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in-paris





[H] 


쉬는 날에는 종종 시집을 읽었다 

그가 그렇게 간 뒤 그의 아버지는 집을 처분하고 서울을 떠났다 
이사 전 그의 짐 중 뭐든 가져가라는 연락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들린 그의 방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얌전히 걸려 있는 교복 
라면을 먹으러 가서 자주 빌려입었던 트레이닝복 
어울리지 않는다며 놀리자 여봐란 듯 억지로 잡아당기던 악력기 
그의 것은 분명 아닌 글씨로 곱게 시가 쓰여진 액자 
빈소에서 지칠 때까지 봤던 그 사진의 원본 - 그와 내가 중학교 때 찍었던. 
함께 나눈 시간의 눈에 익은 물건들과 한번도 눈여겨 보지 않았던 낯선 물건들 사이에서 
나는 다시 한번 그의 부재를 실감했다 

그의 방에서 몇 권의 책을 가져왔다 
내 눈에 가장 익지 않은, 그의 물건 중 한번도 그런 것이 있으리라 염두에 두지 않았던 낯선 것이었다 
아마도 그를 약간 알았던 사람이라면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했을게다 
내가 공유하지 못한 그의 몇 년동안 아마도 그의 곁을 지켰을,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몰랐던 그의 흔적 

그림자처럼 지내온 시간 동안 나는 그의 책이었던 시집들을 되풀이해서 읽었다 
책들은 깨끗하고 모퉁이를 접거나 뭘 기록한 흔적도 거의 없었다 
다만 페이지마다 손때가 묻어있었고 겉장은 조금 낡아서 
전 주인이 얼마나 아껴가며 다시 읽었는가를 그 흔적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 몇몇 시들은 특히나 자주 읽었던지 쉽게 페이지가 펼쳐졌다 


예를 들자면 이런 문장, 

'마침내 아무도 그립지 않았고 
 그보다 훨씬 먼저 
 세상이 그를 잊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 


예를 들자면 이런, 

'옆에 선 여자아이에게 몰래, 아는 이름을 붙인다' 

로 시작해서 

'아무리 애를 써봐도 아득한 오후만 떠오르고 이름의 주인은 생각나지 않는다' ** 

로 끝나는 짧은 이야기 같은 것. 


그는 왜 이 시를 되풀이해서 읽었을까, 자연스레 이 페이지가 펼쳐질 정도로 
이 시를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아르바이트를 오가는 길에 
지하철에서, 버스 정류장에서, 길거리에서 간혹 그 시를 속으로 외워보곤 했다 


그리고 가만히 이름을 붙여봤다 

예를 들자면 그의 이름 

고남순. 

지금은 나무가 된 내 친구의 이름 
멀쑥하니 키가 크고 호리호리 흔들리는 
가느다란 미루나무 같던 나의 친구 


예를 들자면 너의 이름 

이강주. 

내가 지우지 못한, 
단, 하나인 너 


너의 이름을 붙여보는 상대는 대개 
친구의 말에 까르르 웃고 있는 고등학교 여학생이거나 
새침한 표정으로 문자를 보내다가 이내 책을 읽는 여대생 

늦은 시간 버스 정류장에서 너와 닮은 여학생을 발견하면 
너는 지금쯤 집에 들어갔을까, 어디를 다녀오는 길일까 혼자 물어봤다 
버스 의자에 기대 짧은 머리를 포르르 흔들면서 졸고 있는 스무살 남짓한 여학생 뒤에 앉아 
가만히 네 이름을 불러보곤 했다 
바쁜 아침 덜 마른 머리를 하고 버스 손잡이를 겨우 붙든 뒷모습을 보며 
너도 지금 어딘가로 가고 있는 중일까 생각했다 


이강주, 

이강주, 

이강주, 

... 

...강주야... 


어디선가 너는 그렇게 살고 있을 것 같았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모든 소녀들처럼 
내가 커피를 내밀었던 모든 젊은 여자들처럼 
세상의 아름다운 것만 보고 반짝이는 것들만 받으면서 
어둡고 아픈 것은 알지 못하고 알 필요도 없이 
너의 말랑말랑한 마음을 지켜줄 누군가를 만나서 
다치는 일 같은 건 없이, 행복하게 

너는 그렇게 살고 있어야만 했다 


네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나는 간절히 바랬다 





5년만의 너는 눈에 띌 정도로 말라있었다 

기억 속의 너는 적당히 건강한, 
늘 발그레하게 홍조를 띄고 있는 볼을 하고 
아하하, 하는 웃음이 떠나지 않는 
세상의 중심같은 에너지의 소녀였는데 

다시 만난 너는 창백하고 마른 뺨을 하고 있었다 
그다지 작지 않은 키는 마른 몸 때문에 더 껑충해보였다 
처음 보던 날 입고 있던 여름 원피스는 남의 것을 빌려 입은 듯 빙그르 돌았다 

고개를 갸우뚱할 때마다 보스스, 흔들리던 짧은 머리는 어디로 간걸까 
검고 긴 머리는 마치 틈하나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잔머리조차 눈에 띄지 않게 단단히 묶여 있었다 

너는 지독하게 잔인한 인간들에게 포획된 어린 동물 같았다 
그물에 걸릴 때 입은 상처 때문에 
손을 갖다대기만 해도 물어버릴 것처럼 온통 곤두서있었다 
널 버린 주인을 증오하다 지쳐버린 두 눈은 
으르렁거리는 공격적인 소리와 달리 불안정하게 일렁였다 


나를 보는 너는 차갑고... 

차갑고... 

그리고... 

불안했다 


아주 오래 전 그처럼, 
내가 끝없이 시험했던 때의 그처럼 

너는 종종 그 불안한 눈으로 나를 보곤 했다 
나는 그 눈을 볼 때마다 그가 떠올랐다 
그리고 널 끌어안고 싶어졌다 


하지만 다가가기는 커녕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널 보고 싶었다는 말 같은 건 
네가 그리웠다는 말 같은 건 

너의 차갑게 일렁이는 눈을 보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왜 떠났는지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너는 어떻게 살았는지 

넌 내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마치 나의 생각같은 건 궁금하지 않다는 듯한 태도였다 
네가 묻지 않는 한 나도 대답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변명이 될테니까 
네가 바라지 않는 한 나는 침묵을 지켰다 

그제야 나는 그때 그가 왜 나의 출현에도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켰는지 알게 되었다 
떠난 사람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나를 거부하는 듯 언제나 거리를 두면서도 
너는 아무 때나 나를 찾았다 

나는 네 부름에 언제나 대기상태 


너의 호출은 며칠 간격을 두고 이어졌다 
대개 짧은 문자가 전부였다 
어디로, 몇시까지, 뭔가 사다달라고 할 때만 문자가 조금 더 길어졌다 
누가 봐도 명백하게 필요없는 물건 
누가 봐도 명백하게 날 귀찮게 하기 위한 미션들 

자주 밤에 날 찾는 너 때문에 
나는 모든 일정을 새벽이나 아침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옮겼다 
카페 사장님은 다행히 그런 내 요청을 순순히 받아들여주었다 

- 너 요즘 어디 정신 놓고 다니는거야 

낮에도 계속되는 너의 호출에 가게를 갑작스럽게 비우고 
자꾸만 네게 신경을 쓰느라 실수를 하는 나에게 잔소리가 늘었지만 
그동안 일한 정 때문에 날 당장 잘라버리지 않는 것만도 감사했다 

널 다시 만난 뒤 
나의 모든 신경은 널 향해 뻗어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너의 움츠러든 어깨가 눈 앞에 아른거렸다 


내가 무서웠을까, 혐오스러웠던걸까 
아니면 날 보기만 해도 고통스러웠던걸까 
넌 내가 조금만 가까워져도 그대로 한 발 물러섰다 
나는 이내 너와 적정한 거리, 
네가 물러서지 않으면서도 너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을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하는 법을 배웠다 

두 발짝 뒤, 

떨어져 바라본 너의 뒷모습은 아렸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견고하면서도 
금새 무너질 것처럼 쓸쓸했다 

조금 뒤에서 나는 너의 곁을 맴돌았지만 네가 알아주는 일은 없었다 
그보다 너는 나를 지독하게 미워하는 것 같았다 
마치 나를 상처주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를 향한 독설들, 거부하는 말들, 패악들은 참을 수 있었다 
네 마음이 그래서 풀린다면 나는 백번, 백만번이라도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를 견딜 수 없게 한 건 
스스로를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는 듯한 너의 행동들 
자신이 혐오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잔뜩 웅크린 너의 어깨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향해 숙인 머리 
자학하는 말들과 자조하는 웃음 


내가 기억하는 너는 이렇지 않은데 
너는 많이 웃었고 
너는 빛이 났고 
너는 ... 세상의 모든 것이 아름답다는 얼굴을 했는데 
나조차도 
너는 나조차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곤 했는데 


언젠가 네 안에 있던 태양은 잊어버린 채 
녹아내리는 일 같은 건 없는 겨울의 아이처럼 
너의 차가운 눈은 영원히 얼어있을 것 같았다 

네가 아무리 나를 거부해도 
네가 아무리 나를 증오해도 
나는 너를 떠날 수가 없었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걸까 
나는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어떻게 해야 널, 다시. 
답을 찾지 못해서 그저 네 주위를 맴돌았다 






그날은 아직도 공기가 차가웠다 
문자에 적힌 장소에 도착했을 때 너는 낯선 남자와 함께였다 

너는 웃고 있었다 마치 가면이라도 쓴 듯이 
내가 기억하는 것과는 아주 거리가 먼 가짜 웃음을 
남자가 너에게 다가갔지만 넌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반발짝만 움직여도 정확하게 그만큼 물러나는 네가 

심장이 지끈, 했다 

넌 나를 상처주기 위해 불렀음이 분명했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그대로 밖에서 널 기다렸다 
네가 바라는 것이 그것이라면 상처받아주리라 

안에서 일어나는 걸 보고 잠시 건물 사이에 몸을 숨겼다 
너와 함께 있는 누군가에게 눈에 띄여서 괜히 네가 오해받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가게 밖으로 나온 너와 그 남자는 실갱이를 하는가 싶더니 
남자가 널 억지로 끌고가려고 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단번에 그 남자의 팔을 낚아챘다 

- 넌 뭐야? 

그 남자의 말에 네가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나를 보았다 
두려움에 떨면서 간절히 누군가를 바라는 눈 
심장이 찢어질 것 같았다 
차라리 나에 대한 증오로 불길이 일던 그 눈이 나았다 
이렇게 약해져서 금새라도 무너질 것 같은 너는.. 

내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너에 대한 연민과 남자에 대한 분노로 나는 순간 이성을 잃을 것 같았다 
남자는 나를 보고 압도된 듯 멈칫 했다, 

그 남자가 사라지자 너는 단번에 차가운 모습으로 돌아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손목을 어루만지더니 가방을 집어들더니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 지나치려고 했다 

나는 무의식 중에 너에게 다가섰다 
너는 멈칫 하더니 한 발 물러섰다 
아직까지 네 눈은 불안하게 일렁이고 얼굴은 약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이렇게 약하면서, 왜 그렇게 강한 것처럼 
나는 다시 한 번 네게 다가섰다 
너는 확연히 거부하는 듯한 몸짓으로 다시 물러섰다 

- 내가 뭘하면 되겠니? 내가 뭘하면... 어떻게 하면 예전처럼 다시 웃을래? 

더이상 참을 수 없는 질문이 결국 튀어나와버렸다 
너에게 '예전에'라는 말은 하지 않기로 다짐했는데 
지금의 널 보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서 참지 못했다 

미세하게 경련하던 네 얼굴이 이번에는 
금새라도 무너져내릴 듯 조각조각 부서진다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떨고 있는 너에게 나는 온기를 나눠줄 수조차 없다 
나의 진심의 자락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힘들어하는 너를 두고 
내가 널 구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너의 행복만을 바란다고 했던 나의 오만을 증오한다 
언젠가 나를 지배했던 무기력함이 나를 다시 덮쳤다 

- ... 나 때문이면 내가 .. 다시 사라져줄게 

최선,이라고 생각한 내 말에 너는 딱딱하게 굳는다 
몇년 전 그날,처럼 얼굴이 창백해진다 
내 심장은 다시 멎었다 

또다시, 사라져야하는구나 
또다시, 널 볼 수 없게 되는구나 

나는 침묵을 견디며 생각했다 

마치 도자기로 빚은 인형인 것처럼 아무 표정 없이 한참을 서 있던 너는 
처음으로 말을 배운 사람처럼 아주 천천히 들리지 않을 것 같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 거기 있어 

거의 체념하고 있던 때 들린 예상치 못한 말에 놀랐다 
너는 새로 배운 단어를 반복해보는 어린아이처럼 
스스로 한 말에 놀란 듯 멈칫,하다가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말했다 

- ... 그냥 거기 있어 





지금 내 앞에 걷고 있는 너는 
여전히 두 걸음 앞선 채 


조금은, 녹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했던 건 오산이었다 
너는 그날의 일을 반동 삼은 듯 더 지독하게 굴었다 

다만,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네가 머뭇거리기 시작했다는 것. 
바래다주는 네 집 앞에서 들어가기 직전에 
나에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는 중간에 
네가 말했던 시간에 조금 넘겨 도착한 나에게 분에 못이겨 책을 집어던지려다가 
너는 멈칫하고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그래도 여전히 집에는 인사도 없이 들어갔고 
용건 외에 다른 말을 하는 일은 없었고 
여전히 화가 나면 소리를 질렀고 
나를 괴롭히려는 듯 쓸데없는 일로 불러냈지만 

너의 머뭇거림, 
그 작은 신호에 나는 매달렸다 

거기 있어, 
그 한마디에 나는 그 자리를 지켰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잔뜩 취한 채 또다시 날 불러낸 너는 
달려온 나를 아는 척도 하지 않고 비틀거리며 걷고 있다 
가장자리를 따라 걷고 있는 네가 위태롭다 
이따금 쌩 하고 달려가는 자동차를 빼고는 고요한 이 저녁, 막 밤으로 넘어가려는 시간 
밤의 거리는 조용하다 

제법 봄내음을 띄는 밤공기에 순간 기분이 말랑해진다 
너는 여전히 날 돌아보지 않지만 
나는 여전히 너의 뒤에서 걷고 있지만 
잠시 그때의 밤인 것 처럼 
우리가 학교에서 함께 나오던 그 밤처럼 느껴진다 

그런 착각 때문이었다 
휘청하는 너를 향해 무의식중에 팔을 뻗은 건. 
내 팔에 의지해 균형을 잡은 너는 
이내 널 지탱하고 있는 것이 나라는 걸 깨달았다 

놀람과 공포로 네 눈이 커졌다 
놀라는 건 이해할 수 있었지만 
네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 팔 안의 너는 너무 가늘고 가벼워서 
네 몸이 떨리는 걸 느끼면서도 놓아줄 수가 없었다 
어정쩡한 자세로 붙들고 있던 나는 용기를 내 한걸음 다가섰다 
네가 내 팔과 내 몸 사이로 들어왔다 
너는 대체 얼마나 마른건지 그러고도 여전히 공간이 남았다 

안쓰러운 마음에 널 안으려고 하자 화들짝 놀란 듯이 네가 나를 뿌리쳤다 
그 서슬에 네가 너무 가까이 있어서 잠시 놓쳤던 정신이 돌아왔다 

- 미안 

뭘 사과해야할지 모르고 우선 내뱉은 말에도 
너는 두려운 듯이 고개를 저으면서 물러섰다 

- 강주야, 

혼자서만 속으로 되뇌곤 했던 네 이름을 부른다 
휘청이는 네가 불안해 다가서자 너는 더 놀란 듯 자꾸만 뒷걸음질쳤다 
한 발 다가서면 또 한 발 물러선다 
아니 이제는 아예 두 발 
위태롭게 가장자리를 따라 뒷걸음질치다 비틀거리며 한발 내려놓았다가 도로 올라선다 

위험하다 

나는 네가 뿌리칠 걸 알면서도 
우선은 널 안쪽으로 데려와야겠다는 생각에 
큰 보폭으로 단숨에 너를 따라잡았다 

널 붙들려고 하는 순간 
넌 공포에 질린 채 타닥 뒤로 내게서 멀어진다 

빠앙! 

휘청이던 네가 멈춘 곳은 1차선의 한복판 
그때 비명같던 경적소리는 달려오던 자동차의 것 

나는 두 번 생각할 틈 없이 달려가 널 끌어당겼다 
인도로 피하기엔 시간이 모자랐다 

젠장, 고남순, 너도 나도 이건 아니잖아 

나는 나의 절친에게 원망 아닌 원망을 털어놓으며 
피하는 대신 몸으로 너를 감싸안았다 

빛이 다가왔다 
등 뒤에서 빛나는 헤드라이트를 받으며 
위협하는 경적소리와 함께 나는 눈을 감았다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온 몸이 아프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려고 손을 뻗었다 

- 윽. 

그저 손을 머리에 갖다대려던 것 뿐인데 팔과 등의 통증 때문에 숨을 삼켰다 
아픔에 눈을 뜨니 높고 하얀 천장이 보인다 
아직 머리로 가져가지 못한 손에 줄이 매달려있다 

여긴 어디. 
나는 왜 여기. 

억지로 기억을 더듬는다 
마지막 기억이.... 

차가 달려들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때 내가 감싸고 있던 건 ... 너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통증으로 온몸이 아프다 
하지만.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나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보는 나를 보고 
구석에 앉아 있던 네가 다가온다 

- 깼어? 

너는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아무 일도 없다는 걸 확인하자 힘이 풀린다 
나는 그제야 도로 자리에 스르르 무너지듯 누웠다 

- 여긴, 
- 병원 

묻는 내 말에 네가 가만히 대답한다 
적어도 대답을 해주고 있다는 것에, 나는 일단 안도한다 

- ... 괜찮아, 살짝 부딪혔고.. 뼈에 이상없대.. 그냥 근육이 많이 놀란 것 같다고 하고.. 그래도 큰 사고는 아니니까 

너는 나를 보지 않고 아마도 내 상태를 중얼거린다 
목소리가 조금 잠겨있다 
너의 얼굴이 미묘하다 

- 너는, 
- ... 난.. 괜찮아 

나는 내 상태보다 네가 괜찮은지 더 궁금하다 
너는 그저 짧게 대답한다 
고개를 숙여버려서 네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정말로 괜찮은 건지 아니면 말을 하지 않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늘 단정하게 묶여있던 네 머리가 흐트러져 흘러내려와있다 
쓸어넘겨주고 싶은데, 긴장이 풀리는지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문득 심하게 잠이 쏟아진다 

- 약, 다 맞으면 집에 가도 된대.. 좀 더 자 

조용해진 나에게 네가 나직이 속삭인다 

- ... 가지마. 

까무룩 사라지려는 정신을 붙들고 네게 간신히 말했다 
마지막으로 내 눈에 맺힌 영상은 내 옆에 다가와 앉은 너 
너는 머뭇,하며 불규칙하게 내 어깨를 살며시 토닥였다 

- 여기 있을게 


















 



* <풍장>, 최영철 中 
** <珉>, 유희경 
옆에 선 여자아이에게 몰래, 아는 이름을 붙인다 깐깐해 보이는 스타킹을 신은 아이의 얼굴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 긴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끝이 하얗고 가지런하다 버스가 기울 때마다 비스듬히 어깨에 닿곤 하는 기척이 이처럼 사랑해도 될는지 창밖은 때이른 추위로 도무지 깜깜하고 이 늦은 시간에 어디를 다녀오는 것일까 그 애에게 붙여준 이름은 珉이다 아무리 애를 써봐도 아득한 오후만 떠오르고 이름의 주인은 생각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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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사고 나는데서 10화를 끊고 11화로 넘어갈 생각이었으나 
그랬다간 그나마 이 우울한 얘기를 읽어주는 냔들의 멘탈이 걱정되어.... 
급전개라고 욕해도 달게 받겠음 ㅠㅠ 개연성 따위....







Posted by april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