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날의 너는 평소와 너무 달랐다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던 내가 이해되지 않는다
나는 어째서 그렇게 멍청했을까
모든 신호가 불길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나는 내 감정에 취해 깨닫지 못했다
- 먹어, 먹어야 약 먹지
네가 탁자 위에 올려놓은 라면을 보자 그가 떠올라서 울컥 했다
정확하게는 그날, 그와 내가 얼싸안고 울었던 날이 생각났다
내가 그에게 용서를 말했던 그 날
너는 얼마나 아팠냐 이 병신아, 욕했던 그 날
그는 이제 없고 네가 지금 내 앞에 있다
모든 것이 그때와 같다
용서를 받아야하는 사람이 나라는 것만 빼고
나는 천천히 젓가락질을 했다
어떻게 먹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너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할지만 생각했다
- 미안하다
네가 받아줄지 아닐지 생각할 틈도 없이
울컥 눈물과 함께 그 말이 튀어나왔다
말하는 내가 들어도 변명에 불과한 그 이야기들에 너는 아무 반응하지 않았다
차라리 평소처럼 날 한 대 치거나 화를 내길 바랬다
그동안은, 너에게 난 분노하는 대상이기라도 했는데
그렇게 침묵하는 건 완전히 나를 버린 것 같아서 두려웠다
그때 네가 가만히 다가와 나를 안았다
그리고 네 손길에 움찔하는 내게 속삭였다
- 괜찮아
예상치 못한 말에 놀랐다
너는 계속해서 내게 말했다
- 그건 네 탓이 아니야
나를 용서하겠다는 의미였을까
내 탓이 아니라고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네 목소리를 들으면서 울었다
아무에게도 용서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를 용서할 수 있는 그가 이 세상에 없는 지금
나는 평생 용서받지 못한 채 살아가야만 한다고 믿었다
희망을 걸었던 너마저 이렇게 불행해져버렸다
네 차가운 눈을 볼 때마다 나는 내가 짊어진, 짊어졌어야 하는 죄를 깨달았다
벗어나지 못할거라고 생각했다
- 괜찮아 그건 네 탓이 아니야
더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나는 네게 기대 울었다
너는 나를 안고 참을성 있게 계속 속삭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눈물이 마르고 나니 뒤늦게 민망함이 찾아왔다
나를 안고 있는 네게 고마우면서도 너무 울어버린 것에 대해 조금 창피해졌다
네 어깨에서 고개를 들자 안쓰러운 눈을 한 네가 보였다
너는 가만히 내 눈물을 닦으려 손을 대려다
문득 무슨 생각을 했는지 화들짝 놀라며 뒤로 감췄다
또다시 달아나려는 듯한 몸짓에 나는 반사적으로 널 끌어안았다
내 팔 안에 갖힌 채 멀찍이 뒤로 몸을 빼는 너의 눈은 두려움에 가득차 있었다
- 가지마
방금까지 울었던 탓에 잠긴 목소리로 겨우 속삭였다
그 말을 하는 것만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난 널 보낼 수가 없어 이제
네 눈이 어찌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듯 일렁거렸다
내 가슴을 밀어내며 고개를 저으려는 네 뺨을 감싸안아 눈을 맞췄다
제발
- 가지마
다시 말했다
너는 애원하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는 너를 놓지 않았다
아직도 날 밀어내고 있는 네 손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가만히 네 손을 잡아 고개를 숙여 경건하게 입맞췄다
빼려고 하는 손을 오히려 꼭 쥐어 내 심장에 올려두었다
너는 금새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너는 왜 날 만난 후로 내내 울 것처럼 보이는 걸까
나는 네가 행복하길 바래왔는데
슬프고 화가 났다
놓아주길 바라는게 분명한 너의 눈을 피해
나는 네가 절대로 달아날 수 없도록 가둬버렸다
네 몸이 바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네가 나를 구원했듯이
나도 너를 그 두려움에서 꺼내주고 싶었다
나는 손을 들어 눈물이 고일 듯한 네 눈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 울지마
네 눈이 복잡한 감정들로 뒤엉켰다
희망과 절망이 순식간에 교차하는 듯 했다
절망한 듯 새까맣게 어두워지는 네 눈을 보며 나는 암흑을 걷고 있는 너를 발견했다
- 흥수야, 난
- 나 버리지 마
어둠 속에서 망설이던 네가 비로소 말을 꺼내려고 했다
대답을 직감한 나는 성급하게 먼저 비겁한 말을 했다
내 말에 너는 밀랍인형처럼 굳었다
창백해진 얼굴로 너는 한참을 유리구슬 같은 눈을 하고 허공을 보다가
마침내 고개를 떨궜다
내 손 안의 네가 또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뭐가 그렇게 두려웠을까 너는
왜 나는 그때 묻지 않았을까
나는 질문 대신 가만히 고개를 숙여 너에게 다가갔다
부드러운 너의 입술은 차가웠던 말과 달리 따뜻했다
너는 놀란 듯 움찔,했지만 적어도 조금 전과 달리 물러서지 않았다
용기를 내서 너를 좀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아직도 떨고 있는 널 안심시키고 싶었다
널 괴롭히는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는 이제 널 놓지 않을 거라고
울지마 내 옆에 있어 이제
나는 그 마음들을 담아서 간절하게 널 안았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너는 몇번이나 조심스럽게 애원한 후에야
겨우 내게 약하게나마 응답해주었다
- 웃어봐
아직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네게 물었다
내 말에 너는 애잔하게 웃었다
나는 그 얼굴에 또다시 슬퍼져서 널 더 꼭 안았다
나는 너를 이렇게 원하는데
너는 지금 나와 함께 있는데
너는 그대로 내게 안겨 잠들었다
금새라도 떠날 것처럼 내내 긴장을 풀지 않았는데
잠이 든 후에야 너는 무의식 중인지 내게 안겨왔다
새근거리며 잠든 너는 꼭 그 고요한 밤 같았다
어둠 속에 하얗게 빛나는 너를 보면서 나는 조금 슬프고 기뻐졌다
나는 조심스레 휴대폰을 집어들어 무방비한, 언젠가와 같은 순진한 표정으로 잠든 네 사진을 찍었다
아침에 네가 깨어나면 보여줄 생각이었다
너에게 아직 이런 얼굴이 남아 있다고
무엇이 널 두렵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내가 이 얼굴을 네게 되돌려줄거라고
오늘의 이 말을 내일 하겠다고, 나는 너를 보며 다짐했었다
내일,이 올 거라고 나는 어째서 확신했을까
네가 날 받아줬다고 어떻게 그렇게 쉽게 믿었을까
그건 너의 마지막 선물이었는지도 모르는데
그때, 말했어야했다
내일로 미뤄서는 안되는 거였다
아침에 눈을 뜨자 방에 나 혼자 남아 있었다
마치 그 모든 기억이 밤이 두고 간 꿈 같았다
아직 싱크대에 담궈둔 냄비와 약봉지의 흔적들만이 그게 꿈이 아니라고 증명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너는, 증발한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너에 대해 나는 아는 것이 없었다
네가 어디로 가버렸을지 짐작가지 않았다
네가 연락을 끊어버리면 나는 너에게 닿지 못한다
미친 듯이 널 찾아다녔다
아무리 연락을 해도 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새벽까지 불이 켜지지 않는 어두운 네 방 앞에서 밤을 새워 널 기다렸다
종종 날 불러냈던 도서관을 샅샅이 찾았다
그 앞에서 하루종일 앉아 있기도 했다
기억을 더듬어 네가 날 한번이라도 불렀던 곳이라면 어디라도 네 흔적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너는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내 휴대폰에는 아직 잠든 너의 사진이 남아 있는데
나는 아직 할 말이 남았는데
'내일' 말하리라 생각했던 그 말을
나는 아직 너에게 하지 못했는데
=
결국 너를 찾지 못했다
너와 연락이 닿을만한 사람을 기억해내려 애쓰다가 하경의 이름을 떠올렸다
너 외에는 거의 흔적이 없는 문자함을 뒤져 몇년전부터 그의 기일 즈음이 되면 도착했던,
그러나 한번도 답을 한 적은 없었던 민기의 문자를 찾아냈다
[고남순 5주기 모임합니다. 8/26일에 모여서 갑니다. 참석 가능하면 연락주세요]
지난해의 문자를 확인하고 마음이 알싸해졌다
그가 떠난 지가 어느새 6년
너의 그 시간은 대체 어떠했던걸까
근무하는 회사 로비에 와있다는 내 연락을 받고 하경은 놀란 표정으로 나타났다
하기사 하경의 번호를 알려준 민기도 6년만의 연락에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었다
학교를 떠난 이후 처음 만나는 거다
하경은 나를 죽은 사람이 돌아온 듯 아래위로 꼼꼼이 훑어봤다
그러다 한참 후에야 대체 용건을 짐작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 무슨 일이야? 그렇게 급하게
- .. 강주 어딨는지.. 혹시..
나의 말에 하경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었다
하경은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급하게 너의 번호인 듯한 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한참 간 후에도 네가 받지 않자 체념한 듯 끊었다
초조하게 망설이다가 문득 생각난 듯 그제야 다시 나를 봤다
- 근데 이제 와서 왜 니가 강주를 찾아?
무슨 말을 해야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너와의 지난 6개월을 하경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네가 사라진 그날 밤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머뭇거리는 나를 보는 하경의 눈이 심상찮다는 듯 가늘어졌다
- 무슨 일 있었지 둘이? 근데 왜 나한테 와서 찾아
- ... 연락이 안돼 갑자기 없어졌어
나의 어눌한 대답에 하경의 얼굴이 무감각해졌다
잠시 하경과 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한참을 그저 허공을 떠돌던 하경이 결심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 아직 아무 연락 없었어, 별 일 있는 건 아닐거야
자주 연락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강주랑 내가 제일 가까워 무슨 일 생겼으면 연락왔을 거야
- ... 강주한테 연락 혹시 오면...
- ... 알았어 연락줄게
- 아마 난 남순이한테 갈 것 같아, 혹시 내가 연락 안 받으면 그리로 해줘도 돼
- .. 응.
나의 부탁에 하경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 대답했다
생각에 잠긴 듯한 하경을 보며 나는 부스스 일어서려고 했다
그때 문득 생각났다는 듯 하경이 말했다
- 너 두번째야 알아?
- ...?
무슨 말인지 몰라 엉거주춤 서서 의아하게 바라보니
하경이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퉁명스럽게 던졌다
- 강주 어디 있냐고 나한테 물어본거 두번째야 이번이
그랬던가,
멍해졌다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하경이 원망스럽게 말했다
- 너 매번 약속이 틀려,
처음엔 강주가 행복해질거라고 하고
그 다음엔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설득해달라니까 알겠다고 하더니
어째서 강주는 더 불행해하고 더 죄책감에 갖히게 된거야?
너 대체 이번엔 강주 찾아서 어쩌려고 하는 거야?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할말을 잃었다
하경은 나를 똑바로 응시하면서 답을 요구했다
나는 너와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복잡한 생각이 머리에서 뒤엉켰다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면서 머리 속에서 단어를 골라낸다
- ... 물어보려고 ... 나여도 괜찮은지.
나는 네가 필요한데
너에게도 내가 필요한지
내가 네 옆에 있어도 되는지
나여도 너는 행복해질지
내가 널 행복하게 해주려고 해도 되는 건지
하경은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내 말의 무게를 가늠해보는 것 같았다
영겁같이 길게 느껴진 심사가 끝나고 하경은 마침내 판결을 내렸다
- 마지막이야, 니 약속 믿어보는 거. 또 어기지 마
나는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
- 야 이 새끼야 너야말로 약속이 틀리잖아
나는 원망스럽게 그에게 말했다
모르겠다는 듯 나뭇잎이 사라락 흔들렸다
이 새끼... 불리하니까...
- 내가 미안하다 그랬어 안 그랬어 어?
내가 너한테 미안한 거 다 지고 평생 너한테 갚으면서 살테니까
강주는 행복하게 해달라고 그랬냐 안 그랬냐?
처음 수목장을 할 때는 그저 어디에든 그의 흔적이 있길 바래서였다
그림을 보고 그와 닮은 나무를 골랐을 뿐인데 그는 점점 살아 있을 때의 모습을 닮아갔다
키가 훌쩍 크고 무심하게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햇살을 받으면 반짝,하고 빛나는 나뭇가지들
종종 보고 싶어지면 찾아왔었다
꼭 그가 내 얘기를 듣는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했다
처음 그를 찾아왔던 건 너와 옥상에서 그렇게 헤어진 직후,
학교에서 빠져나와 이곳으로 바로 찾아왔었다
아직 흙이 채 마르지 않아서 새로 심은 티가 나는 나무 아래 앉아서
가버린 그를 원망하고
떠나게 한 나를 원망하고
그리고 너의 행복을 빌면서 나는 울었다
통곡하다 지쳐 잠든 새 비가 내렸다
아직도 여름 기운이 가시지 않은 가을이었지만
마지막 점검차 돌던 관리인에게 발견되지 않았다면 동사했을런지도 모른다
그 후로도 일년에 몇번, 가끔 그를 찾아왔다
그에게 속죄하기도 하고
힘든 일이 생기면 야 이 새끼야 그래도 이렇게까지 하는 건 너무하잖냐 화도 내보고
보고 싶다고 나무를 붙들고 울기도 하고
그저 덤덤히 일상을 보고하기도 했다
이번엔 카페에서 일해
커피를 조금 내릴 수 있게 됐어
가끔 예쁜 여자들도 와
니가 봤으면 좋아했을걸 새끼.. 너 은근 얼굴 밝혔잖아
.. 강주 보다는 안 예쁘지..
그리고 늘 널 생각했다
너만은 지켜달라고
나는 이대로 살 수 있다고
그렇게 간절히 그에게 부탁했었는데
원망스런 마음에 나무를 한 대 친다
괜히 내 주먹만 아프다
나쁜 놈...
그렇게 가니까 좋냐...
그렇게 가버리니까 거긴 편하고 좋냐? 좋아?
이 새끼 너는 친구도 아니야...
강주 어딨냐 지금
내가 너한테 부탁했잖아 어? 근데 이러기야 너?
- ... 야 이 새끼야 이제 나도 몰라 나 이제 막 살거야
니가 내 부탁 안 들어줬으니까 나도 너 생각 안 해 이 새끼야
내가 강주 꼭 찾아내서 걔랑 백년만년 행복하게 살거야
부러우면 다시 나타나보든가 그러길래 누가 그렇게 가래냐 나쁜 새끼..
울컥하는 마음에 쏟아내본다
그는 여전히 무심히 바람에 살랑 흔들릴 뿐이다
나쁜 놈...
이럴거면 그렇게 가버리지나 말 것이지...
그립고 원망스럽다
나는 조심스럽게 나무 둥치에 손을 댔다
- 부탁 좀 하자 고남순, 그래도 나보단 거기 있는 니가 낫잖아
... 강주 아무 일 없지? 아무 일 없게 좀 지켜라 내가 금방 찾아낼거니까
걱정과 막막함에 나는 나무를 안아본다
- ... 거기 가면 여기서 신세진 거 내가 다 갚을테니까 부탁 좀 하자...
이번엔 좀 들어주라... 지금까지 안 된 거는 내가 퉁쳐줄게.. 이번엔 좀..
사락 바람이 분다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가 쏴아 하고 들린다
나는 한참을 그렇게 나무를 끌어안고 서 있었다
우리는 온기를 주고 받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휴대폰이 울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 여보세요,
- 흥수 학생, 친구한테 간 겨? 내려 와서 점심 먹어
전화를 받자 사투리 섞인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린다
다정한 목소리에 약간 웃어버린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벌써 점심 시간이라니 아침 전에 올라왔는데
- 네 지금 내려갈게요
전화를 끊고 그에게 말했다
- 나 밥 먹으러 간다 부럽지 새끼,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가랬냐.... 금새 먹고 또 오마
=
낮이 되니 제법 덥다
점심을 너무 많이 먹은 건지 약간 부담스럽다
나는 여름 직전이라 뜨거워지려는 태양을 피해 숲 속의 지름길로 걸었다
- 뭐려 친구가 오늘은?
- 대답이 없네요 부탁했는데
- 잘 들어봐 말하는 게 있을겨 찬찬히 들으면
콩자반에 김치만 놓고 점심을 먹으면서 했던 대화를 떠올려본다
나무 앞에 쓰러져 비를 맞고 있던 나를 깨운 아저씨는
나를 관리인 사택으로 데려와 뜨거운 차를 끓여주었다
대체 뭘 하고 있었느냐는 말에 더듬더듬 그에 대해 말했다
내 말을 한참 듣더니 본인도 아들을 일찍 앞세우고 여기에 수목장을 했다고,
그래서 일부러 모든 일을 정리하고 이곳에서 관리인 일을 한다고 했다
아들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있고 싶어서
같은 상처를 공유한 사람들,
아저씨는 내내 나를 안타까워했다
- 젊은 사람이 그러면 못 써,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때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살아도 살아있는 게 아니었는데
살아 있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산단 말인가
들은 척도 하지 않는 나를 무시했어도 그만이었을 걸
아저씨는 가끔 그를 찾아오는 나를 사택에서 묵게 해주었다
이번은 좀 길게 내려와있겠다고 했더니 아예 구석 방을 내주었다
그리고 이제야, 항상 날 볼 때마다 반복해서 외워버릴 지경이 되었지만
한번도 받아들이지 못했던 아저씨의 그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너를 만나고 너에게 용서받고 너를 다시 잃은 지금,
나는 비로소 그 말을 이해했다
살아야지 남순이 니 몫까지 열심히 살게
그에게 고백했다
그는 그런 나의 결심을 반기는 것 같았다
그게 나만 편해지자고 하는 생각일지라도 그가 내 생각을 지지해주길 바랬다
숲을 걸으면서 시간을 확인한다
3시쯤에 스프링쿨러를 돌린다고 했으니... 한두시간쯤 여유가 있다
얹혀지내는 게 죄송해서 그런 작업 같은 걸 도와드리곤 했다
이 자식... 내가 그거 하러 가기 전에 확답을 듣고 만다
아저씨 말대로 니가 뭘 대답을 하긴 하겠지
나는 조급하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솔길이 끝나는, 탁 트인 곳에 그가 있다
일부러 그곳을 택했었다 그가 좋아했을 것 같아서
이내 그가 보인다
나는 크게 손을 한번 흔들어보인다
어이 친구 나 왔어
담판 좀 지어보자고 이제
후룩 바람이 분다
나뭇잎이 웃음소리처럼 바스스 비벼 소리를 낸다
아까 없었던 인영이 눈에 띈다
내가 다가오는 기척을 들었는지 그의 앞에 웅크리고 있다 고개를 든다
나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믿을 수 없다는 듯 벌떡 일어난다
그곳에 네가 있었다
명백히, 너다.
나야말로 지금의 상황을 믿을 수 없다
너는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걸까
그늘 아래 서 있는 너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조금 마른 것처럼도 보인다
내가 천천히 다가가자 못에 박힌 것처럼 서 있던 너는 안절부절 못하는 듯 하다가 설핏 뒷걸음질 친다
금새라도 뛰어 달아나버릴 것 같다
- 강주야
나는 또다시 조급하게 네 이름을 불러버린다
내 말에 멈춰선 너에게 다가간다
이번에도 두려운 듯 네 눈이 일렁였다
묻고 싶은 이야기가 산더미 같았지만 애써 담담하게 웃으며 다른 걸 물었다
- 남순이랑 얘기 잘 했어?
- ....
너는 마치 무슨 말을 들은 걸까 하는 듯 한참 생각하는 것 같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너한테는 대답 잘 해주든? 나한테는 영 안해줘서... 남순이는 너 좋아했으니까 잘해주지? 이 녀석 은근 사람 차별한다니까
엉뚱한 내 말에 너는 조금 웃었다가 금새 굳어버린다
나도 너도 다음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망설인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문득 분 바람에 또다시 살짝 나뭇잎 그림자들이 일렁인다
그게 신호라도 된 걸까
너는 갑자기 약속이 생각난 사람처럼 다급하게 말했다
- 나,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
이 먼 데까지 내려왔으면서 일은 무슨 일
나는 널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휙 사라지려는 네 손을 잡았다
당황한 듯 나를 돌아보는 너를 한번 보고
나는 힐끔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게 네 대답이냐
고남순,
이게
네 대답이야?
그는 여전히 말하지 않지만
나는 그렇게 믿기로 한다
불안하게 날 보는 너에게 말한다
- 내가 고남순한테 물어봤는데 말이야, 이제 그만 하래
- ...?
너의 얼굴에 다시 만난 후 처음으로 궁금증이 떠오른다
나는 언젠가의 너, 세상의 모든 일을 궁금해했던 너를 생각한다
- 너랑 나, 남순이 간 거 때문에 자책하고 아파하는 거 이제 그만하래 그만해도 된대
네 얼굴이 새빨개진다
눈물이 금새라도 떨어질 것처럼 가득 차오른다
너는 계속 울기만 한다, 나를 만난 후로
너를 울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나는 가만히 손을 들어 네 눈물을 닦는다
너는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어쩌지 못하고 그렁그렁하게 맺힌 눈으로 나를 올려본다
- 그래서 내가 헛소리 하지 말라 그랬어 그런 말 안해도 그만할거라고, 나
마지막 말을 꺼내도 되는 걸까
나는 잠시 숨을 삼킨다
너는 이 말을 받아줄까
- 나, 너랑 천년만년 행복하게 살거니까 거기서 실컷 부러워하라고 했어
왜일까 네 몸이 다시 부르르 떨렸다
뭘 그렇게 두려워하는 건지
안타까운 마음에 널 가만히 안았다
- 그러자, 강주야 우리, 저기 가버린 고남순이 너무너무 부러워서 살아돌아오고 싶게 그렇게 하자
너만 괜찮으면, 나라도 괜찮으면
내 말에도 너는 대답이 없다
대신 안긴 가슴팍이 축축해진다
너는 소리도 없이 운다
거절일까
- ... 난 안되겠니...?
조심스레 묻자 너는 그제야 고개를 든다
몇번이나 망설이다 말한다
- ... 나랑 있으면.. 불행해져 ... 너
겨우 한마디를 꺼낸 너는 두렵다는 듯 나에게서 벗어나려고 한다
대체 넌 어떤 시간을 지나온 걸까
대체 어떤 시간을 지나오면 너로 인해 내가 불행해진다고 할 수 있는 걸까
- 네가 없으면 불행해 나는,
나는 너를 놓치지 않으려고 더 끌어안았다
제발 나의 진심을 알아주길 바랬다
- 그리고, 내가 그렇게 안 둬. 내가 받았거든 고남순 몫까지의 행운
두 사람 몫의 행운으로 널 지킬거니까, 불행해지지 않아 절대로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보는 너에게 웃어보인다
아직도 망설이는 너의 긴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그를 가리켰다
- 저봐, 남순이도 그렇다잖아
가만히 일렁이던 나뭇가지가 쏴아 하고 소리냈다
타이밍 예술이다, 고남순
너는 이제 반쯤 믿고 반쯤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한번 그리고 나를 한번 보았다
나는 너의 머리를 쓸어넘기며 가만히 네 이마에 입맞췄다
- 행복해지자 우리, 남순이 몫까지 더 열심히, 그 남겨둔 삶까지..
도망치지 말고 마지막 순간까지 남순이가 보고 싶어 했을 시간들을 살자
.... 나 열심히 할게
나는 너와 그를 향해 동시에 다짐했다
그,보다도 더 대답이 없던 너는 아주 오래 침묵한 뒤에 속삭였다
- ... 그럴 수 있을까..?
나는 네게 눈을 맞추고 확신에 찬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답을 찾으려는 듯 보던 너도 나를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얼굴이 아주 조금 웃었다
바람이 불었다
새 날이 시작됐다
=
처음 이 마지막 이야기를 구상했을 때 들었던 노래 -나성호(노을)의 빛
하지만 정작 쓰면서는 김연우씨의 '사랑한다는 흔한 말'을 들어서 분위기가 조금 슬퍼졌는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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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끝나버렸다
슬프고 아프고 그러나 해피엔딩인 이야기는, 여기까지. 입니다.
이게 내 결론이야, 변명도 설명도 없이 쓰려고 생각했지만 역시 그러기엔 모자라네
모든 이야기는 판타지래. 변하지 않는 사람이 변하는 것 자체가 판타지래
이 이야기의 판타지는 밝은 아이가 어둠을 걷게 되었다가 다시 빛으로 나가기를 결심하는 것까지.
널뛰는 감정 때문에 따라오기 힘들었을 거야 (편하자고 시작했는데, 1인칭은 아무나 쓰는게 아니란 것도 깨달았어;)
좀 더 잘 쓸 수 있었을텐데 - 역시 후회만 남았네 아쉬워... 모자란 재능으로 힘든 이야기를 덥석 물어버린 탓이야 미안해
다 설명하지 못한 모든 이야기는 냔들이 상상한 그대로야 - 각자의 해석대로
이 널뛰는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준 냔들 고마워, 그대들의 인내심에 리스펙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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