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in-paris





[K] 


창 밖을 본다 
너는 아직도 거기 서 있다 
문득 네 입에서 하얀 입김이 흩어지는 듯한 착각이 든다 
그런 흔적이 여기에서 보일 리가 없다 

3월말, 낮에는 봄이라지만 저녁은 아직도 제법 추웠다 
나는 무심코 핸드폰을 눌러 시간을 확인한다 

밤 11시. 

내가 문자를 보낸 게 여기 들어오던 9시쯤이었으니까 
적어도 너는 1시간 넘게 밖에 서 있었을거다 
내게 도착했다는 연락도 없이 
언제 나올 거냐고 묻지도 않고 
널 왜 부른 건지 답하지도 않은 채 
그렇게 

나는 심술맞게 시간이 깜빡거리는 휴대폰을 뒤집어놓는다 

- 강주씨, 약속 있어? 

내 앞에 있던 남자,가 술잔을 건네온다 
나는 부르르 몸서리를 칠 것 같아지지만 내 술잔을 들어올린다 

- 대리님 저 아직 술 남았어요 
- 그래도 한 잔 더 받아, 

억지로 내 술잔에 술을 따르는 걸 확 밀쳐버리고 싶다 

- 강주씨가 술을 먹잔 소리를 다 하고 어쩐 일이야 
- 그런 날이 있잖아요 사람이 살다보면 

은근슬쩍 내게 다가앉는 것이 영 불편하다 
나도 모르게 움찔 뒤로 물러나다가 
유리창 밖으로 날 보는 네가 눈에 들어온다 

.... 

나는 입술을 꼭 물고 웃으면서 술병을 집어든다 

- 대리님도 한 잔 받으셔야죠 





누가 그랬던가 
불행은 그림자처럼 담을 타고 스며든다고 
내 인생의 어두운 그림자는 깨닫지 못한 새 다가왔다 

- 미안하다 강주야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 막 끝나갈 무렵이었다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말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불행이 다가오면 익숙했던 집조차 남루해졌다 
집안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건 
아무리 집에 자주 들어오지 않았던 나라도 알 수 있었다 

그해 초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퇴직했다 
몇년전 무리해서 구입했던 아파트의 대출금이 그때까지도 갚고 있었다 
차액 수익을 기대했지만 집값은 오르는 대신 오히려 떨어졌고 
더이상 고정적인 수입이 없는 상태에서 매달 도래하는 원금상환은 
빚이 빚을 부른다는 말이 뭔지 확실히 실감하게 했다 

아버지 퇴직 후 6개월, 퇴직금으로 겨우 적자를 메꾸던 부모님은 결국 지방도시로의 이사를 결정했다 
서울의 집을 팔면 대출금을 갚고 남은 돈으로도 지방 소도시의 주택을 마련한 뒤 가게 밑천 정도는 건질 수 있었다 
빨리 포기한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옳았는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문제였다 
간신히 문학특기생으로 대학에 입학한 나는 그때 겨우 한 학기를 마친 상태였다 
사실 그다지 학교에 미련같은 건 없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나만이라도 서울에 남아 학업을 계속하길 바랬다 

나는 작은 원룸을 얻어 서울에 남았다 
부모님은 지방으로 내려간 뒤 작은 치킨집을 열었다 
그다지 음식 솜씨가 없던 어머니와 내내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운영하는 치킨집은 
겨우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 어떻게든 굴러가는 것 같았다 
매학기 등록금은 송금되어 왔다 하지만, 그게 어떤 희생을 치르고 보내온 돈인지는 
나도 묻지 않았고 부모님도 말 꺼내지 않았다 

발을 뻗고 누울 수 있는 공간을 빼면 간신히 책상과 간이 옷걸이만 놓을 수 있는 
작은 반지하 원룸은 어렵게 전세로 구했지만 
그 외의 생활비를 또다시 부모님께 손 벌린다는 건 사치였다 
나는 바로 생계전선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한번도 아르바이트 같은 건 해보지 않았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편의점 알바나 서빙 같은 것뿐이었다 
그렇게 심야 알바를 하고 오전 수업에 들어가 정신을 차린다는 건 불가능했다 
수업에 들어가는 것만도 용한 상태에서 장학금 같은 건 기대할 수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학업을 마쳐야겠다는 생각에 두 학기를 더 버텨냈다 

집에서 올려보내는 돈은 점점 줄어들다가 결국 끊겼다 
더이상 등록금을 바라는 건 무리였다 
아니 더이상 바랄 수가 없었다 

2학년 2학기를 끝내고 결국 나는 무기한 휴학에 들어갔다 

사무 보조 아르바이트부터 시작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에 비하면 꽤 편하고 돈도 많이 주는 편이었다 
처음에는 왜 내가 이걸 몰랐던가 애초에 휴학하고 이렇게 돈을 모을 걸 하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이내 월 100만원 남짓 손에 쥐는 돈만으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건 허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얼마나 편안한 인생을 살아왔던가 
내 한 몸을 건사하기 위해 드는 돈이 이렇게 많은 걸 그전에는 몰랐다 

인쇄 교정일을 처음 맡은 건 
지금 정기적으로 일을 받아하고 있는 출판사에서 사무보조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였다 
인간이 하나는 잘하는 게 있다고 하더니 나는 귀신같이 오탈자를 잡아내는 매의 눈을 갖고 있었다 
어깨 너머로 몇 번 교정지를 봐준 것이 사장의 눈에 띄었고 시험삼아 간단한 잡지 기사의 교정이 맡겨졌다 
사무보조 아르바이트와 별개로 교정에 대한 원고료도 들어오는 것이니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교정일은 그 회사를 그만둔 뒤로도 계속 되었다 
오전에는 아르바이트를 가고 밤새도록 교정지를 넘기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그러다 최근 1년간은 교정일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수입은 조금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집과 작업을 하는 도서관만 오가면서 할 수 있는 일이니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아도 되어서 마음은 편했다 
사람들과 함께 일해야해서 신경써야하는 문제들과 고통을 생각하면 
차라리 약간의 금전적인 손실은 감내할 수 있었다 

몇년에 걸친 사회생활로 나는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못하는 못된 버릇이 생겼다 
그 덕분에 내 교정 솜씨에 대한 평은 꽤 높은 수준인 걸로 알고 있다 
나는 가끔 논술 쓰던 때, 아니면 대학에 처음 입학할 때 품었던 문학도의 꿈을 조심스레 펼쳐 
종종 교정지에 사소한 편집을 덧붙이기도 했다 
간간이 그렇게 내가 작게 써넣은 편집들이 반영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고 그걸 반영되었다고 알려주거나 내 이름을 공편저자로 넣어주는 일도 없었다 
그저 가끔 서점에서 내가 교정했던 책의 책장을 넘기다가 
아아 이건 내가 고쳤던 문장인데, 문단인데, 라고 발견하는 게 고작이었다 

몇년간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별의별 사람들을 만났다 
월급을 떼어먹고 오히려 큰소리를 친 사장도 있었다 
내가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는 이유로 잔을 집어던진 손님도 있었다 
나에게 친절하게 굴다가 순식간에 등을 돌리는 동료,도 있었다 
한달을 벌어야 겨우 살 수 있는 나에게서 또 뭔가를 빼내가 보겠다고 사기를 치려던 사람도 있었다 
편집 아이디어를 뺏긴 것 쯤은 그런 것에 비하면 그저 선물로 하나 줬다 생각해버리면 될 정도로 간단한 문제였다 

세상은 내게 내내 그런 식이었다 
내가 기여한 것에 대해서 인정해주는 일 같은 건 없었다 
언제나 내게서 더 많은 걸 요구했고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리고 나는 그런 대접에 익숙해졌다 



이것은 모두, 나의 죄값. 


내가 치러야할 댓가.라고 
그렇게 받아들였다 



오히려 나로 인해 이런 불행이 온 것이 가족들에게 미안했다 
나의 존재 자체가 '신세'를 지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명절을 제외하고는 본가에 다니러 가지 않았다 

내 불행이 더이상 아무에게도 전이되지 않도록, 
약간의 결벽증 같은 것, 모두와 거리를 유지하는 강박에 가까운 버릇이 생겼다 
강박이 아주 심했을 때는 아무에게도 닿지 않으려고 늘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아무도 없도록 내가 만들었다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내 안에는 내게 불행을 안겨준 이 세상과 그 불행을 불러온 내 자신에 대한 분노가 늘 잠들어 있었다 
그런 마음으로는 누구와도 가까이 지낼 수 없었다 
세상을 겪으면 겪을수록, 내게 불행이 매일 조금씩 더 일어날수록 나는 점점 더 예민하고 더 차가워졌다 

하경만은, 그런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아주 가끔 내게 연락을 하거나 불러내서 밥을 사주곤 했다 
그런 하경의 연락이 나는 간절하면서도 부담스러웠다 
나의 불행이 하경에게마저 전이되는게 아닐까 늘 불안했다 
심지어는 혹시나 내 불행의 기운이 옮아가기라도 할까봐 하경에게 닿는 일이 없도록 조심했다 
불편하고 불안한 기색을 비치면 하경은 늘 불만스러워했지만 나에게 직접 말하지는 않았다 


나의 삶은 불행의 결과 
그 고통은 그 날의 죄값 

내게 일어난 모든 고통을 당연하다, 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끔찍하고 외로운 매일을 견디며 살았다 


하경은 나를 끝까지 붙들었지만 
그러나 내게 벌어진 불행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했다 
나의 인생은 절대로 이전으로 복구될 수 없다는 걸 
하경은, 머리로 이해했지만 가슴으로는 나를 이해해주지 못했다 
내가 왜 이렇게 절망 속에 허우적대고 있는지 
이 공허함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는, 직접 겪지 않고서는 알 수 없었다 

일단, 
심장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후에는 
그 텅빈 공간은 무엇으로도 메꿔지지 않았다 

상실감, 
죄책감, 


아마도 그걸 유일하게 공유할 수 있었을 인물은 너, 단 한명뿐. 
넌 나의 이 상처를 유일하게 공유한, 공유했을거라 생각되는 사람 

내가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널 필요로 했는지 
한번만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너의 마음을 들을 수 있기를 
우리가 같은 마음 이었다는 걸 알 수 있기를 
그래서 마음껏 울어버릴 수 있다면 


하지만 그렇게 사라진 너는 다시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 
하루, 이틀, 
네가 돌아오면 사과를 해야지, 기다렸다 
그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으로 나타나지 않는 거겠지 생각했던 부재는 
일주일, 이주일, 한달을 넘겼다 

더이상 학교에 나오지 않으면 곧 제적될 수준의 결석이 쌓였다 
정선생님과 강선생님까지 널 찾아갔다고 했다 
적어도 정선생님의 설득에는 네가 돌아오지 않을까 기대를 걸었지만 
그리고 넌 완강히 학교로 돌아오는 걸 거부했다고 했다 

몇번인가 네가 살고 있다는 집 앞까지 간 적도 있었다 
네 주소를 알아내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지훈은 아예 네 주소를 적어서 날 찾아오기까지 했다 
왜인지 내가 널 그 도피에서 끌어낼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저 계단 한 걸음 
그저 초인종 한 번 
그저 말 한마디 

그거면 널 만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몇번이나 네 집 앞에 다가갔다가 도로 계단을 뛰어내려오길 반복하면서도 

마지막으로 내가 네게 했던 말이 
마지막으로 네가 보여준 그 얼굴이 
나를 가로막았다 

막상 널 보면 뭐라고 말해야할지 겁이 났다 
네가 날 보면 뭐라고 할지 겁이 났다 

너와 그가 어떤 사이였는지, 
둘 사이에 얼마나 각별한 공기가 흘렀는지 
누구보다 내가 잘 아는데 

내가 그를 죽인 거라고, 그 진실을 네가 말할까봐 무서웠다 
나는 그때 네가 간절히 필요하면서도, 널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나는 결국 네 집의 초인종을 누르지 못했다 


그리고 너는 나를 그 절망 속에 남겨두고 사라졌다 





그저 매일을 견디면서 나는 때때로 악몽에 시달렸다 
내게 다가온 그는 늘 손에 닿으면 흩어져 사라졌다 
너는 종종 그 꿈에 무표정하게 나타나 나를 붙들거나 비난하듯이 쳐다봤다 
나는 언제나 비명과 함께 깨어나야만 했다 
그의 기일이 다가올 때면 그 악몽은 더 자주 나타났다 
나는 매해 여름이면 잠이 모자라고 말라갔다 

그날도, 그랬다 
널 다시 만났던 날도 그가 사라지는 악몽과 한차례 씨름을 한 뒤였다 
온 몸에 기운이 소진된 채, 밤에 잠을 잘 수 없을 거란 걸 알면서도 
결국 시원한 커피 한잔에 기대고 싶어 들어간 카페에서 
깔끔한 셔츠에 차분한 얼굴로 계산대에 서있는 너를 발견했을 때, 
억누르고 살았던 그 모든 분노가 되살아났다 

넌 어째서 그렇게 멀쩡한 얼굴로 살아가고 있는 걸까 
그리고 왜 이런 나를 보고 당황하는 걸까 

지금까지 내가 버텨온 그 시간이 마치 너에게는 없었다는 듯이 
이런 얼굴을 한 내가 뜻밖이라는 듯이 

나는 조금은 네가 불행했길 바랬는지도 모른다 
나를 이런 절망에 남겨둔 네가 
그렇게 도망가버린 네가 
나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기를 바랬을지도 

애써 오기를 부리며 담담하게 내민 손을 너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잡아왔다 
에어컨이 시원하게 나오는 카페에서도 여전히 따스한 네 손에 닿자 
보송한 느낌에 마음이 약해지려고 해서 더 화가 치밀었다 

너의 인생은 이러했던 걸까 
나의 인생이 이러했던 동안 

나는 무뚝뚝하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그리고 네가 천천히 입력한 너의 번호를 저장했다 

- 연락할게. 

한 마디를 남기고 원고를 챙겨들어 카페를 나왔다 
기껏 주문했던 커피를 받지 못했단 걸 깨달은 건 이미 지하철역에 도착한 후였다 
지불한 커피값 - 나에게는 일주일을 조금씩 아껴야 가능한 사치의 댓가를 생각하자 
또다시 화가 치밀었다 
이 모든 상황이 너 때문인 것 같았다 


그날 이후 나는 너에게 자주 연락했다 
아니 지독하게 괴롭혔다 
아무 때나 연락해서 도서관으로 커피 심부름을 시키거나 
오늘처럼 몇 시간 씩 집에 돌아가는 나를 기다리게 했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졌다 

처음 내가 널 불러내서 집까지 갔을 때 
내가 아직도 살고 있는 반지하 방을 보고 너는 처음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표정이 또 마음에 들지 않았다 

- 왜? 내가 이런 데 사는 게 우스워? 

내 말에 너는 또다시 눈빛이 흔들렸다 
그걸 보자 내 마음이 또다시 흔들렸다 

- 넌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넌 뭐 굉장한데라도 사나봐?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며 집 앞에서 패악을 부렸다 
하지만 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네게 소리를 지르고 
말도 안되는 일을 시키고 
그걸 또다시 트집을 잡아서 고통스럽게 해도 

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무 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이 

내가 부탁한 말도 안되는 것들을 가져다주고 돌아갔다 
묵묵히 내 뒤로 두 걸음쯤 따라걸어 나를 집에 데려다주고 
내가 집에 들어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돌아갔다 

그런 네 모습이 꼭 나를 보는 것 같아서 
무슨 소리를 해도 뭘 시켜도 그저 조용히 감내하는, 
내가 뭐라고, 그렇게 말도 안되는 내 말 한마디에 절절 매는 너의 모습이 
세상에 늘 주눅들어 날카로워진 나의 이면 인 것만 같아서 더 화가 났다 

넌 나를 그렇게 휘둘렀으면서 
내 모든 걸 꿰뚫어본다는 듯이 한발 앞서 내 허를 찔러서 
늘 간파당하고 말았다는 기분이 들게 했으면서 
넌 나를 놀리면서 그렇게 즐겁게 웃기도 했으면서 

어째서 지금은 
그렇게 내게 모든 걸 건 것처럼 설설 매는지 
그리고 그게 왜 그렇게 불행해보이는지 
마치 너마저 내가 불행하게 만든 것처럼 

화가 났다 

너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까 
적어도 
적어도 
왜 그때 그렇게 사라졌는지 
왜 나를 그 어둠에 혼자 내버려뒀는지 
왜 도망쳤는지 정도는 말해줘야하는 것 아닌가 

내가 왜 이렇게 미친 년처럼 구는지 
왜 네게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몰아붙이는지 
넌 왜 내게 묻지 않는 걸까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나는 묻지 않았고 
너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독했고 
너는 지독했다 


6개월이 넘는 시간동안 우리는 그렇게 팽팽하게 서로 버텨왔다 
너는 여전히 나의 연락에 한번 거절없이 왔고 
우리는 문자로 주고 받는 짧은 답들 외에는 거의 제대로 된 대화라고는 섞지 않았다 
난 네가 왜 사라졌는지 듣지 못했고 
넌 아마 내가 왜 이렇게 사는지 알지 못했다 

아무것도 내색하지 않는 네가 상처입은 듯이 눈빛이 흔들리는 건 
내가 내 자신을 막 다룰 때라는 걸 꽤 시간이 지난 후에 알았다 
내가 분에 못 이겨 자학을 하거나 자해를 하려고 하면 
너는 늘 금새라도 주저앉을 듯이 상처입은 눈으로 날 보곤했다 
그러면서도 두 걸음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넌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대로 어디까지 가려는 걸까 
그 거리는 영원히 계속 될 것 같았다 





가게 문을 열고 나오자 확,하고 찬 공기가 달려들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고 부르르 떨었다 

- 강주씨 2차 갈까 2차? 

비틀거리며 남자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불쾌감을 견디지 못하고 몸서리치며 어깨를 털어냈다 
급격히 차가워졌을 내 표정을 보더니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날 붙들었다 

- 뭐야, 먼저 들이댄 사람이 누군데 이제 와서 

그래 그랬다 
내가 어디까지 망가졌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네가 날 버리고 도망간 결과가 이거다, 
그게 바로 지금의 나다. 
아무 남자나 만나서 웃음을 보이는 내가, 그 결과다. 라고 
너에게 상처입히고 싶었다 

그래서 악몽 때문에 되도록 먹지 않았던 술을 마셨다 
몇번 말을 섞어본 적도 없는 출판사의 대리에게 교정쇄를 넘기면서 술을 먹자고 했다 
그리고 내내 너를 문 밖에 세워뒀다 

갑자기 다 귀찮아졌다 
나는 팔을 강하게 뿌리쳤다 

- 오늘은 여기까지요. 대리님 혼자 가세요 

최대한 상냥하게 말한 건데도 이미 취한 남자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도로 내 팔을 붙들더니 이제는 아예 끌고가려고 했다 
좀전까지 이 앞에 분명 서 있던 너는 어디를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늦은 시간이라 거리에 사람들도 다니지 않았다 
나는 겁이 덜컥 났다 

- 이거 놔 
- 허, 말이 짧다? 

남자가 위협한다 
이러다 맞기라도 하는 걸까 
아니 이대로 끌려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버텨보지만 힘을 당해낼 수가 없다 
나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뒤로 몸을 기울였다 
절박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누구라도, 도와줘 

- 놓으시죠 
- 넌 뭐야?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내 팔을 붙들고 있던 힘이 사라졌다 
감고 있던 눈을 떠보니 네가 남자의 팔을 붙들고 있다 
남자는 황당하다는 듯 널 바라봤다 

- 아는 사람이냐? 
- ..... 모르면.... 이 상황에 끼어들면 안되나? 이 분이 싫다잖아 지금 

너는 내 얼굴을 한번 보고 남자에게 모르는 사이인 듯 말한다 
남자를 보는 너의 눈빛은 충분히 위협적이다 
내게는 늘 작던 네가 지금은 태산처럼 크다 
네가 이렇게 무시무시한 얼굴을 할 수도 있다는 걸 몰랐다 
붙들고 있던 남자의 손을 놓아주자 남자는 욕설을 내뱉고 사라졌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똑바로 섰다 
너에게 놀라거나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마치 언제나 일어나는 익숙한 일처럼, 
나는 자유로워진 손목을 몇 번 주무르고 바닥에 떨어진 가방을 다시 집어 들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대로 집으로 향하려는 내게 네가 한 발 다가섰다 
나도 모르게 습관처럼 한 발 물러섰다 
물러서는 나를 보고 당황한듯 망설이던 너는 다시 한발짝 다가왔다 
내가 움찔 물러서려고 하자 날 멈추려는 듯 손을 들어올렸다, 망설이다 도로 내려놓았다 
나는 네게 닿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한 발 다시 물러섰다 
네게서 멀어지기위해 노력하는 나를 보던 너는 낯선 목소리로 말했다 

- ... 내가 뭘 하면 되겠니? 

내게 직접 뭔가를 묻는 건, 널 다시 만난 후 처음인가 싶다 
낯설다 
원래 이렇게 지치고 힘없는 목소리였던가 

- 내가 뭘 하면 괜찮아지겠니...? ... 어떻게 하면 예전처럼 웃을래? 

예상치 못한 말에 쓰고 있던 냉정한 가면이 무너진다 
당황한 표정이 통제하지 못하고 드러나는 게 느껴졌다 

왜 이렇게 사니, 아니면 나한테 왜 이러니, 
그런 질문이 아니라 

처음으로 넌 내게 물었다 왜 웃지 않느냐고 
마지막으로 진심으로 웃어본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웃었던 적이 있었던가 싶어 이젠 


- ... 나 때문이면 내가.. 없어질게.. 전처럼.. 

또다시 넌 나를 떠나겠다고 말한다 
내 눈을 외면한 채 괴로운 얼굴로 

나는 아직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는데 
아직 너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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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 미루면 안될 것 같아서 쓰긴 썼는데...







Posted by april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