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in-paris





여긴 어딜까 
경민은 불꺼진 가게에 들어간 찬경을 기다리며 어색하게 둘러본다 
저녁을 먹고 여느 때처럼 차를 마시려나 싶었는데 
찬경이 본인이 자주 가는 곳이 있다며 이리로 데려왔다 

아무리 봐도 문을 닫은 것 같은데 
싶어 조금 불안해지는데 안에서 찬경이 부른다 

- 들어와요 경민씨 

찬경에게는 미안하지만 요즘 워낙 험한 일이 많다보니 
경계를 풀지 않고 한 손에 휴대폰을 쥔 채로 조심스레 문을 연다 
그리고 우뚝 굳어버린다 

초로 가득한 카페 안에 
찬경이 서서 가득 장미를 안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그저 오늘 회사에서 중요한 미팅이 있었던가 생각했던 깔끔한 정장이 
말하지 않아도 무엇을 위한 건지 알겠다 
경민은 떨리는 다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조심히 안으로 들어선다 

- 갑자기 이런 말 당황스러울 거 알지만 

찬경이 쑥쓰럽다는 듯 미소를 짓다가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다 

- 저 내년에 파견 나가게 됐어요 런던으로 
  경민씨가 같이 가줬으면 좋겠어요 괜찮다면 

아... 

- 당장, 결혼이라던가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런 가능성을 포함해서 
  저랑 교제해주겠어요? 


이 순간, 
왜 이경이 떠오르는 걸까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얀 얼굴에 퉁명스런 표정으로 남녀 가리지 않고 들이받고 다니는 사고뭉치였던 이경이 
경민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그저 급식을 먹으러 식당으로 이동할 때나 
체육 수업 때문에 교실을 나서면서 어디쯤 있나 
저도 모르게 위치를 확인하곤 했다 

말을 걸거나 뭘 한 건 아니었다 
간혹 뒤통수가 당겨서 기지개를 켜는 양 자연스레 몸을 비틀어보면 
이경은 늘 있는 그 뒷자리에서 
느껴졌던 시선 같은 건 경민의 착각이었던 것 처럼 
무심히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있거나 지훈을 건드리고 있었다 

왜 그렇게 신경이 쓰였는지 몰랐다 
조금만 휩쓸려도 멀리 가버릴 것 같아서 버텨내기만도 힘겨웠는데 그땐 
공기처럼 교실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그가 시선 한켠에 늘 담겨 있었다 

그래서 입시가 끝나고 합격자 발표가 나고 시간이 남던 그 겨울 
갑자기 이경이 저를 찾아왔을 때도 당황하긴 했지만 놀라진 않았다 

심부름으로 슈퍼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한파라더니 과연 이러다 딱 얼어죽겠다 싶어서 종종걸음으로 뛰어서 돌아오는데 
불쑥 낯선 인영이 제 앞에 나타났다 

놀라서 뒤로 미끄러질 뻔 하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경이었다 
대체 거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건지 얼굴이 온통 얼어있었다 
튀어나올 때는 언제고 막상 저가 올려다보자 귀만 빨개진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여기서 뭐하는데 

할말 없으면 비켜주기라도 하던가 
좀 짜증이 나서 퉁명스럽게 물으니 그제야 황당한 소리를 했다 
절 더러 넌 내일 자고 일어나면 서울대생이 될거다. 라고 해도 그만큼 어이없진 않았을 거다 

- 남경민 나랑 사귀자 
- ....어? 

다짜고짜 들이대는 말에 황당해서 대답도 못했다 
이렇게 갑자기, 왜? 
원래 이렇게 갑자기 그러는 건가? 
근데 왜? 

- ...내가 왜? 

경민의 말은 이경의 예상 답변 리스트에는 없었던 모양인지 
급격히 당황하는게 눈에 보였다 

- .... 그냥 좀 만나주면 안되냐? 

얘... 진짜 뭐지 이건... 

- 싫은데? 

그렇게 말하면 가버릴 줄 알았는데 
이경은 잠시 고민하더니 다른 말을 꺼냈다 

- 그럼 영화 보러 가자 내일 

평소 같으면 미친 놈. 하고 무시해버렸을텐데 
그렇게 누가 저에게 다짜고짜 들이대는 것도 처음인데다 
그보다 이경이 이렇게 당황하는 것도 처음 보는 거라 어쩐지 마음이 좀 약해졌다 
저보다 머리하나는 큰 게 눈을 글썽글썽하며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게 
제법 귀여워보였다 
... 영화 보는 정도야 뭐... 

- 그러던가 그럼 

나중에 생각해봐도 그때 왜 그렇게 대답했는지 모르겠다 
그때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제 외모지상주의 취향에 
이경의 얼굴이 딱 맞아떨어진 탓인지도 모르겠고 
그냥 그때 너무 추워서 집에 빨리 들어가고 싶은 생각 뿐이어서 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그렇게 영화를 보고 나서 이경은 하루가 멀다하고 경민을 불러냈고 
경민도 추운데 사람 오라가라 한다며 투덜투덜 거리면서 
못 이기는 척 하고 매번 약속 장소에 나타나곤 했다 

그렇게 한 달. 

그 사이에도 몇번인가 이경이 사귀자. 라고 들이대고 싫은데? 라고 거절하는 
그러면서 또 이경이 불러내면 투덜투덜거리면서 나가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거절하는데도 끈질기게 다시 들이대는 이경도 대단하고 
이렇게 튕기는 저도 어지간하다 싶었던 어느 날 

- 야 한달 내내 만나서 영화 보고 밥 먹고 차 마시고 이게 뭐냐 
- 뭐긴 뭐야 영화 보고 밥 먹고 차 마신거지 
- 아씨 그러니까 이게 사귀는 거랑 다른 게 뭐냐고 
- 사귀지 않으니까 사귀는 거랑 다른 거지 

따박따박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 
절대 빈틈을 내주지 않고 끊어내는 저에게 
결국 모든 공략을 차단 당하고 씩씩거리는 이경을 보며 
어이구 아가 안 통하니까 얼른 집에 들어가렴 싶어 피식 웃으면서 

- 나 들어간다 잘 가라 

하고 상쾌하게 돌아서려는데 덥석 잡힌 손목에 끌려 휙 돌아섰다 

그리고 미처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눈을 크게 뜬 채로 그대로 굳어버렸다 
단번에 저를 돌려세울 정도로 강하게 끌어당겨놓고는 
제 얼굴을 감싸고 있는 손은 금새라도 부서질 거품을 안고 있는 듯 조심스럽고 
저에게 갖다댄 입술은 너무 부드러웠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깨닫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깜빡.깜빡. 팟! 

전등 스위치 들어온 것처럼 정신이 돌아오자마자 
사정없이 이경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 악! 
- 뭐하는 짓이야! 

그대로 주저앉은 이경은 씩씩거리며 입술을 문지르는 경민을 올려다보았다 

- 야 이 기집애야! 그렇게 치면 사람 죽어! 
- 그래! 죽어! 차라리 죽어! 

억울해 죽겠다 
첫키스를 이렇게, 이런 식으로 

퍽퍽 때리는 경민에게 미안하긴 한지 무방비하게 맞던 이경이 어느 순간 안되겠는지 경민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아까처럼 세게 쥔 것도 아닌데 
꼭 금새 부서질 솜사탕을 다루듯 간신히 감싸는 정도인데 
어째서 움직일 수가 없는 걸까 
몇번이나 봐왔던 이경의 눈이 더 깊고 진지해진다 

- 남경민, 진짜 내가 잘해줄게 

진심인 것 같아서 
왜 이경에게 저인지 아직 답을 찾지 못했지만 
그 말에 담긴 마음에 흔들려서 경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결국 알겠다고 할거면서 한달을 셔틀시켰다고 이경은 두고두고 투덜거렸고 
그때마다 내가 그렇게 쉽게 넘어가는 게 아니었다고 경민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나는 절대로 프로포즈는 쉽게 안 받을 거야 
멋있는 수트를 입고 장미꽃을 가득 안고 초를 켠 로맨틱한 곳에서가 아니면 
내가 딱 원하는 대로가 아니면 절대 안 받아들일거야 누구라도 

그렇게 이경에게 들으라는 듯 몇번이나 말했던, 
스무살의 제가 상상했던 그 장면이 
지금 제 앞에 있다 

이경만 빼고. 

이거였구나 
이경이 갑작스럽게 부탁했던 
진지하게 생각해달라던 그 말의 의미를 
경민은 비로소 깨닫는다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찬경을 바라본다 
제 상상 속의 장면 속에 긴장된 표정으로 서 있는.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마저 정면의 상대를 마주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떠올리는 마음으로는, 안된다. 
주저하지 않고 진심을 보여주는 사람에게 더이상 거짓으로 대할 수는 없다 





경민은 어렵게 입을 뗀다 

- 찬경씨, 정말 좋은 사람이예요 
- .. 이런 건 보통 거절할 때 하는 대사인데 

망설이며 다음 말을 찾는 경민에게 
힘없이 웃으며 찬경이 말한다 

- ... 정말 죄송해요 저 그 말 못 받아요.. 찬경씨 때문이 아니라 저 때문에요 

처음 말을 꺼내기 어려웠지 막상 시작하니 술술 나온다 

- 저 재즈 안 좋아해요 음악도 안 들어요 술 못 마신다는 것도 거짓말이예요 술 좋아해요 한번 마시면 취할 때까지 마셔요 
  저 독한 말도 잘하고 남 상처도 잘 줘요 잘 웃지도 않아요 지금까지 보여드린 거 다 저 아니예요 그거 다 거짓말이예요 
  그냥 찬경씨 마음에 들어보려고 거짓말 했어요 정말 죄송해요 

반성문을 쓰고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기분이다 
고개를 푹 숙이고 찬경의 대답을 기다린다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서있던 찬경은 꽃다발을 내려놓고 가게의 불을 켠다 
순식간에 초가 빛을 잃는다 

- 우선 앉아요 

찬경이 이끄는 대로 경민은 옆 테이블에 앉는다 
무슨 말이라도 들어야겠다 각오한다 
그러나 찬경은 진지하게 예상과 다른 말을 한다 

- 그게 아니었다면 어떻게 할래요 내가 마음에 둔 경민씨가 거짓말로 내게 보여준 모습이 아니라, 
  내게 어떻게 사람을 믿을 수 있느냐고 물었던 그 경민씨라면, 난 그게 경민씨의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면 결론이 달라지나요? 

경민은 놀라 고개를 번쩍 든다 
찬경이 서글프게 웃고 있다 
이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게 미안하다 

하지만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그런 경민을 보면서 찬경이 장난스레 한숨을 쉰다 

- 경민씨 몰랐는데 진짜 나쁜 사람이네 

이미 한 말이 있어서 괜히 고개가 수그러든다 
그래 제가 정말 나쁜 사람이다... 

- 그냥 내가 남자로 안 보이는 거네 근데 왜 본인이 나쁘다고 그래요 
  자기 탓으로 돌리지 말아요 경민씨는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니까 
  경민씨가 그렇게 나쁜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에게 함께 하자고 말한 나는 뭐가 되요 

다정한 찬경의 말에 후두둑 눈물이 떨어지려고 한다 
제가 울 자격이나 있나 싶어 애써 참아서 코 끝이 빨개진다 
대답도 못하고 고개만 숙인 채 손끝만 꼼지락거리고 있는 경민을 보며 
찬경이 조금 홀가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 ... 경민씨, 이 지구에는 지금 60억명이 산대요 
  그러니까 그중에서 사랑하는 단 한 명과 만날 확률은 거의 천억분의 일인거예요 정말 희박하죠 
  나는 혹시 경민씨가 그 천억분의 일의 확률이 아닐까 해서 잡아보려 한거예요 
  경민씨가 내게 그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요 

위로하는 사람과 위로받는 사람이 바뀐 듯한 이 상황에 
경민은 이 사람을 만났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가 생각한다 
다른 때에 다른 상황에 만났다면 달랐을지도 모른다 
아니, 지금 이 사람이기 때문에 더이상 마음을 속일 수 없었다 

- .... 저 분명 후회할 거예요 오늘 이 대답 

잔인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진심을 담아 말한다 
목소리는 평온한데 여전히 숨은 불규칙하게 쉬는, 긴장한 티가 역력한 경민을 보며 
찬경은 짐짓 심각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 이제 와서 그런 말 소용없어요 기차 떠났어요 
- 알아요 그러니까 하는 말이예요 당장 내일부터 후회할거예요 
- 부디 꼭 후회해줘요 

어색하지 않게 대화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고맙고... 미안하다 

- 그만 가죠 

찬경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 옆자리에 두었던 꽃다발을 집어든다 

- 이건, 아무래도 좀 가져가긴 그렇죠? 

경민을 향해 쑥 내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 장미 다발을 받아갈 이유도 염치도 없어 조심히 고개를 젓는다 
찬경은 잠시 생각하더니 장미다발을 그대로 안는다 

- 뭐 이건 사가라고 한 놈 줘야겠네요 
  경민씨에겐 백프로 통할거라고 장담했거든요 결국 아니었지만 

찬경은 경민을 보며 피식 웃는다 

- 그 놈 보고 책임지라고 하죠 뭐 






이제 제법 춥다 
9월 결산 법인의 법인세 신고 준비 때문에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퇴근한 경민은 
내일부터는 장갑을 껴야할까 생각하면서 
하아 - 하고 입김을 불어 찬 공기를 몰아내본다 

막 건물 밖을 빠져나오는데 뭔가 풍경이 평소같지 않다 
오가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한쪽을 보며 힐끔거리고 있다 
뭔가 싶어 자연스레 시선이 따라간 경민은 
회사에서 2미터쯤 떨어져 차도에 하얀 차를 세워두고 기대고 있는... 
검정 수트 차림의 이경을 발견한다 

저렇게 반짝거리는 흰색 차에 검정 수트는 대체 무슨 미적 감각이래 

사람들이 이경을 바라보는 것이 그런 이유가 아닌 걸 알지만 
그래도 왜인지 저가 창피해진다 
경민은 빠른 걸음으로 이경에게 다가가 퉁명스럽게 묻는다 

- 여기서 뭐하는데 

불 붙이지 않은 담배를 물고 
휴대폰으로 뭔가 검색하고 있던 이경이 그제야 경민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란다 

- 아니 뭐.. 

이경은 우물쭈물 대답을 못하고 얼버무린다 
어휴 이 답답아 니가 여기 왜 왔겠니 우리 회사 앞에 

- 할 말 있어? 

아니면 그냥 간다 - 는 식의 제스쳐를 취하니 그제야 조심스레 한마디 한다 

- 찬경이형, 왜 그랬어..? 
- ... 진지하게 생각해달라며. 진심, 아니었으니까 

그런 사람에게 언제까지 거짓말로 내 마음을 속일 수는 없었으니까 
둘은 각자 찬경을 떠올리고 잠시 말을 잃는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깨려는 듯 이경이 경민에게 핀잔을 준다 

- 너 진짜 못 됐구나? 
- 하, 누가 누구더러.. 

어이없어 발끈하는 경민을 향해 
이경이 스윽 지나가는 말로 낚시줄을 던져본다 

- 그럼 이제 연애는 쉬나? 여기 노는 사람 하나 있는데 
- 됐거든 
-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잡지? 
- 후회는 지금도 충분히 하고 있거든? 

안 낚인다.. 

- 이번엔 조건에다 외모까지 완벽한 사람 만날거야 그때까진 연애 안해 

낚이기는 커녕 산 넘어 산이다 
그래도 차려입고 온다고 빼입은 수트가 무용지물이다 
이경의 머릿 속이 복잡해지는 건 아랑곳 않고 경민은 그러고 보니 범인은 너, 란 말투로 힐난 하듯 묻는다 

- 그리고, 그 프로포즈 니가 얘기한거지 찬경씨한테? 

프로포즈라 함은... 그걸 어찌 알았나 싶다.. 
좀 쑥쓰럽다 그걸 기억하고 있다는 걸 들킨 게 

- 어?.... 아... 니가 그랬잖아 전에 그렇게 받고 싶다고 

수줍게 말하는 이경을 한심하다는 듯 훑어보면서 
경민은 팔짱을 끼고 타박을 준다 

- 바보냐? 그거야 스무살 때나 그랬던 거고 너 설마 장미 사온 거 아니지 지금? 

이경의 얼굴이 황당함에 일그러진다 
차마 창피해서 들고 있진 못하고 차 안에 넣어둔 장미 다발을 떠올린다 

당했다.... 
이 형 나한테 일부러 그랬구만.... 

애써 당혹한 표정을 감추려고 노력하면서 
평정심을 가장한 목소리로 묻는다 

- 그럼 지금은 뭐가 좋은데 
- 뭐...우선 잘생기고 

나야 잘 생겼지 

- 정장 잘 어울리고 

이정도면 잘 어울리지 
약간 자신감이 생긴다 

- 리무진 타고 

리무진은 아니지만 일단 차는 있으니까 됐고 

- 일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박힌 반지 정도는 들고 와야지 
- ...뭐? 

너무 놀라 다리가 풀릴 뻔 했다 
농담인가 싶어 쳐다보니 단호한 얼굴로 입술을 꾹 다무는 게 진심이다 
... 어떻게 된 게 허들이 점점 높아지냐 
대체 다이아몬드 일 캐럿 같은 건 얼마나 하는데? 

- 그런 거 내밀면서 하지 않는 한 절대 안돼 꼭 그런 남자 만날거야 

등골 휘는 소리 들린다 
어디서 집 안 기둥 무너지는 거 안 보이나요 
야 이 기집애야 뭐든 적당히 좀 해라 니가 세상에서 젤 무서워 
이젠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패닉에 빠진 이경을 보면서 경민은 속으로 살짝 웃는다 

여기서부터 하자 우리 
아무것도 몰랐던 때로 돌아가서 
친구도 연인도 아닌 여기에서부터 

안녕 이이경. 
반가워. 









= 이것이 끝이 아니야 뾰로롱~☆ 

+ missing link & etc.
 

옷도 채 못 갈아입고 라면 가게에서 근무하던 복장에 잠바만 겨우 걸친 채
이경이 급하게 대포집에 들어선다
구석 테이블에 갈매기살을 불 위에 약간 올리고 한 잔이나 따랐을까 싶은
새 병이나 다름 없는 소주병을 놓은 채
빙글빙글 술잔을 돌리고 있는 찬경을 발견한다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는 표정이라 
대체 어찌된건가 싶어 이경은 조심스레 앞자리에 앉는다

- 형
- 어, 왔냐 오지 말라고 다시 전화했더니 안 받더라

그제야 생각나서 주머니를 더듬어보니 급하게 뛰어나오느라 휴대폰을 두고 왔다

- 형이 오라면 와야지 오다가 마는 게 어딨어요

그런 이경을 가만히 보던 찬경은 그저 이경의 팔을 툭툭 치고 만다

- 어떻게 됐어요?

죽일 놈의 호기심 같으니
오면서 내내 먼저 말하기 전에는 묻지 말자 다짐하고 왔건만
결국 먼저 말을 꺼내고 만다

저를 보고 대답 대신 씁쓸하게 웃는 찬경을 보니
안쓰러우면서도 마음 한 켠이 안심이 되는 게 
제가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나쁜 놈이구나 싶어 자책한다

- 남경민 걔는 진짜 생각 없다 형 같은 사람이 어딨다고 

미안하고 속상한 마음에 대신 투덜거린다
이 기집애는 일부러 언질까지 줬구만 이게 뭐하는 짓이야
그런 이경을 보며 찬경이 빙그레 웃는다

- 경민씨 잘못한 거 없어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서 대답한거야 

어휴 이 보살
어디서 이런 보살이 났니
형 전생에 석가모니나 관세음보살 아니었는지 좀 알아봐라

- 하여간 내가 뭐라 그랬어 걔 성격 나쁘고 싸가지 없다 그랬지? 걔랑 얽혀서 좋을 일이 하나도 없다니까 

갑갑한 마음에 대신 투덜거리는 이경을 바라보던 찬경은
그때껏 손에만 쥐고 빙글빙글 돌리던 술잔을 훌쩍 마셔버린다

- 이경아
- 형 세상의 반이 여자다 남경민보다 훨씬 좋은 여자 많아 내가 낼부터 알아봐줄게
- 너 나한테 할 말 있지 않냐?
- ...어?

이경이 멈칫 굳어버린다
어느새 웃음기 사라진 얼굴로 찬경이 진지하게 저를 보고 있다

...알고 있었구나.

- ... 언제... 알았어...?
- 이상하다 싶었던 건 공연장에서? 확신은 삼계탕 먹다가 들었지만

안절부절 못하는 이경을 가만히 보던 찬경이 차분히 설명한다

- 내가 아무리 둔해도 말이다 프로포즈 계획이 단숨에 구체적으로 나오는 거 좀 이상하지 않겠냐?
아무리 친구라도 그런거 알기 어렵잖아 니네 그래도 남녀사이인데... 그래서 혹시나 싶었지 경민씨 반응 보고 확실히 알았고
- .... 미안해

어쩐지 미안하다고 해야할 것 같다
고개를 숙이는 이경을 보며 찬경이 한숨 쉰다

- 뭐... 알면서 말 안 한 나도 썩 잘 한 건 아니다 내가 너 이용한 거지 니 탓 아니야
- 근데.. 왜
- 왜 말 했냐고? 아니면 왜 말 안 했냐고?

어느 쪽이든 같은 말이다
찬경이 미리 말했다고 한 들 자신이 뭐라고 답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 최선을 다해보고 싶었거든 너 상관하지 않고.
아마 경민씨가 받아줬다면 말 안했을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니니까

이 형...... 무서워....
이경은 선하게 웃는 찬경에게 새삼 압도당한다

- 나는 할 수 있는 걸 다 했으니까 결과가 어떻든 후회는 없어

담담한 찬경의 말에 이경은 앞에 놓인 물을 마신다
알고는 있었지만 참 대단한 사람이다...

- 그런데 이이경, 넌 최선을 다했니?

켁.

사레 걸릴 뻔 했다
컥컥거리다 찬경을 보니 
안쓰러워하면서도 냉정한 얼굴로 자신을 엄중히 바라보고 있다

형.
나 그래도 돼?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경에게 고개를 끄덕여준다

니네 참 많이 닮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난다

그나저나 저 장미는 어쩐다

- 너 경민씨한테 갈거면 꼭 정장 입고 장미 백송이 들고 가라
니 말대로 그건 통한 거 같더라


이건 네가 그동안 말 안 한 복수정도로 해두자 이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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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길어져버렸네

그리고 더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아서 숨겼어

아침식사로는 새로운 요리를 시도하는 게 아니라고 하던데
이 이야기를 쓰면서는 새로운 걸 이것저것 시도해보는 바람에 
중간쯤엔 좀 지쳐서 대강 써버린 곳도 있었어 알아차렸다면 미안해 날림으로 써버려서

기본적으로 이경은 첫만남부터 헤어지는 순간으로 경민은 헤어지는 순간부터 첫 만남으로 거슬러 올라가도록
그게 중간에 교차되면서 지나가게 이야기를 짰었어 
그리고 서로 에피소드들이 병렬로 배열되게 구성했었는데 
그러자면 헤어지는 순간도 경민 시점에서 처음에 나오고 마지막에 다시 한번 이경 시점에서 나왔어야 했지만....
그런 식으로 다 쓰려고 하니 지쳐서.... 아마 훅 지나가버린 부분도 있고 그럴거야....
정말 길게 쓴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중간에 사라져버린 경민의 외모지상주의 설정 같은 건 좀 아까웠어

나름대로는 기억에 매인 채 살고 있는 경민과 기억을 묻어버리고 잊은 이경 도 대비해서 보여주고 싶었어
서로 상처받는 상황에 완전히 다르게 대응하는 모습 같은 걸

스무살 때는 원래 그렇게 잘 몰라서 미친 듯이 싸우고 괴로워하고 그렇지 않았나 싶어
서로 자신이 상처받는게 제일 중요하고 그걸 못알아주는 상대가 나쁜 거라고 생각하고

좀 억지 같지만 나름대로는 곳곳에 전 편에 나오는 대사나 설정을 다시 가져오는 식으로
되받는 구조를 써보려고도 했어

쓰다보니 시도는 참 많이 했구나;;;;;;;; 제대로 된게 없어서 그렇지;;;;;;

분명 로코를 쓰려고 시작했는데, 
그래서 0편과 1편과 이후의 이야기들의 톤이 많이 차이나서.. 그것도 좀 아쉽고...
몇 편을 쓰다가는 현실 눈물이 나고 마음이 뒤틀려서 힘들었어
나냔은 왜 이렇게 다크한걸까
분명 가볍게 나도 즐기면서 쓰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거의 지훈*하경 헤어지는 무렵 쓸때만큼 힘들었던 것 같아..
빨리 써버리고 싶어서 (결론을 이미 내놓고 썼으니까.. 다음에 무슨 일이 있을지 아니까...) 후다닥 썼어
좀 어색하고 모자란게 있었더라도 이해해줘


어느 글에 써준 베이리의 댓글을 읽고 울었어
미안했거든 사실. 이런 글 쓰면서 나냔만 위로 받는 것 같아서
지금도 믿지 않아 나는
찬경이처럼 이해해주는 좋은 남자도 이경이와 경민이처럼 서로 반성하고 다시 만나는 일도 없다고 생각해
찬경이가 이경이와 경민이 둘을 변화시키는 일 같은 것도
하지만 그래도,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으면서도 이걸 쓰는 건 그런 일이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내가 받지 못했던 위로를 세상 어디에선가는 받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나는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말하고 하지 못했던 행동들을 쓰면서 
이건 팬픽이나 소설이 아니라 너무 내 힐링을 위한게 아닐까 미안했어

위로가 조금이라도 되었다면 좋겠어
이 모자란 글이 위로가 되었다면 내가 고마워

지금도 솔직하게 행동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 건지
세상에는 진심으로 하면 다 통하게 된다는게 옳은 건지 
이 글의 세계를 떠나면 확신할 수 없지만

그러나
냔들의 세계에서는 그런 일이 있길 바래


마치 다 끝낸 것처럼 썼지만
하지만 이게 마지막이 아니야
조금 더 남았다는 거!

금새 돌아올게, 밝게!

유난히 더 긴 이 이야기 읽어준 냔들 고마워~







Posted by april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