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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게 난" - 주영 






덜컥, 


덜그럭,덜그럭 


둔탁한 금속음이 몇번인가 반복되고서야 힘겹게 문이 열린다 
무거운 철문을 열고 들어서자 겨우 두세뼘이나 될까, 신을 벗어두는 용도만을 위한 것이 분명한 좁은 '현관'이라 불러야할 공간이 
그리고 한발짝 낮은 턱을 올라서면 바로 서너평의 실내로 넘어간다 
습관처럼 익숙하게 발로만 신을 벗는 잠시의 유예동안 아직 불을 켜지 않아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후끈,하는 열기가 밀려든다 
저도 모르게 폐에 밀려들어 고인 열기를 밀어내려 숨막히는 한숨을 몰아쉬며 벽 한쪽의 스위치를 더듬어 찾아낸다 
달칵,하고 스위치를 누르자 몇번인가 깜빡거리던 형광등이 마침내 불을 밝히고 그제야 살풍경한 방이 모습을 드러낸다 
정면에 굳게 닫힌 불투명한 유리의 창 밖으로는 쇠창살 몇 개의 그림자만 어른거릴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제대로 된 가구조차 찾아볼 수 없는 이 방에 놓여 있는 거라고는 
거의 방의 일부분처럼 보이는 희미하고 허름한 얇은 담요 한장과 앉은뱅이 탁상뿐, 
방 구석에 차곡이 쌓여있는 가방 몇 개와 가방 위에 가지런히 접어놓은 티셔츠만이 
어디에도 '삶'의 흔적 같은 건 보이지 않는 이 공간에 그나마 누군가 있음을 드러낸다 


성큼 공간에 들어선 효신은 어깨에 메고 있던 배낭을 가방들 옆에 내려놓고 
계단을 올라오는 새 질척거리며 땀에 달라붙기 시작한 얇은 후드집업과 모자를 귀찮은 듯 벗는다 
순식간에 땀이 배여 소금기가 맺힐 것 같은 티셔츠를 벗어던진 뒤, 가방 위에 접어뒀던 셔츠를 집어들고 문 앞의 작은 욕실로 향한 효신은 
이내 훨씬 편해진 표정으로 머리에 맺힌 찬물기를 닦아내며 방에 돌아온다 
차가운 물로 한번 씻어내고 나자 내내 기분나쁘게 지면으로 끌어내리던 열기는 가신 것 같지만 
그럼에도, 얼마 전부터 자꾸만 의욕을 흐트러트리며 무기력으로 침잠하는 속도를 재촉하던 알 수 없는 피로감은 그정도로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더워서.이겠지. 


천천히 머리의 물기를 닦아낸 효신은 창틀에 걸려있던 옷걸이에 수건을 걸어두고 새삼스럽게 방을 둘러본다 

몇번째인지 기억나지 않는 방. 
보증금을 내고 잠시 몇달 또는 몇주 그도 아니면 며칠 머물렀다가 떠나기를 반복했던 공간들. 
이런 비슷비슷한 방들은 때로 컸다가 좁아졌다가 어두웠다가 밝아졌다가 하면서 조금씩 달라졌지만 
그저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 것만이 중요했을 뿐인 효신에게는 그 변화들이 큰 의미가 없었다 
이동이 반복될수록 효신은 '주변'이라는 '공간감각'에 점차로 둔해졌고 처음엔 한번에 옮기기에 버거웠던 짐은 점점 단촐해졌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생각보다 훨씬 적다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놀랍기까지 했다 

자신이 입고 먹고 쓰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한때 자신의 소유였던 그 많은 것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이젠 기억조차 가물해진 '그 과거'가 도무지 손에 닿질 않아서 효신은 가끔 자신의 과거가 모두 꿈이었던 건 아닐까 의아하기조차 했다 

그렇다고 지금의 이효신은 실재일까. 

누구와도 관계 맺지 않고, 
아무에게도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발걸음을 재게 움직이는, 
그림자와 같은 이 삶은 과연 꿈이 아닌 실재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점점 더 간단해지고 있는 저 가방 속 짐들처럼 자신은 계속해서 유실되고 있다 
이미 정체성을 잃어버린, 더이상 차이점도 의미도 없어진 이 공간들처럼 
언젠가는, 저 가방마저 놓아버리는 때가 오면, 자신은 무엇으로 존재를 확인받아야하는 걸까 


아노미 상태에 놓인 자신의 현실과도 같은 살풍경한 방을 낯설게 바라보던 효신은 
잠시후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마구 저으며 탁상 앞에 앉아 좀전에 내려놓은 배낭을 끌어당긴다 


촬영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후반작업이 시작되면서는 내내 편집실에 틀어박혀 살고 있었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게 빡빡하고 정신없는 촬영 기간 동안도 만만치 않았지만 
촬영 데이터와 함께 모니터와 단 둘이 남겨져 계속해서 편집기를 쥐고 화면을 바라보고 있어야하는 편집실의 시간은 몇배로 힘들었다 
차라리 현장의 혼돈과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돌발상황은 지금의 막막함에 비하면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효신은 한숨을 내쉬며 오늘 편집한 부분까지를 다시 확인하기 위해 데이터를 담아온 맥북을 꺼내려 배낭을 연다 
배낭 안에 손을 슬쩍 담그기만 해도 쑥,하고 손에 잡히는 꽤나 두터운 구형 맥북을 익숙하게 끄집어낸다 
언제 고장날지 모르는 불안불안한 기종이지만 버텨주고 있는 것만도 다행이다 


툭, 


맥북에 딸려나온 종이뭉치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저절로 펼쳐진다 
제멋대로 두어번 접혀져있던 신문의 1면을 확인하고 효신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는다 



『황태자와 황녀의 한밤 데이트, 빅딜 임박?!』 

헤드라인만 읽어서는 무슨 내용인지 짐작할 수 없는 스포츠신문 첫페이지의 기사에는 
효신이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의 낯선 이야기가 완벽하게 조직된 소설마냥 잘도 쓰여있었다 

입영통지서를 받아든 스무살이라도 된 듯이, 꼼짝않고 신문을 보고 있던 효신은 
침을 두어번 삼킬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깜빡,하는 형광등 불빛에 천천히 손을 내밀어 내키지 않는 듯 조심스럽게 신문을 집어든다 
펼쳐진 첫 페이지 사진 속 두 인물, 아니 정확하게는 그 중 한 사람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망원렌즈로 당겨찍은 것이 분명한, 그래서 픽셀이 흩어져 날카로운 윤곽이 부드럽게 둥글어진 사진 속의 그녀는, 


웃고 있다. 



'선남 선녀의 만남' 
'정략 결혼' 
'초대형 빅딜'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게 정확하게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소문은 이번엔 촬영현장에 틀어박혀있던 효신의 귀에까지 가닿을만큼 강했다 
그들만의 세계에서 은밀히 돌아다니던 누군가의 염문과 누군가의 스캔들은 
그 주인공이 강력했던 만큼 이번엔 언론과 찌라시를 타고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미모의 상속녀와 젊은 그룹 오너의 은밀한 만남. 

국내 최대 패션기업인 RS인터내셔널의 상속녀 유라헬과 
리조트 사업을 중심으로 전방위적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는 제우스 그룹의 3세 경영인 최영도 사이의 열애설 

그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미 효신이 알고 있던 과거와 새로운 현재와 그리고 그보다 더 앞서나간 추측까지 덧붙여 
세상의 입에 오르내리고 그걸 또 언론은 보도라는 이름으로 확인했다 
둘의 뛰어난 외모가 1차적인 관심이었고 
이 관계가 '결혼'이라는 형태로 공고히 성사될 경우 자연스럽게 이어지게될 빅딜급의 두 기업의 합병 가능성과 
이미 부모세대에 한번 일어날뻔 했던 일이라는 과거사, 남매가 될 뻔 했던 두 사람이 연인으로 발전했다는 호기심을 자극하기 딱 좋은 배경, 
그리고 라헬의 영국 유학시절 영도가 종종 런던을 찾아갔다는 과거 행적과 둘 사이가 허물없고 가깝다는 측근의 증언까지 
이 모든 정황이 정략 결혼이냐 세기의 연애냐를 포함하여 호사가를 만족시킬 모든 조건을 갖춘 둘의 열애설은 
두 기업 홍보팀을 통해 공식적인 부인기사까지 배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계속 되었다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 밖에 없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찌라시에 등장하는 두 사람이 함께 있었다는 목격담과 일주일에 한번 이상 들려오는 이런 기사들. 


효신은 미간을 찌푸린다 


왜일까. 
무엇에 이렇게 초조한 것인가. 
무엇이 이렇게 기분나쁜 건가. 
왜 이렇게 자꾸 화가 나려고 하는 건가. 


마치, 

아직도 희망이란 걸 붙들고 있었던 것처럼 
마치 그 희망이란 것에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처음부터 없었던 신기루에 무언가 기대를 걸기라도 한 것인가 
그 오아시스를 지도에서 지워버린 것은 스스로였으면서. 


효신은 스스로 한심해지는 걸 잊기 위해 고개를 젓는다 
시야 속의 사진이 함께 흔들린다 
안 그래도 흐릿했던 그녀의 얼굴이 휘,하고 흩어진다 



이 사진 때문이었다 
그저 무심히 지나치던 편집실 탁자 위에 놓여있던 신문에서 이 사진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접어 가방에 넣었다 

들려오는 소문들은 불편한 마음에도 안 들리는 척 지나칠 수 있었고 
자극적인 헤드라인 같은 건 눈을 감아버리면 모른 척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사진 속, 


자연스럽게 라헬의 어깨를 감싸며 에스코트를 하고 있는 영도의 당당한 자세 
오만하게 보이기까지하는 자신만만한 미소 

지금 자신이 라헬의 옆에 설 수 없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눈으로 자신의 자리가 없다는 걸 확인하는 건 또다른 고통이었다 
영도와 함께 서있는 라헬의 모습이 더 자연스럽다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직면하자 
그나마 알량하고 끈질기게 지켜왔던 자존심마저 깎아져나가는 것 같았다 
제가 감히 넘보았던 세상이 어떤 것인지, 가능성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는 걸 굳이 이런 방식으로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그 상대가 최영도라면 더더욱이. 




어릴 적부터 집안은 축소된 정치판이자 끊임없이 시험당하는 위태로운 곡예장였다 
정치적인 대응이라면 눈치만 힐끔 살펴도 금새 얼굴을 다르게 할 수 있을 정도 단련되었다고 믿었던 효신에게 
고등학교 사회의 정치,와 역학관계라는 건 지나치게 쉽고 단조로웠다 

다만, 

최영도.라는 이단아를 제외하고는. 


모두에게 원하는 것을 주고 모두로부터 적절한 존경을 끌어내는, 모두에게 적합한 이미지만 보여주던 '이효신'이 
사실은 허울좋은 허상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걸 알아차린 유일한 상대. 


그 비릿한 미소, 
사람의 신경을 건드리는 느릿한 말투 
언제든지 공격할 채비를 갖춘 육식동물의 위협적인 권태 

효신의 질서에 편입되지 않은 존재였던 영도는 그때도 불편했다 
아니 지금은 위압감을 느끼고 있다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그때야 영도가 질서에 반하고 있어도 그 질서를 바꿔놓을 힘 또한 없어서 여전히 효신의 질서가 유효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지금은 더이상 절대적인 룰이 존재하는 학교도 아니며 영도는 이제 자신의 게임 룰을 적용할만큼 성장했을 것이다 
남자로서든 사회적인 입지로든 어쩔 수 없이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복잡한 심경으로 우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영도를 바라보던 효신은 
자연스레 또다시 영도의 옆에 선 라헬에게 시선을 향한다 
걷고 있던 중인 건지 영도를 향해 몸을 약간 기울인 채 웃고 있는 라헬의 미소, 

미소, 


다시 가슴 한 켠이 짜르르 해온다 


미소. 


사진의 거리가 멀어서 잘 보이지 않는다 
정말로 웃고 있는 걸까 
그토록 한번 만나기 어려웠던 미소가 정말 이 사진 속의 '그'를 향하고 있는 것인가 
흐릿하지만 어딘가 부자연스럽다고, 찰나의 착각일 뿐이라고 억지를 부리고 싶다 
저 미소가 향하는 상대가 저, 최영도 일리가 없다고. 


또다시, 


입술을 삐죽이며 억지로 참다가 결국 터져나오며 꺄르르 쏟아지던 라헬의 웃음을 떠올리고 만다 
그 순간의 빛이 맴돌던 갈색 머리칼과 휘감아 안고 싶어지던 향기를 
마지막 그 순간의 그 미소를 
저만을 향한다 믿었던 - 어떻게 그렇게 맹목적일 수 있었을까! - 그 반짝거림을 



고통스럽게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다 
눈을 감아도 사라지지 않은 잔향이 코끝을 맴돈다 
마치 당장이라도 존재를 복원할 수 있을 정도로 점점 더 강하게. 


효신은 결국 신문을 놓아버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급하게 벗어놓았던 후드 집업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아쥐고 방 밖으로 도망치듯 나온다 

벌컥 문을 열자 어두컴컴한 하늘이 펼쳐진다 
손잡이를 놓자 무거운 철문은 제자리로 돌아간다 
조급하게 라이터를 당겨 서둘러 담배갑에서 꺼낸 담배에 불을 붙인다 
산소호흡기라도 단 환자처럼 거친 호흡으로 허겁지겁 담배를 한모금 빨아들인 후에야 방망이질치던 가슴고동이 가라앉는다 

효신은 다시 한번, 이번엔 천천히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고 서서히 내뿜는다 
빈 하늘에 하얀 담배연기가 흩어지는걸 바라보고 있자니 그제야 꽁꽁 묶여버린 마음이 겨우 흐릿해진다 

저 연기처럼 
허공을 향해 부서져버릴 물거품과 같은 거라고 

애써 스스로를 설득한다 


이미 지나간 일이야 
무엇을, 아니 누구를 선택하든 그건 그녀의 자유.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난 일이라고 
'왜'냐고 묻는 것조차 주제넘는 일. 
마지막으로 내민 손을 내친 것은 스스로가 아니었던가. 



희뿌연 담배연기가 까만 밤하늘로 빨려들어가듯 사라진다 
옥상의 옥탑방 아래로 보이는 세상이 마치 미술관에 걸린 유화처럼 반짝인다 
스크린 위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효신은 아찔해진다 

현실감이 사라진다 
아니 도피하고 싶어진다 
이미 한 번 세계를 버렸다 
두 번 버리는 것은 더 쉬울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완성하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지금 이 순간. 


거친 한숨이 쏟아져내린다 


효신은 무겁게 머리를 쓸어올린다 
머릿 속을 점령한 '회의'란 녀석을 지워내기 위해 결국 두번째 담배가 필요하다 
연달아 두 대의 담배가 연기로 완전히 변해버렸을 때에야 겨우, 고통도, 분노도, 회한도 삼켜낼 수 있다 
효신은 두번째 꽁초를 가볍게 비벼끄고 옥상 한 켠에 놓인 재떨이 대신의 빈 화분에 집어넣는다 


하아 - 


방에 돌아가기 전 버릇처럼 돌아본 하늘은 여전히 까맣다 
효신이 토해낸 감정도, 뿜어낸 연기도 어디로 다 삼켜버렸는지 보이지 않는다 
인공위성조차 드러나지 않는 검은 하늘의 어딘가에 별이 숨겨져 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저 암흑에는 함께 웃어줄 별도, 도르래 소리를 들려줄 우물도 없다 

효신은 순간, 자신이 세계의 유일한 생존자 또는 유일한 사망자인 것처럼 막막해진다 




탁, 탁, 탁, 탁 



다급한 발소리가 효신을 깨운다 
정신을 차린 효신은 의아하게 계단 쪽을 바라본다 
몸을 감춰야하는 것인지 매번 이렇게 놀라야하는 것이 지겨운 것인지 판단을 망설이는 동안 
가까워진 발소리는 그 짧고 급한 간격만큼 당혹스런 표정의 주인공을 계단 위에 올려놓는다 



"형"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효신은 미간을 살짝 찡그린다 
의아한 표정에도 아랑곳 앉고 급히 다가온 탄은 효신의 어깨를 붙들고 이리저리 살핀다 


"무슨 일이야?" 


밤중에 이 무슨 호들갑인가 싶어 영 불편한 얼굴로 묻지만 
탄은 굳이 효신이 아무 일도 없다는 걸 꼼꼼이 확인하고 나서야 오히려 버럭 화를 낸다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휴대폰 왜 꺼져있는데?" 


효신은 잠시 뜨악한 표정으로 탄을 보다가 천천히 대답한다 


"요즘 편집실 박혀있어서 휴대폰 확인 잘 안 해, 쓸데없어서" 
"무슨 전화를 꺼두려고 들고 다니냐 형은?! 좀 재깍재깍 연락 되게 안 돼?" 
"나한테 연락할 사람이 누가 있다고" 
"내가 있잖아, 내가!" 


이건 무슨 의부증 걸린 여자친구 같단 생각이 문득 스치고 지나가서 효신의 표정은 점점 어색해진다 
자신이 휴대폰을 대강 다룬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갑자기 찾아와서 흥분하는 이유를 알 수 없으니 황당하기만 하다 


"그래, 미안하다, 앞으로는 잘 켜놓을게. 근데 무슨 일이야 대체" 


차분히 다독이는 말에 씩씩거리던 탄도 조금씩 가라앉는다 
의아하게 대답을 기다리는 효신을 한번 보고 주변을 불안하게 휘둘러본 탄은 급하게 팔을 잡고 끌어당긴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 
"어?" 


계속해서 힐끔힐끔 주변을 돌아보는 태도에 효신까지 덩달아 불안해진다 
여전히 긴장한 채 두리번거리는 탄을 따라서 표정이 굳은 효신은 앞장서서 방에 들어간다 
뒤따라 들어온 탄은 조심스레 소리없이 문을 닫는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방에 들어선 효신이 아직 뒤에 선 탄을 돌아보며 다시 묻는다 
탄은 잠깐 망설이다가 지난 몇년 간 효신에게 반복해서 물었던 그 질문을 꺼내놓는다 


"별 일 없었지?" 


누군가에게는 안부 인사 
그리고 또 누군가에게는 생존의 확인 


효신은 갑자기 답답해진다 
겨우 억눌렀던 그 감정이 올라와 다시 도망치고 싶어진다 


몇번째일까, 탄과 이런 대화를 주고 받았던 것이. 
언제까지나 도망쳐야만하는 자신의 운명을 일깨워주는 이 질문은 언제까지 계속 되어야 하는 걸까 

최고의 은인이자 벗어날 수 없을 족쇄. 


효신은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눈을 물끄러미 보다가 탁,하고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든다 


"일은 무슨 일" 
"누가 찾아왔다던가" 


잔뜩 가라앉아 있는 효신의 목소리가 흔치않은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내는데도 
탄은 에둘러 부정하는 그 말 끝을 잡아채듯 급하게 덧붙인다 


효신은 다시 한 번 눈을 살짝 찡그린다 


누가 찾아온단 말인가 
아니 그 누가 찾아왔다면 제가 아직 여기 머물러 있을리가 있는가 


대체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다시 젓는다 


"무슨, 일이길래 그래? 누가 찾아왔어?" 
"아니, 응... 아니." 


어울리지 않게 말을 더듬으며 대답을 거듭 번복한 탄은 스스로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잘 정돈되어 있던 머리를 벅벅 헝큰다 
효신은 답답한 얼굴로 탄을 본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거야 아니란 거야?" 
"하여간 누가 찾아오거나 그런 낌새는 없었단 말이지?" 
"대체 누가 날 찾아오는데?" 
"누구든" 
"누구든 근 일주일 새 날 찾아온 사람은 니가 처음이다" 


촬영이 끝나자마자 촬영비 정산 등등 처리에 몇 주 그리고 편집실에 틀어박힌지 또 몇 주째였다 
촬영 시작할 때 여름의 기운이 막 느껴지려는 봄의 끝이었던 날씨는 어느새 더위의 절정을 지나고 있었다 
내내 편집실에 있었던 효신이야 기계 냉방을 위해 틀어놓은 에어컨 덕분에 긴 팔을 입지 않으면 감기에 걸릴 지경이었지만, 
일단 바깥 날씨는 그랬다 
시간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흐르고 계절은 그렇게 바뀌고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효신이 만난 사람이라고는 작업 도와준 PD 와 Key Staff 몇명, 아주 가끔 연락오는 탄이 전부였다 
편집실과 집, 회의를 위해 간혹 들리는 카페 외에는 간 곳도 없으니 누구를 만날 틈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다 


대체 무엇이 탄을 이토록 불안하게 하는 건가 
효신은 이제 정말로 궁금해졌는데 효신의 확답을 들은 탄은 오히려 안심한 듯 산만해진다 


".... 담배 다시 피워?" 


그제야 담배냄새를 맡았는지 효신을 향해 킁킁거리면서 잘생긴 얼굴을 찌푸린다 


기집애 같이 굴기는. 


언젠가 맞담배를 피운 적도 있으면서 몇년전 무슨 계기였는지 담배를 끊은 탄이 
깐깐한 시어른마냥 효신에게서 담배 냄새만 맡아도 꼭 아는 척을 하며 찡그리는 폼이 우스워서 
피식하고 웃어버린 효신은 어쩔 수 없이 같은 질문을 했던 누군가를 떠올리고 미소를 어색하게 지운다 


"그게 다야?" 
"응?" 


어느새 차가워진 목소리에 그때껏 형도 이제 나이가 있느니, 건강을 챙기라느니, 비타민은 먹냐느니 
하면서 궁시렁 거리고 있던 탄은 잠시 멍해진다 


"그것만 확인하면 되는 거였어?" 
"아... 그게..."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고민하던 탄의 눈에 효신의 뒤쪽 바닥에 놓인 신문, 아니 그 펼쳐진 면의 사진이 들어온다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사진 속 익숙한 두 얼굴을 확인한 탄은 새삼스럽지도 않게 딱딱해진다 
대답을 하려다 말고 멈춰버린 탄을 보고 이유를 찾아 뒤를 돌아다본 효신은 그제야 잊고 있었던 존재를 발견하고 멈칫 한다 
들키고 싶지 않은 치부를 들킨 것 같아 당황한 효신의 뒷모습에 슬쩍 눈길을 준 탄은 조심스럽게 입을 뗀다 


"형" 
"...." 
"진짜 유라헬이랑," 
"... 아무 관계도 아니야" 


효신은 더이상의 말은 듣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흔든다 
지나치게 빠른 부인에 탄은 뒷 말을 차마 잇지 못하고 망설인다 


유라헬이 왜 몇년만에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 
빚의 대가가 왜 이효신의 소재였는지 
그리고 그 둘은 그날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한건지 


자신이 효신을 팔아넘긴 것 같은 죄책감을 느끼던 탄은 그 이유들이 궁금했지만 효신은 결국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감히 라헬에게 이유를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았고 효신에게 그날 일을 슬쩍 언급했을 때는 
딱 지금처럼 급속도로 냉각되는 묵비권 행사에 당황한 나머지 더이상 묻지 못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설명해주겠지.라고 체념하고 서서히 잊어갈 무렵 
얼마 후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한 저 스캔들이 터졌다 
유라헬과 최영도라니 두 사람 모두를 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탄으로서는 잘 상상되지 않는 조합이었지만 
그런 부조화한 커플이 오히려 더 흔한, 그러니까 조화나 애정으로 맺어지지 않는 것이 당연한 세계에 그들 모두는 살고 있었다 
마음 한 켠에 어쩐지 효신이 걸렸지만 조개처럼 꾹 다문 입은 열릴 줄 몰랐고 
효신은 촬영으로 바빠지고 자신도 다시 해외를 유랑하기 시작하면서 그 모든 일은 다시 희미해졌다 


오늘까지는, 


아니 몇시간 전까지는, 


그러니까 저 사진 속 주인공을 만나기 전까지는. 



제우스 그룹의 CEO인 영도와 전세계를 떠돌아다니고 있는 탄은 처지가 다른만큼 자주 만날 수 없었지만 
그래도 탄에게 영도는 거의 유일한 친구였다 
다행스럽게 영도는 탄을 허물없이 대해주었고 은상과 헤어진 뒤 탄은 영도의 그러한 호의에 더욱 감사했다 
제국그룹의 (한때) 후계자였다는 배경보다 어쩌면 제우스 그룹의 젊은 주인과 친분이 있다는 사실이 
탄이 아직까지 이 말 많은 사교계에서 무시당하지 않고 입지를 확보할 수 있는 큰 이유라는 걸 알아서였다 


영도와는 거의 일년 만이었다 
해외에 일년의 절반은 나가있는 탄이 그만큼이나 자주 출장을 다니는 영도와 시간을 맞춘다는 건 그만큼 어려웠다 
그래도 어색하지 않은 것은 험난한 악동의 시기를 함께 지나왔기 때문인지도 몰랐고, 
또한 - 탄에게는 다행스럽게도 - 영도가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만 그 상대가 유라헬이었다는 것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동안의 근황을 주고 받고 어느정도 분위기가 편해진 후 느슨해진 탄이 농담처럼 '유라헬은 어때?'라고 물었을 때 
영도는 의미심장하게 어깨만 으쓱할 뿐 어떤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래서였다 그 몸짓을 수줍음으로 해석하고 괜히 짓궃게 더 파고들었던 것은. 


'니가 유라헬을 보러 런던에 수시로 드나들었다는 건 몰랐는데 말야' 
'아, 뭐 굳이 말하자면 그렇지, 유라헬을 보러가기도 했지 몇 번' 


의외로 순순히 인정하는 태도에 조금 놀랐다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탄을 보던 영도는 의뭉스럽게 물었다 


'그나저나 너 유라헬이 빚 받아 갔다면서?' 
'응? 아... 응' 


갑작스런 화제 전환에 의아하게 바라보자 영도는 싱글싱글거리며 과장스럽게 손을 펼쳤다 


'이야, 너 나한테 밥 한번 사야하는 거 아니냐? 니 번호 내가 유라헬한테 줬는데" 


아아, 그렇게 된거였군 


'그래, 밥만 사겠냐? 뭐든 말 해. 니가 필요한 게 있을지 모르겠다만' 


그제야 유라헬이 어떻게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게된 탄이 무심히 대꾸하자 영도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뭔가 재미있는, 대개는 상대를 괴롭힐 장난거리를 찾아냈을 때 사악하고 곱게 휘어지던 웃는 눈을 보고 
심상치 않다,라는 느낌을 받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근데 유라헬이 뭘 댓가로 내놓으라고 그러던?' 
'어?' 
'뭔가 요구했을 거 아냐, 탕감의 조건으로' 


짐짓 궁금해 죽겠다는 듯 갸우뚱하고 보는 영도에게 뭐라 답해야할지 몰라서 머뭇거리던 탄은 그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야... 그걸 내가 어떻게 말하냐?' 
'뭐어야, 엄청 위험한 거라도 말했나보네? 뭐, 기업 비밀 유출이라도 하라든?' 
'...뭐, 비슷해. 하여간 나한테는 묻지마, 유라헬한테 직접 듣던가, 난 말 못하니까' 


라헬과 효신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왜 유라헬이 그렇게까지 효신을 찾고 싶어했는지 알지 못하는 이상 
효신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지금까지 감추는데 조력한 자신이 먼저 효신의 이름을 말할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던 걸 보면 라헬도 효신의 존재를 드러내거나 말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한 사람의 인생이 걸려있다면 기업 기밀 같은 것보다 더 무거운 문제일 수도 있었다 

입을 꾹 다문 탄을 보며 영도는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직접 들으란 말이지.... 거참... 궁금하네 두 사람이 모두 서로에게 물으라고 하는 이유' 


묘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빙글거리는 영도를 피해 시선을 돌렸다 


'이야, 무슨 술이 이렇게 많냐? 이거 다 마시면 제 명에 못 살아 적당히 기부도 좀 하고 그래라, 내가 하나 가져가도 되냐?' 


어색하게 영도의 방 한쪽에 장식되어 있는 술병을 세어보면서 어설프게 딴 소리를 늘어놓던 탄은 
무심히 날아온 영도의 말에 순식간에 얼음처럼 굳고 말았다 


'참, 요즘 효신선배는 잘 지내냐?' 


그 이름을 듣던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삐그덕거리는 기름칠 안 된 로봇처럼 돌아본 자신이 대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아무리 해도 제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이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있기를 바라면서 탄은 꿀꺽 침을 삼키고 모르겠다는 듯 반문했다 


'어?' 
'이효신, 우리 때 학생회장 했던 선배. 기억 안나는 건 아니지?' 
'아... 뭐....' 
'너랑 친했잖아, 왜 너랑 나랑 싸울 때도 은근 니 편 들어주고' 


영도는 그립다는 듯이 아아, 하고 머리 뒤로 손깍지를 하고 소파에 벌렁 기댔다 
여전히 불안하게 탄은 머뭇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랬던가, 기억이 잘' 
'그랬어 분명. 너 보고는 당장 올라가라고 그러고 날더러는.... 뭔가 욕을 했던 거 같은데.. 
 근데 참, 그 선배 목소리는 근사했어 욕할 땐 더 근사했던 거 같고' 
'그런 적도 있었나? 난 기억이 전혀 안나는데.. 우리가 싸웠던 게 한두번도 아니고' 


어색하게 웃으며 얼버무리는 탄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영도는 금새 싱글거리며 입꼬리를 사악,하고 올렸다 


'뭐, 기억 안 나면 말고' 
'그래, 그게 중요한 것도 아닌데' 


의외로 금새 흥미를 잃은 영도의 태도에 안심한 탄은 재빨리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그 말에 오히려 영도는 조금까지 싱글거리고 있던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래서?' 
'응?' 
'효신 선배는 잘 지내냐니까? 로스쿨 다닌댔나? 집안이 그러니 당연하겠지만. 
 아아, 오늘 선배만 있으면 완전 그날 재현인데 아쉽네. 요즘 뭐해 선배?' 
'어? 아... 뭐.. 그렇지... 잘 지내겠지 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더듬거리는 대답에 오히려 영도는 만족스러운 듯 싱긋 웃었다 
그리고는 비밀이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단 둘이 있는 방인데도 굳이 얼굴이 바싹 가져다대고 속삭였다 


'그거 아냐?' 
'어?' 
'이상한 얘길 들었거든 내가' 
'... 이상한 얘기?' 


말로만 이상하다고 표현했을 뿐이지 거의 부딪히기 직전까지 다가와 마주한 영도의 눈은 만난 이래 꼽을 정도로 총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리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영도는 의뭉스럽게 입꼬리를 슬쩍 올려 웃더니 더 낮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효신 선배 말이야' 
'....' 
'한국에서 본 사람이 있다고 그러더라고, 뉴욕인지 LA인지 시카고인지 하여간 어디 멀리 있어야 되는 사람이' 
'.... 그래?' 


딸꾹질이 나올 것 같았다 
갑자기 효신의 이름이 등장하고 그리고 이제 효신의 소재에 대한 의문까지. 
이 이야기가 등장한 이유를 짐작할 수 없으니 무기력하게 쥔 두 손에 땀이 맺혔다 
그런 탄을 아랑곳 않고 영도가 다시 속삭였다 


'진짜 신기하지 않냐? 미국에서 로스쿨 다닌다는 사람이 서울에 나타나다니. 도플갱어도 아니고. 너 뭐 아는 거 없어?' 
'어?.... 그... 글쎄, 한국에 들어왔나보지, 방학이라 잠깐 들렀나보네' 


긴장해서 식은 땀이 맺힐 것 같았다 
겨우 겨우 둘러대며 얼버무리는 탄의 대답을 듣고 있던 영도는 재미있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탄의 어깨를 세게 내려쳤다 


'뭐냐, 너도 안 친한 거였냐? 난 너는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 뭐.. 나도 상황이 이러니까' 


제발 이 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라며 애써 건성의 대답을 하고 있는 탄을 물끄러미 보던 영도는 
장난스러웠던 좀전과는 다른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김탄' 
'응?' 
'혹시 효신선배랑 연락되면, 말 좀 전해라' 


겨우 고비를 넘겼나 생각했던 건 착각이었다 
저에게 말을 전할 것을 요구하는(그건 부탁이 아니라 요구였다 명백히) 영도의 얼굴은 
탄이 기억하는 한 몇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차갑고 위협적이었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공격신호로 받아들이고도 남을 만큼. 


'내가 할 말이 있으니 얼굴 좀 보자고' 


탄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고, 무엇을 더 알고 싶은 걸까 
자신은 어디까지 숨기고 어디까지 말해야하는 걸까 
이미 라헬을 효신에게 데려간 것만 해도 탄은 효신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너무 많은 사람을 잃은 탄에게 효신은 충분히 상처입힌 가족을 제외하고는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사람이었다 
라헬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전했을 때의 효신은... 마치 절망에 빠져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표정과 죽어버린 눈동자를 탄은 효신이 병원을 탈출해 자신을 찾아왔을 때 단 한번 보았다 

영도가 무엇을 원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또다시 그런 표정을 마주할 수는 없었다 
탄은 고개를 저어버리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숨막히는 순간이 영원처럼 지속되었다 
꼼짝없이 올무에 걸린 사냥감처럼 저를 가만히 보는 영도의 차가운 눈동자에 사로잡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참을 말없이 탄을 바라보고 있던 날카로운 눈매가 스륵 흩어질듯이 가늘어졌다가 느슨하게 휘었다 


'야야, 긴장 풀어, 누가 보면 내가 너 협박하는 줄 알겠다' 
'아... 아하하 그게 또 그렇게 보이려나' 


싱긋 웃으면서 툭 하고 제 어깨를 치고 벌떡 일어나 술병이 늘어선 장 앞으로 걸어가는 영도의 뒷모습에 대고 
탄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애써 감추고 어설프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어느 거 가져가고 싶은데, 맥켈란? 이거 귀한 건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영도는 장에서 병을 몇 개 꺼내보였다 
제 방에도 놓여있고 집의 창고에는 아예 쌓여있을지도 모를 위스키와 독주에 관심은 전혀 없었지만 
화제가 바뀌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있었기에 탄은 아무렇게나 장단을 맞추며 그 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영도는 결국 그 이후로 다시 효신의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 
탄이 다시 라헬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었다 


영도의 집을 나서자마자 효신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 꺼져있다는 음성뿐이었다 
불안한 마음에 얼 마전 거처를 옮겼다며 효신이 보내준 문자의 주소로 단숨에 달려왔다 
오는 길 내내 별의별 가능성이 다 떠올랐다 
이미 불이 꺼진 채 비어있는 방 - 그런 방을 탄은 본 적 있었다, 떠난 후의 공허를 - 을 마주할까 두려웠다 

멀쩡한 모습으로 여유롭게 담배를 피우고 있던 효신을 보자 안도하면서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대답에 안심하고 나자 이제 그 이유를 말해야할지 망설여진다 
아니 조금전까지만 해도 영도의 말을 전하고 조심하는 게 좋겠다고 경고하려고 했는데, 
명백히 조금 전까지 누군가 - 그 누군가가 효신이 아니면 누구겠는가 - 보고 있었던 신문이, 
바로 그 기사, 그 사진이 펼쳐져있는 걸 발견하자 그 사진 속 주인공의 말을 차마 전할 수가 없다 



"... 김탄, 탄아, 야 김탄" 



세게 저를 흔들면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탄은 번뜩 생각에서 깨어난다 
의아해하면서도 진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하고 걱정스럽게 보고 있는 효신을 깨닫자 
입 속에서 맴돌고 있던 이름을 저절로 꿀꺽 삼켜버린다 

효신의 어깨 너머로 여전히 그 사진이 보인다, 그 사진 속의 두 사람도. 
흐릿한 사진일텐데, 제대로 찍혔을리가 없는데도 탄에게는 너무 선명하게 드러난다 

어떤 마음으로 효신이 저 사진을 펼쳐보았을까 

한번도 먼저 라헬의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 
그날의 일도 아니 그 전의 소문들에 대해서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아무 관계도 없다는 짧고 단호한 한마디 뿐, 
그러나 탄은 그 말을 하는 효신의 눈에 스쳐지나갔던 절망을 읽었다 
자신에게도 지나갔던 그 절망의 깊은 어둠을 알아차리고 말았다 


그러니 굳이, 연적일지도 모르는 이름을 꺼내고 그 전언을 전할 필요가 있을까 
지금 이 상황 자체가 효신에게는 힘들텐데 말이다 


탄은 애써 숨을 고르고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갸우뚱한다 


"어.. 아.. 미안.. 나 요즘 자꾸 넋을 놓는다니까 빈혈인가" 
"... 남 담배 피우는 거 걱정말고 너 운동이나 해, 너야말로 나이가 몇인데 벌써 그래" 


머리를 짚고 눈을 찌푸리며 자신이 뭘하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 눙치는 탄을 
미심쩍게 바라보던 효신은 고개를 절레 흔들며 타박을 준다 


"음 더이상 몸이 좋아지면 나 너무 완벽할거 같은데" 
".... 그만 가라 그런 소리 할거면" 
"... 형" 


또 지 자랑이구만 하는 진저리난 표정으로 문 쪽으로 손짓하는 효신을 새삼스레 물끄러미 보던 탄은 
장난기도 허세도 없는 진지한 목소리로 효신을 부른다 


"...?" 
"누가 형 서울에서 봤대, 조심해" 
"... 그래" 


그제야 탄이 불안해하며 저에게 거듭 확인한 이유를 안 효신은 안심하라는 듯 두어번 고개를 끄덕인다 
탄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한번 다짐한다 


"조심해" 
"걱정마" 


짧은 확인 후에 탄은 영 내키지 않는 듯 한발 물러선다 


"갈게, 전화 좀 켜놔 제발" 
"그래" 
"담배도 끊고" 
"... 그만 좀 가라 이제" 


진저리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손짓하는 효신의 반응에 피식 웃은 탄은 
올 때와 다른 느긋한 걸음으로 구두를 신고 문을 연다 


"간다" 
"그래 안 나간다" 


건성으로 하는 대답에 입을 삐죽 내민 탄은 더이상 덧붙이지 않고 문을 열고 사라진다 
도로 문이 철컥,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마치 바쁜 것처럼 바닥에 흩어진 신문과 맥북과 배낭 같은 것들을 정리하는 척 
헛손질하고 있던 효신은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든다 


누군가, 자신을, 서울에서, 봤다. 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걸까. 
대체 무엇을 위해서 저는 이 초조한 도망을 계속하고 있나. 
그 시간이 끝나면 무엇이 있을까. 
무엇이 있기는 할까. 

적어도 

너는 없을 것이다. 



겨우 누르고 있던 회의가 도로 치솟는다 
아무 것도 쥐지 않은 빈 손을 허공에 든 채 멍하니 앉아 있던 효신은 가늠할수 없는 시간이 흐른 뒤, 
깊은 물 속에 잠겨 있는 듯 갑갑한 심장에 공기를 공급하기 위해 몇십번 아니면 몇천번인지 알 수 없는 숨을 내쉰 후에야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서 버릇처럼 바지 뒷주머니를 한 손으로 더듬어 아까 탄을 만나기 전 피웠던 담배갑의 형체를 확인한다 


어쩔 수 없다 



잊기 위해서는. 
살기 위해서는. 


숨쉬기 위해서, 
폐를 조금씩 죽여야하는 이 아이러니. 


쾅, 쾅, 쾅, 쾅, 쾅 


방을 나서려고 신발을 아무렇게나 꿰어신으려는 찰나 다급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작은 공간에 울려퍼진다 
철문을 두드리는 힘이 어찌나 좋은지 그 시끄러운 소음에 귀가 멍멍할 지경이다 


- 귀신 같은 녀석, 담배 피우러 나가려는 건 어떻게 알고. 


어쩐지 찜찜한 얼굴로 물러나더니만 더 할 말이 남은 건가 싶어서 부술 듯이 두드리는 문을 연다 


"그냥 부수지 그러냐, 수리비는 니가 내고. 담배는 끝나면 끊을 거..." 


손에 쥐어져있는 담배를 보면 분명 잔소리부터 할게 뻔해서 미리 짜증난 목소리로 선수를 치면서 문을 벌컥 연 효신은 
제 앞에 펼쳐진 예상치 못한 장면에 그대로 멈춰버린다 


"오랜만이네요" 


잠깐 자신이 지금 정신을 잃은 것인지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꿈인 걸까. 
왜, 저 사진 속의 인물이 똑같은 오만한 미소를 띄우고 제 앞에 서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저를 노려보고 있는 효신이 재미있다는 듯 싱글싱글 웃으면서 
비스듬히 문 옆 벽에 기댄 채 내려다보던 그는 갑자기 얼굴을 찌푸리더니 
효신이 가로막고 있던 문을 한손으로 밀치면서 다급한 목소리로 말한다 


"화장실 좀 쓸게요, 선배" 


전혀 예상치 못한 황당한 요구에 효신이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 금새 뭔가 짐작한 듯 차갑게 굳는다 
봄날 아지랑이 마냥 미세한 모든 변화를 흥미롭게 바라보던 영도는 그 어느날 그랬던 것처럼 비수를 숨긴 나른한 목소리로 다시 묻는다 


"괜찮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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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일단 8편의 앞부분을 올려... 
쓰면 쓸수록 길어지고 애들이 오락가락하는 것 같은 건 그냥 느낌이면 좋을텐데 ㅠㅠ 

읽어주는 냔들 고마워, 인생의 그 어느 순간 무의미하지만 작은 즐거움이 되길 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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냔아 왔구나 언제나 그렇지만 잘 읽었어. 아마 연재가 끝나고 다시읽으면 분명 다른느낌일거야..암튼.담편도 빨리와?빛나는 효신이도 어른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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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il 2

크악크악크악 나른한 영도 완전 섹시해 ㅠ 한마리 흑표범 같은 느낌이랄까… 사실 맨날 효신이가 탄이 편만 들어주고 영도는 홀대해서 속상한(?)게 있었는데 오히려 영도한테 위협당하는걸 보니 신나기도 하고 ㅋㅋㅋ 암튼 잘봤어 냔아 ㅜㅜ 자주 와줘

.198 
veil 3

역시 최영도 ㅋㅋ 김탄 따라왔구나. 확실히 비상하다니까. 
여전히 계속 거래들이 오가지만, 그 거래들 사이로 진심이 통하기를 빌어본다. 
잊지 않고 와줘서 고마워.

.82 
veil 4

기다리고 있었어!!! 
숨이 턱 막히는 긴장감이 다음편을 더 기대하게 한다. 
화장실을 빌리는 장면이 너무 묘하게 느껴지네.. 
잘 읽었어!ㅎㅎ

.179 
veil 5

영도, 탄이한테 사람을 붙인 걸까. 역시 멋진 녀석. 

나는 상속자들을 띄엄띄엄 봐서 제대로 본 건지는 모르겠지만, 
영도가 라헬이를 정말로 시스터로서 아끼고 좋아했던 것 같아. 아마 동질감도 있었던 것 같고. 
그래서 라헬이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도 있고, 라헬이가 상처받는 것 같으니까 그 원인제공자에게 좀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 그냥 그랬어. 
뭐랄까, 탄이보다는 영도가 조금 더 영향력이 있어 보이니까. 효신이를 갈구면서도 뭔가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어 주면 좋겠어. 
그 전에, 효신이한테 한 방 좀 먹여주고 말이야. 
미안 효신아. 그냥, 네가 너무 안타깝고 아프면서도 너한테 화가 나는 점도 있어서, 어쩔 수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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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il 6

이 새벽에 왠 횡재일까.......... 
안자고 있는 나에게 리스펙트.... 
너에게는 무한 감동 앤드 존경.... 
사랑한다 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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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 본격적으로 등장하는구나 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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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볼게 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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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 탄이...영도한테 꼬리 밟혔구나. 
점점 흥미진진해지네. 라헬이가 안나와서 섭섭하지만 찬란한 미래를 위해 참을게. 
빨리 빨리 오라고 보채고 싶은데 냔이 글을 읽어보면 그런말 못하겠다. 
그냥 나냔이 끈기있게 기다릴게.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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훠우~ 난 또 효신이 진짜 꼬리밟힌줄 알고 완전 긴장타면서 읽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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냔아! 늘 기다리고 있어ㅠㅠ 긴 기다린 만큼 매번 그 이상을 누려서 고마운 마음 뿐이야~ 그런 의미에서 라헬이랑 효신이 그만 좀 돌아가게 해 줄 수 없겠니 흡ㅠ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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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기다리고 있었다능!!!! 
아진짜 반가워 냔아.ㅠ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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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ㅠ 그러면서 전글 다시 읽고 또 읽고ㅠ 이렇게 와주어 고마워ㅠㅠ 글구, 저 플랜비에 감정이 요동치는 효신이가 안쓰러우면서도 질투같아 읽는 나냔은 좋음..ㅋ 나 변태인가ㅡㅋ 여튼 감정이 휘몰아치는 효신이! 글구 영도의 등장. 흥미진진하다. 효신이에겐 미안한 얘기지만ㅋㅋㅋ 냔아 계속 또 기다리겠어ㅠ 얼른 다시 와줘ㅜ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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냔이 드디어 왔구나ㅠㅠ맨날 창작방 들락날락거렸어 
잘볼게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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냔아 왔네ㅠ 효신이 맘이 참 말도못하게 힘들겠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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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il 16

하아.. 숨도못쉬고 한번에 읽었다. 
효신의 마음이 영겁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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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il 17

컥 라헬효신만큼 좋은 영도효신의 구도다!!! 나는 영도가 효신이를 태연한 목소리로 도발할때가 제일 흥미로움.... 다음 이야기 겁나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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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il 18

효신이도 질투를 하는구나해서 왠지모르게 미소가 ㅎㅎㅎㅎㅎ 
영도는 탄한테 미끼던지고 미행해서 효신이 찾은거?? 
영도라헬도 좋고 효신영도도 좋구나 ㅋㅋㅋ

.185 
W 19

댓글달아준 냔들아, 고마워 - 생각보다 길어지면서 혼자 자맥질하고 있는게 아닌가 그런 생각도 했는데 쓰는 나보다 더 몰입해주는 냔들이 있어서 고맙고 고마워... 
아이들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는 중이야 한쪽은 직진,중. 그리고 다른 한쪽은 지금 멈춰서있는 거지만, 움직이게 되지 않을까, 억눌러놓은만큼 더 큰 반동으로. 그 무거운 스스로의 빗장을 밀치고 나오는 계기가, 냔들에게 만족스럽게 전달되기만을 바랄 뿐...

.232 *

veil 20

영도가 건드리면 효신의 본마음이 나타나겠지. 
다음편 기다릴께.

.142 


Posted by april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