇다면,"
쥐어짜는 듯, 컴퓨터 프로그래밍 된 단어처럼 조각조각 끊어진 음절
"법조가문의 반항아에게 어울리는 댓가는 뭘까"
질문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질문이 아닌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린다
이미 한번 부서졌던 존재는 그 파괴의 순간을 고통스럽게 떠올린다
"... 이효신은, 없어.. 그건 그저 조작된 소문이야"
처음에는 매일 밤, 겨우 익숙해졌다 생각한 후로도 자주 악몽에서 깨어나야만 했다
어떤 종류의 진실은 아무리 아무리 되뇌어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게 존재 전체를 부정해야하는 경우에는 더더욱.
"... 진짜 이효신은 사회적으로 존재하지 않아"
효신은 겨우 숨을 삼킨다
"스물둘에 금치산자가 되었지. 죽었어 이효신은."
움찔거리던 라헬은 마지막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그대로 멈춰버린다
효신은 저도 모르게 라헬을 힘껏 쥐어버린 손에서 겨우 힘을 뺀다
법조계의 일은 역시, 법에 따라.
언제나 궁금했다
방송부 일을 모르는 걸까 알고도 모르는 척 하는 걸까
영화 일을 모르는 걸까 알고도 모르는 척 하는 걸까
입대를 몰랐을까 알고도 모른 척 했던 걸까
정해놓은 길을 벗어나지 않고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는 한 그 궁금증을 풀리지 않았지만
감히 확인을 위해 그 길을 벗어날 용기는 나지 않았다
입대는 어쩌면 자신을 향한 어머니의, 집안의 삐뚤어진 집착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과연 어디까지 제어할까
의가사제대라도 시키는 건 아닐까
아니면 당장 찾아내서 끌고가는 걸까
없던 면접도 만들어냈듯이 뭔가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 등장할까
예상해보는 것은 두렵지만 흥미로웠다
군 복무 내내 효신은 남들과 다른 의미로 긴장한 채 지냈다
작은 일에 섣불리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첫 해는 그렇게 언제 흘렀는지 모르게 지나갔다
조그만 기척에도 깜짝 놀라는 토끼처럼 긴장한 채 일년을 보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일부러 수색대대에 자원했지만 부대 배치를 바꾸거나 보직을 옮기려는 어떤 뒷공작도 없었다
주위는 지나치리만치 조용했고 이내 긴장하고 있는 스스로가 우스워질 정도였다
효신은 드디어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고 착각했다
자신은 얼마나 순진하고 낙관적이었는지.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하다는 걸 알았어야했는데
너무 아무 일도 없는 것을 수상하다 생각했어야했다
미래를 손에 넣었다고 기뻐한 바로 그 순간
잔혹한 손이 제 목을 조여오고 있었다는 걸 그땐 어려서 몰랐다
제대 후 유학을 준비하면서 이것저것 정보를 알아보고
영상 일을 다시 시작하면서 돈을 모으며 꿈에 부풀어 오르고 있던 그때,
그 일이 일어났다
백주대낮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으슥한 밤중도 아니었다
바쁘게 영상 스튜디오에 가던 길이었다
갑자기 얼마 전 끝낸 영상 작업에 문제가 생겼다며 추가 작업이 필요하다고 효신을 급히 불렀고
분명 마지막까지 확인했던 데이터에 어떤 문제가 있는 건지 의아했지만
일단 추가 작업 비용도 계산해주겠다는 말에 서둘러 가느라 뛰다시피 거리를 걸었던 기억이 마지막.
순식간에 의식을 잃었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낯선 곳이었다
'여긴 어디죠?'
누구도 자신의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아니 어떤 말도, 오늘 기분이 어때요 라던가 잘 잤어요 같은 간단한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다
내내 벽을 마주한 기분으로 방에 갖힌 채 효신은 종종 낮밤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때 자신이 계속해서 신경안정제를 투여받았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관념조차 희미해져가던 어느 날, 드디어 최후 통첩이 날아왔다
하얀 종이 위에 단정하게 박혀있는 인쇄된 검은 글씨,가 말했다
효신에게는 더이상의 기회는 없다고
법적으로 너는 이미 독립적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성인으로서의 권리를 박탈 당했다고
'금치산자'
법조가문에서 태어나 법조인이 되어야한다고 첫 울음을 터트린 그 순간부터 들어온 효신에게
이미 너무 익숙하지만 그렇게 때문에 더 낯선 그 단어를 발견하는 순간 간신히 들고 있던 종이를 떨어트릴뻔 했다
믿어지지 않았다
그 말이 자신의 것이 될 것이라고는 한번도, 단 한번도 생각한 적 없었다
얼굴조차 대면하지 않고 통보된 최후통첩에 선택권은 없었다
금치산자로 영원히 갖혀 살거나
포기하고 주어진 궤도로 돌아오라는
매우 우아하고 합리적인 협박
죽거나 혹은 죽은 채로 살거나
어느 쪽이 나은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효신은 말을 하다 말고 그날의 기억에 다다르자 숨을 멈춘다
자신들이 정해놓은 길을 걷지 않는 자식은 차라리 없는 게 낫다는, 부모로부터의 사망선고.
"이효신은 그때 죽었어"
효신은 겨우 건조하게 중얼거린다
그날 이후 몇번이나, 수십, 수백, 수만번을 다시 자신에게 사망선고 했다
객관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지만 아무리 그 기억이 익숙해졌다고 해도
'그들'이 바라는 '형태'의 존재가 아니라는 이유로 부모와 세계로부터 필요 없다고 버림받은 충격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당연히 로스쿨을 다니거나 로펌에 있다는 이효신은 없어"
그건 아마 갑자기 사라진 효신을 숨기기 위해 집안에서 만들어낸 허상일 것이다
효신의 이름으로 가짜 등록하는 것쯤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테니
부모님이 원했고 집안이 당연하게 여겼던 이효신.
법조인의 길을 걸어야했던 이효신은 이제 허상만 남았다
탄의 댓가는 영원히 숨죽이며 사회적으로 어떤 목소리도 내지 않는 것.
효신의 댓가는,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댓가는 법적인 죽음.
얼마나 법조가문의 반항아에게 어울리는 결말인지.
말을 멈춘 효신의 손이 떨린다
차마 어떤 말도 꺼낼 수 없는 라헬은 그저 다음 말을 기다린다
조금 전의 그 말들은 너무 있을 법한 이야기여서 믿을 수가 없다
믿고 싶지가 않다
효신이 그런 시간을 지나 여기에 있다는 걸, 믿고 싶지 않다
대체 지금 효신은 어떤 표정으로 이 말들을 하고 있는 걸까
라헬은 효신을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참는다
조그만 움직임에도 이 이야기는 끝나버릴 게다
라헬에게는 지금 들어야할 권리와, 제가 시작하라고 강요한 이야기를 들어야할 의무가 있다
효신은 조금 숨을 고르고 겨우 다음 말을 잇는다
"이효신은, 가짜야"
라헬은 지금 효신이 어느 쪽을 지칭하고 있는 건지 궁금해진다
여전히 라헬을 단단히 감싸고 있는 손은 라헬에게서 빛과, 시야를 빼앗는다
효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 건지 상상을 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식당을 했다는 부모님도, 필라델피아도, 죽음도 후원도 모두"
병원에서 도망친 건 그 마지막 통보를 받은 후 두 달쯤 지나서였다
날짜를 정확히 알 수 없었기에 간신히 창틈으로 보이는 계절의 변화에 그즈음으로 짐작할 뿐이었다
한동안 죽은 것처럼 잠의 세계로만 도피했던 효신은 어느 날 창틈으로 스며든 봄의 향기에 완전한 탈출을 결심했다
살아야겠다.
그 생각에만 집중했다
죽을 수도 죽은 것처럼 살 수도 없었다
도저히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서서히 마치 부모님의 최후 통첩을 받아들인 것처럼 행동했고
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서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탄을 선택했던 건 아마도, 익숙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암묵적으로 사교계에게 배제되어 있던 탄이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거라는 예상도 있었다
무엇보다 효신은 그때 누구도 자신을 데려갈 수 없는 높은 벽 뒤에 쉬고 싶었다
탄은 갑작스럽게 피폐해져서 나타난 - 효신은 병원에서 무려 10kg이 빠진 상태였다 - 효신에 놀라면서도
외부에 눈에 띄지 않도록 효신을 받아주었고
결국 가짜 신분과 제국 그룹의 자회사를 내세워 신분 보증까지 마련해주었다
새 신분의 모든 과거와 항목들을 가짜로 만들어냈으면서도 굳이 이름만을 그대로 사용한 건 악취미 때문이 아니라
설마 가짜 신분의 이름을 본명 그대로 사용할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하리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니 그 편이 추적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말에
이미 병원에서 사라진 효신을 찾기 위해 은밀하게 사람을 풀었다는 말을 들은 탄은 그저 순순히 동의해 주었다
그렇게 효신은 속박하던 세계에서 완전히 탈출했다
누구도 자신을 찾을 수 없는 새로운 신분으로 결코 돌아가지 않을 새로운 세계에 자리 잡았다
그러나 같은 이름을 사용한다는 건 자꾸 이미 버린 이름과 떠나온 세계를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차라리 편했다 'Director Woo'라는 우스꽝스러운 별명이.
농담에서 시작된 또다른 가짜 이름은 지난 과거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게 자신의 진짜 정체성인 것처럼, 효신은 가짜 이름 뒤에 숨었다
'이 효 신'
진짜 이름은 자신조차 한국을 떠날 때 버렸다
세계와 스스로가 버린 그 이름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짜 이름 뒤에 숨어사는 인생은 매순간 불안했다
언제 끌려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효신은 한 곳에 정착하는 걸 꺼렸고
사람들과 깊게 사귀는 걸 의식적으로 피했다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고
언제든지 세계에서 지워질 수 있다는 두려움.
이 세상에 '이효신', 아니 그 무슨 이름으로든지 간에 자신이 살아 있었다고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효신은 미친 듯이 작업에 매달렸다
'그 날'의 악몽이 되살아날 때마다, 제 턱끝까지 추격이 도달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마다, 영혼을 바칠 듯이 작업에 몰두했다
누군가에게 작품이 공개되고 그게 각인되면 비록 가짜 이름 뒤에 숨어서일지라도 이 세계에 살아있었다는 흔적을 남길 수 있다 생각했다
절대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영원히 남는 것,
누군가 이걸 보고 자신을 기억해준다면.
그렇게 무작정 작품에만 매달렸던 몇년이었다
오랫동안 준비한 장편 영화는 마지막 목표였다
효신은 이 시나리오를 위해 자신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아낌없이 꺼냈다
어떻게든 영화가 공개되고 나면, 완성될 수만 있다면
어떤 이름이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내가 누구냐고,"
효신은 무미건조하게 중얼거린다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조차 설명할 수 없다
몇 개의 이름과 몇 개의 신분
지나치게 완벽한 과거들
그 사이 어딘가에 불완전하게 존재하는 자아
완전하지 않은, 완전해질 수 없는 존재,
어떤 이름으로도 스스로를 부를 수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세계의 완성에 집착했는지도 모른다
"... 난 반쪽짜리야"
겨우 고백한 효신은 저도 모르게 부르르 떤다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반쪽짜리에 불과해"
영원히 온전해질 수 없다
완전해지기 위해 어느 한 쪽도 선택할 수 없는 효신을
결코 융합될 수 없는 과거들은 각각 효신의 반쪽을 비틀어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 반쪽마저 부정하고 싶었던 효신은 차라리 후련해진다
자신은 영원히 그 사이 어딘가를 떠돌겠지만,
이 모든 이야기가 비극으로 끝나기 전에 상대의 영혼을 구할 수 있음에 잔혹한 이 순간을 감사히 여기기로 한다
고요한 침묵 속에 우아한 첼로 연주만이 공간을 타고 흐른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우주의 완벽한 균형을 노래했다는 바흐.
온전한 우주 속의 불완전한 스스로를 되새기며 효신은 부조리하다, 생각한다
첼로의 노래 속에 담긴, 숨이 막혀오는 완전한 균형에
태양이 너무 뜨거웠다던 어느 남자처럼 문득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밀려난다
그 모든 이야기가 끝나기까지 라헬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효신은 어쩔 수 없이 익숙해진 침묵을 알아차린 그제야 제 손 아래의 라헬이 조금 전부터 그저 천천히 숨에 따라 오르내리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날카로운 가시 아래 부드러운 숨결
효신은 저도 모르게 가만히 라헬의 머리를 쓸어내린다
손 아래 감기는 이 갈색 머리칼에 빛이 흐르는 것 같던 어느 오후,
모든 것이 어찌되든 상관없었던 세계에, 바라서는 안되는, 원하는 것이 생겼다
낯익은 향기
따뜻하고 부드러운 향기가 손끝에 묻어난다
체취와 섞여 수줍기까지한 그 향기에 자꾸만 해서는 안될 희망이 떠올라, 욕심 내고 싶어진다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어질까 두려우면서도 또한 차라리 제어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한다
우습게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과 시간을 부정하는 것임에도
자신을 향한 사망선고마저 받아들였던 차가운 뇌와 이미 알고 있는 답을 기어코 오류내려는 가슴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마음을 내버려둔 채 멍하니 몇번이나 라헬의 머리를 쓸어내린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존재를 만난 것처럼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손길에
라헬은 경계심을 풀고 갸르릉거리는 고양이마냥 둥글게 몸을 조금 말고 기대온다
수많은 기만과 거짓에도 불구하고 신뢰하고 있다는 몸짓에 효신은 기쁨과 두려움에 휩싸인다
"... 선배 마음은 온전한거죠? 그 마음은 온전히 제 것인가요?"
나직이 속삭이는 말에 효신은 놀란 듯 흠칫 손을 멈춘다
모든 것을 설명하면서도 그 말만은 잊어주길 바랬다
차라리 자신을 속였다고 화를 내면서 나가버렸다면 효신은 아팠을지언정 안도했을 것이다
미뤄왔던 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아무래도 정할 수 없었다
지나치게 냉정하다고 늘 탄이 감탄 섞인 비난을 금치 않았던 이성조차 도움되지 않았다
거짓말과 유예로 살아왔지만 그 말에만은 거짓을 답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진실을 말할 수도 없었다
효신이 머뭇거리는 동안 라헬은 가만히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킨다
지금까지 움직이지 않았던 건 모두 라헬의 의지였던 것처럼 감싸고 있던 손이 힘을 잃고 스륵 떨어진다
라헬의 얼굴은 미묘하게 웃고 있는 중이라, 효신은 당황한다
"우리 거래 잊지 않았죠? 그래서, 선배의 진심은 제 것인가요? 아니면 거래는 끝나지 않은 건가요?"
대답을 듣기 전에 이미 확신에 찬 라헬을 경이롭게 바라본다
No, 라는 말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 믿음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문득 자신도 라헬에게 그렇게 보일까 싶은 생각이 든다
라헬의 믿음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면
애써 어떤 확신도 주지 않으려고 했던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잘 감춰왔다고 생각했던 진심은 어디로부터 새어나간 것일까
효신은 손을 들어 저를 바라보고 있는 라헬의 눈을 쓸어감겼다가 두려운 듯 곧 떼어낸다
대답을 요구하는 두 눈으로부터 도망치려는 듯 떨군 시선이 겨우 닿은 손을 소중하게 들어올린다
처음의 그 날처럼 라헬의 보드라운 손등에 가만히 닿은 입술이 꽤 오랜 시간 머문다
지나치게 길다,는 생각에 라헬의 뺨이 붉어질 때가 되어서야 겨우 고개를 든 효신은 그제야 결심한 듯이 딱딱하게 대답한다
"그래, 네가 이겼어 유라헬. 내 진심은 네 것이야"
굳어있는 효신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원하는 대답을 들은 라헬의 얼굴은 빛으로 반짝인다
효신은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해야하는지, 원망하면서 그 빛을 꺼버릴 말을 기어코 잇는다
"그러니 이제 거래는 끝났어"
라헬은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의심하듯 눈썹을 찌푸린다
그 찌푸린 흔적을 살며시 눌러 펴주고 싶은 충동을 누른다
냉정한 가면을 어느새 꺼내쓴 효신의 기색을 살핀 라헬은 곧 아직 놓지 않았던 효신의 손을 맞잡는다
"내 손을 잡아요. 내가 세상의 모든 문턱을 넘게 해줄게요"
이 자신만만하게 빛나는 존재에게 자신은 대체 어떤 얼룩을 남기려고 했던 것인가
효신은 서글프게 라헬을 바라보다 대답 대신 맞잡아온 손을 천천히 놓아준다
허전해진 빈 손에 라헬의 얼굴은 효신이 단번에 세상을 사라지게라도 한 것처럼 충격에 휩싸인다
이 세계가 사라진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 불안정한 세계는 언젠가 무너지게 될 거란 걸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신은 머뭇거린다
"그 날, 김탄이 알려줬어. 너와 함께 있는 내가 알려졌다고"
두려웠다
그러나 그보다 더 원했다
라헬의 옆에 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모험인지 알면서도 유예하고 싶었던 마지막 순간.
어차피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촬영을 준비하느라 모든 일을 멈춘 지금이 유일한 기회라고도 납득시켰다
이게 마지막 기회라고.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지. 그럴 땐 꼬리를 잘라내는 수 밖에"
효신은 무덤덤하게 잔인한 비수를 꺼내든다
나는 한번 너로부터 도망쳤고 또다시 도망칠 것이라는 망설임 없는 고백에 라헬의 어깨가 크게 한번 요동친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 효신은 차라리 웃고 싶어진다
아니 울고 싶어진다
언제나 표정을 감추는 것에는 라헬보다 자신이 한 수 위.
차갑게 굳어가는 라헬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효신은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속으로 조금 전 자신이 들었던 말을 되뇌어본다
'세계의 문턱을 넘게 해줄게요'
창피하게도 그 말이 기쁘다
할 수 있다면 그 말을 들은 그 순간을 영원히 박제하고 싶다
영상으로 몇 번이고 다시 꺼내 볼 수 있도록
기억 속 상자에 라헬의 기쁜 듯 빛나던 얼굴을, 그 확신에 찬 목소리를 담아 영구 보존 딱지를 붙여놓는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추격
어디서 덮칠지 예상할 수 없는 공격
아무때고 사라질 수 있는 존재
영원히 불안에 떨며 살아야할지도 모르는 불안정한 세계에 과연 넘을 수 있는 문턱이라는 게 존재하긴 할까
효신은 의문한다
세계의 모든 문턱이, 라헬에게는, 곧 자신이 되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영원히 존재를 드러낼 수 없는 인생이 감히 누군가의 손을 잡아도 되는 것인가
서로를 지치게 할 시작은, 할 수 없다고.
"... 용서 안 해요"
기어코 한 발 물러서는 효신을 향해 입술을 꼭 깨문 라헬이 말한다
"... 하지마"
효신은 담담하게 대답한다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 그래"
용서하지 않는다면 잊혀지지도 않을까
효신은 그런 것에 희망을 거는 스스로를 비웃는다
"... 처음부터 없었다고 생각해, 온전한 이효신 같은 건.
네 옆에 있는 한 나는 영원히 반쪽짜리로 숨어살거나 추격당해야만 해. 여기까지 하자 그러니까"
라헬의 꽉 맞잡은 손이 파르르 떨린다
"진심이라면서요"
애써 의연하게 고개를 치켜들며 간신히 냉정한 목소리를 자아낸다
가느다란 실타래같은 목소리는 그러나 언제 끊길까 조마조마하다
효신은 위태하게 흔들리는 마지막 음절에 처연하게 건너본다
"진심이야"
"그리고 그 진심, 내꺼라면서요"
효신은 가능한한 길게 라헬을 바라보고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라헬은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젓는다
"차라리 내가 싫다던가, 견딜 수 없다던가, 그런 말을 해요. 차라리 그게"
"... 유라헬"
효신은 폭주하려고 하는 라헬을 불러세운다
"... 넌 내게 소중한 사람이야, 내가.. 영화하겠다고 이름을 버린 내가 영화를 포기하고 싶어질만큼"
"그러면 왜!"
"... 그러니까,"
이해할 수 없다고 항변하는 자신을 향해 짓는 미소가 슬퍼서, 라헬은 더 묻지 못하고 만다
효신은 그저 차분하게 변명답지도 않은 이유를 댄다
"... 소중하니까 안돼. 앞으로도 몇번이고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나는 도망칠거야 아니 그대로 영원히 사라져버릴 수도 있어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사람, 그림자처럼 가짜 이름 뒤에 숨어서 사는 인생, 유라헬의 옆자리로는 아니야
... 무엇보다 어머니께 소개할 수 있겠어 나를? 어떤 이름으로? 그걸 납득하실까?"
라헬은 자연스럽게 평범한 남자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던 에스더와의 대화를 떠올린다
그건 비단 에스더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부모의 원칙이고 모든 자식의 의무였다
지겹고 답답하지만 감히 깨버릴 생각은 하지 못했던 당연히 주어진 사명 같은 것.
그 모든 원칙과 의무를 모두 파괴해버린 장본인이 묻는다
넌 그 원칙과 의무를 깨버릴 수 있느냐고
그 모든 걸 깨버릴 정도로 감수할 수 있겠느냐고
나는, 네가, 할 수 없다는 걸 안다. 고
적어도 나는. 너에게. 그 길을 걷게 할 수 없다.고
새하얗게 질려가는 라헬을 바라보며 효신은 슬프게 웃는다
괜찮아, 라는 듯이 작게 끄덕이는 고개짓에 라헬은 순간 화가 치밀어오른다
"계약위반이예요"
라헬은 심술궂게 입술을 비튼다
"날 김탄이랑 비교하지 말아요. 선배 자신을 김탄과 같은 위치에 놓지도 말아요. 절대로. 그렇게. 빠져나가게 두지 않아"
순간 어리둥절해진 효신은 멍하니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라헬을 바라본다
라헬은 처음으로 효신이 '멍.청.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거의 손에 넣었고 이제 놓아버리려고 하는 게 뭔지도 모르는 멍청한 남자라고.
이미 한번 거절당한 손을 거둬들인다
심호흡을 하고 숨을 가라앉힌다
창백했던 얼굴에 서서히 빛이 돌아온다
절대로 자비를 베풀 생각이 없다는 듯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오만한 여왕은 우아하게 잔혹한 명령을 내린다
"스스로를 증명해요. 영화를 만들거라고 했죠, 아니 무슨 방법으로든 이름 되찾아요
내가 선택한 사람이 감당하지도 못할 일을 벌이는 김탄 따위랑 같은 급일 수는 없어요
그때까지 절대로 잡히지도, 사라지지도 말아요. 온전한 이효신이 여기 있다는 걸 어떻게든 증명해요
우리 얘기는 그때 다시 시작이예요"
그렇다.
자신은 세계를 버리는 일 따위 할 수 없다
아니 그렇게 할 이유도 없다
금지된 것을 얻기 위해서 매번 세계를 버려야한다면 대체 세계는 얼마나 자주 멸망하고 다시 세워지기를 반복해야한단 말인가
세계를 버리지 않고도, 모두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고도, 원하는 걸 얻어낼 수 있다
모든 것을 얻을 수 없다고 해도 정말로 중요하다면 그것만은 얻어내야만 한다
중요한 건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얻을지 결정하는 것,
그건 세계를 버리는 일과는 다르다
김탄도 그랬지, 이젠 선배도 그런가요.
세계를 버린다느니 하는 그런 극단적인 말. 난 늘 이해할 수가 없었어.
라헬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어이없어 웃는다
어쩌면 누군가에게 끌리는 취향 같은 건 바뀌지 않는 모양이다
다만 이번엔 세계와 바꿔야하는 대상이 자신으로 바뀐 것뿐.
그러니 말해봐요,
나는 당신에게 정말 중요한 존재인가요.
그 대답을 들을 때까지 나는 무엇을 포기할지 결정하지 않겠어.
효신은 태엽이 풀린 인형처럼 아주 느리게 움직인다
이렇게까지 바보같은 사람이 아니었는데, 라고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던 라헬은 생각한다
여전히 적절한 반응을 할 수 있을만큼 깨어나기까지 시간이 좀더 필요해보인다
라헬은 문득, 엄마가 순진할정도로 순하고 고지식했던 아빠를 만났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하는 질문을 태어나 처음으로 떠올린다
애초에 어떻게 만나게 된건지 상상도 안가는, 그래서 헤어질 때도 그다지 아까워하지 않은 조합이었던 부모였다
어쩌면 이런 관계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효신도 집안 내력이라고 우겨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효신은 이름도 버릴만큼 고지식과는 거리가 먼, 엄마 기준으로는 혁명적 위험인물이겠지만.
라헬이 엉뚱한 생각에 빠져있는 새 효신은 겨우 현실로 돌아온다
영원히 굳어있는 채면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할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
효신은 조각조각 흩어진 것 같았던 영혼을 끌어모아 단단한 가면을 쓴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초연한 표정.
모두의 신뢰를 받고 있던 그 학생회장의 얼굴.
그땐 자신도 그저 효신이 늘 그렇게 정돈되고 안정되어 있는 줄로만 알았다
자신의 격렬하게 흔들리는 혼란을 번번이 들키는게 그래서 창피하고 싫었다
저 담담한 얼굴이 어떤 시간을 지나 완성된 것인지 알게된 지금은,
저런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 자체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저런 얼굴을 할 때의 효신은 마음과 다른 '올바른' 결론을 이야기할테니까
아마도 조금의 유머를 섞어서.
아무렇지 않다는 듯 태연하게.
"유라헬"
예상대로,라고 해야할까
마침내 이름을 부른 효신의 목소리는 가볍다
가볍다 못해 청량하다
라헬은 눈을 감고 싶어진다
"다시 시작같은 건 없어. 네가 요구한 건 내 진심이었고, 나는 내 마음을 네게 줬어.
그러니, 거래는 끝났어. 어떤 계약 위반도 없이. 분명하게."
효신은 물끄러미 라헬을 바라본다
"그걸 어떻게 믿느냐고 하면 할 말은 없어. 확인해봐. 아마 넌 그림자가 하나 더 생겼을테니까. 귀찮을지도 모르겠네"
어깨를 으쓱하며 살짝 털어내는 효신이 자신의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걸 기뻐해야할지
이 바보 같은 상황에 화를 내야할지 라헬은 헷갈리기 시작한다
기어코 스스로를 그림자,라고 말하면서까지 한발을 빼고 마는 효신의 고지식함,
과거의 아빠와는 또 다른 고지식함에 짜증이 나려고 한다
왜 그저 모르는 척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
"웃기지 말아요"
라헬의 날선 목소리에도 효신은 더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반쪽짜리, 허상의 진심 같은 거 필요없어요. 그게 계약 위반이야. 내가 그걸로 만족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난 온전한 이효신의 마음을 원해요. 그냥 이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요.
그러니 도망치도록, 두 번 다시, 두지 않을 거예요. 증명해요. 할 수 있다면서요. 해내요."
아아 나의 강철나비.
너는 나의 생각보다 훨씬 강하고 오만했다
오만함 속에 감춰진 핏빛 물보라가 거세게 소용돌이친다
유라헬을 절박하게 만들고 말았다는 사실에 처절하게 흔들린다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 예상했던 그대로의 반응에 효신은 문득 눈을 감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상황을 음미하고 싶어진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존재가 자신을 증명할 것을 강요하면서까지 원해주고 있다는 것에.
아무도 자신을 원하지 않을 거란 불안감에 내내 시달렸던 생의 끝에
누군가가 필요가 아닌 대상으로 이토록 강하게 자신을 원하는 순간이 왔다는 것에.
그게 유라헬이라는 사실에.
이 순간을 멈춰버리고 싶다. 이기적이게도.
그러나 효신은 그저 눈을 두 번 천천히 깜빡인다
깜빡.
세계가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진다
깜빡.
세계가 깜깜해졌다가 다시 라헬을 담는다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도저히 밀할 수 없는 답을 요구하고 있는 그녀를,
지나치게 강하고 그래서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던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해진
그래서 더이상 지킬 수 없게 된
저 아름다운 강철 나비를.
파멸로 끌어들일 수는 없다
이 영원한 반쪽의 삶.
그녀는 아직 이 세계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
부모가 자식을 필요없다는 이유로 죽이기도 하고
자식이 부모를 거추장스럽다는 이유로 버리기도 하는
제정신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이 잔인한 세계를
아니 몰라야만 한다.
효신은 천천히 입을 연다
단단한 가면은 두번 다시 허물어지지 않을 요새 같다
라헬은 사자(死者)의 얼굴을 대면하는 듯한 섬뜩함을 느낀다
서늘한 표정과 달리 마침내 대답하는 효신의 목소리는 부드럽다
애써 만든 상냥함은 그러나 그 냉정한 종언을 감싸안지 못한다
"너의 세계로 돌아가 유라헬. 우리 거래는 끝났어."
=
Super Junior M - "一分后(After a minute)"
===================
엄청 길고... 엄청 무겁고.. 다시 훑어보니 번역투에 호응 안맞는 문장에..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지만
이미 손댈 수 없는 지경까지 가버렸는걸... 어쩔 수 없지.. 이런 글 미안해.
후반부가 도저히 안 써져서 끙끙 앓다가 그나마 저 노래를 듣고 좀 써져서.. BGM으로 첨부해봤어.. (가사가 효신이 같아서.. 사실 효신이를 생각하면서 썼던 건 전편에 첨부한 연연,이었어)
기다려준 냔들.. 원하는 전개, 원하던 글이 아닐 거 같아서 미안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어준 냔들 고마워, 늘,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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