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in-paris








찬 물에 손을 씻어내고 탁탁, 털어서 물기를 닦는다 
저도 모르게 손 끝을 코로 가져가 냄새를 맡아본다 
두 번이나 비누로 씻어냈으니 괜찮겠지 생각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냄새가 날까봐 팔을 들어 셔츠에 배이진 않았는지 다시 맡아본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스치고 지나간다 
평소라면 이미 학교 밖으로 나가 집에 갔을 시간, 
그랬으면 어쨌든 아파트 단지 구석에서라도 자유롭게 담배 한 대 정도 태우고 들어오는 건 일도 아니었을걸 
저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 시간까지 학교에 남아서 
담배도 숨어서 겨우 피우고 손을 두 번이나 씻고 들어가야하는지 모를 일이다 


휴우. 


깊은 한숨을 내뱉는다 

다시 교실로 돌아가 자리를 지킬 생각을 하니 도로 답답해지는 것 같다 
불이 반쯤 꺼진 어두운 복도를 지나 터벅터벅 걸어간다 
자율 학습 시간에 남아 있는 아이들 때문에 불이 밝혀진 교실에서 새어나오는 빛이 
어쩐지 저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생각에 조금 위축된다 

복도 창 밖을 바라보니 
건물에 마주하고 있는 나무의 잎이 바람에 흔들린다 

그러고 보니 저 나무, 목련이었다 
지난해 하얗게 피었던 걸 본 기억이 나는데 
올해는 언제 지나가버렸는지 모르겠다 

조금 전 교실에서 읽다나온 시가 떠오른다 

목련 

어머니의 분냄새 


「고운 입술은 
  항상 
  말이 없으시고도 

  눈과 눈을 
  마주치면 
  애련히 
  미소지으시던」 



... 엄마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희미하게, 아주 단편적인 순간들 만이 
마치 스냅사진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아마도, 분냄새가 났을지도 모르지만 
엄마는 늘 하얬고 
분냄새보다는 약냄새가 났던 것 같다 

어둠 속에 하얗게 떠오르다가 금새 떨어져버리는 목련꽃처럼 
엄마는 뭐가 그렇게 급했을까 

사실 잘 기억나지도 않으니까, 그리울 일도 별로 없지만 


한참 창밖의, 이미 꽃은 다 지고 새순이 아니라 어엿한 이파리를 달고 
살랑이며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보다 발걸음을 옮긴다 

복도 끝 자락에 거의 다 가서야 있는 
아직 빛이 새어나오는 교실 문 앞에 서서 
바로 들어가는 대신 잠시 머뭇거리다가 창문으로 교실 안쪽을 넘겨다본다 

교실 안쪽에 3개의 책상을 돌려 둥글게 만든 곳에 앉아있는 두 사람이 보인다 
각자의 책에 집중하고 있는가 했던 둘은 이내 무슨 말이 오갔는지 
하나는 파르르 쏘아붙이고 
다른 하나는 무서워죽겠다는 듯 등을 뒤쪽으로 기대면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정으로 피식거리며 웃고 있다 

화를 내는 건 강주 
웃고 있는 건 흥수 

좀전까지 저도 저 안에 같이 있었는데 
어째서 도로 들어가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다 

한참 대화가 오가는 걸 보다가 남순은 결심한 듯 문고리를 잡는다 

드륵. 


소리가 나고 문이 열리자 
놀란 듯 문쪽을 바라본 강주가 남순을 발견하자마자 고개를 푹 숙인다 
당연히 그걸 봐버린 남순은 어쩐지 기분이 나빠지지만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침묵. 


어째서일까 
저만 그 자리에 있으면 묵언 수행이라도 하는 듯이 정적이 흘러버리는 건. 

남순은 저도 모르게 긁적, 옆머리를 긁는다 

좀전에도 그랬다 
남순이 갑자기 일어나서 교실을 나와야했던 것도 
이런 분위기를 견딜 수 없어져서, 자리를 비워야만 하겠단 충동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정선생님의 숙제를 뒤적이던 남순이 
무의식 중에 손가락으로 휙휙 돌리던 펜이 도르르 굴러갔다 
그걸 잡으려고 뻗은 손이 스치듯 참고서를 향해 뻗던 강주의 손에 닿았다 

그저 닿았을 뿐이다 

그런데, 


갑자기 불에라도 덴 것처럼 순식간에 강주가 손을 거둬들였다 
어리둥절해진 남순이 멍하니 있는 새 
강주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문제집에 집중하는 듯했다 
펜을 쥐고 있는 손이 가늘게 떨리면서 조금도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걸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런 줄 알았다 

왜 떠는 거지? 

남순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모르겠다 
뭘 얼마나 잘못해야 닿는 것조차 싫어질 수가 있는 건지 
제가 강주에게 실수한 일은 없는 것 같은데. 

언제부터인가, 그러니까 아마도 3학년에 같은 반이 되고 나서는 아예 본격적으로, 
강주는 남순만 보면 꿀먹은 벙어리처럼 말도 없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저에게 말을 걸어올 때는 제대로 일 못챙기는 회장을 나무라는 부회장의 역할을 수행할 때뿐이었다 
그런 위치야 이미 2학년 2학기 때부터 익숙했던 구도라서 불편할 건 없었지만 
유독 저에게만 저렇게 이상하게 구는 강주가 영 신경쓰였다 

벌써 3년 째 같은 반이다 
아무리 세상사에 관심없는 남순이라고 해도 강주가 원래 저런 성격이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지금도 저에게만 저러고 있는 거다 
방금까지도 흥수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주고 받았으면서 
어째서 저에게만 뻣뻣하게 대하는 건지 
남순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실은 조금 섭섭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강주는 흥수보다 저랑 더 가까워야 맞는 거 아닌가, 
아무리 데면데면하게 지냈어도 같은 반이었던 시간도 더 길고 
그러니까 얼굴 보고 지낸 시간은 몇배나 더 긴 건데 
싫다는 저를 질질 끌고 핫도그 집에 가서 꿔다놓은 보릿자루 처럼 앉혀놓고 
혼자서 핫도그를 먹어치운 적도 있으면서. 
예전엔 금새라도 때려눕힐 것처럼 저에게 주먹질 한 적도 있으면서. 

한번도 누군가에게 저렇게 목석처럼 구는 걸 본적이 없다 

아, 
송하경이랑 틀어졌을 때 빼고는. 

확연히 느껴지는 거리감에 남순은 저도 모르게 조금 얼굴을 찌푸린다 
제가 뭘 잘못하긴 한거라면 
남순이 아는 강주는 이미 직설적으로 말해버리고도 남았을텐데 
도대체 얼마나 마음에 안드는 일이길래 저렇게 말도 없이 몇달째 서먹하게 구는 건지 
남순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 이유가 이젠 겁이 날 지경이 되어서 
차마 묻지도 아는 척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놈의 '스터디'에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게 곤욕스러워 죽을 지경이다 

이게 다... 


옆에 앉아 있는 흥수를 힐끗 본다 
고개를 푹 숙이고 조용해진 강주가 우스워죽겠다는 표정이다 
슬쩍 본 강주의 얼굴을 붉어지다 못해 금새라도 울 것 같은데 
뭐가 저렇게 신났는지 모르겠다 

도통 다른 사람들에겐 관심없는 흥수가 이상하게 강주가 얽히면 목숨 걸고 놀려댔다 
강주는 남순이 있는 것 조차 잊는지 기억 속의 예전 모습 그대로 얼굴에 홍조를 띄고 한마디도 지지 않고 응수하곤 했다 
원래는 저랬었지 참, 싶어서 남순은 가끔 신기하기도 했다 

어째서 흥수는 죽어라고 강주를 괴롭히는지 
어째서 강주는 한마디도 지지 않고 티격태격하는지 
그러면서도 왜 저 둘은 매주 두번씩 여기 나와 앉아 있는 건지 

남순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젓는다 


하여간 이상한 녀석들... 


그래도, 흥수가 저렇게 싱글거리는 걸 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가끔 집에 가는 길에 흥수는 우스워 죽겠다는 듯 그날 강주가 실수하거나 당한 이야기를 했다 
그럴 때면 마치, 아주 오래 전 아무 일도 없던 때의 흥수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러니 이해는 되지 않지만, 
내내 저에게 딱딱하게 구는 강주와 있어야하는 게 불편하지만, 

내키진 않지만 봐주자 싶어진다 

그래 

어차피 흥수를 위해 여기 있는 거니까.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려는지 
밤공기가 달큰한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가로등을 따라 걸으면서 남순은 킁,하고 숨을 들이쉬어본다 
싱그러운 풀냄새에 마지막을 알리는 진한 꽃향이 섞여 있다 

문득, 
이 봄이 가버린다는 게 아쉽다 

남순은 눈만 돌려 힐끗 옆을 바라본다 
너무 익숙해서 이제는 옆에 있는 게 당연한 흥수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교복을 입고 흥수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봄은 이제 마지막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또 인생이 달라져버릴게다 
앞으로 뭘 해야할지 관심도 흥미도 없는 저와 달리 흥수는 요즘 부쩍 공부에 재미를 붙인 듯이 보였다 
아니 뭐 원래도 공부는 좀 하던 놈이었으니까 

만약 흥수가 대학을 가게 되면 그건 흥수를 위해서 좋은 일인데, 그러니 축하할 일인데, 
그런데 그것보다는 이런 봄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초조해진다 


..별 생각을 다한다.. 

남순은 작게 고개를 흔든다 

남순이 그런 생각을 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평소처럼 아무 말 없이 걷던 흥수가 불쑥 말을 꺼낸다 

- 야 
- 어? 
- 이강주 어떠냐? 
- 허? 

예상치 못한 질문에 놀라 오랜만에 눈을 크게 치켜뜬 남순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흥수가 멋쩍게 말한다 

- 아니, 애가 괜찮은 거 같아서. 착한 것도 같고 그만하면 얼굴도 예쁘고 

중얼중얼 누구 들으라는 건지 알 수 없는 말에 남순의 눈썹이 수상쩍다는 듯 올라간다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건지 짐작을 못하겠다 
아까는 교실에서 애를 울릴 지경으로 괴롭히더니 
이제와 저렇게 어색해서 죽을 것 같은 말투로 물어보는 건 또 뭔가 

남순은 잠시 데굴데굴 눈을 굴린다 


그러니까.... 
이 상황을 정리하면... 


갑자기 강주가 어떠냐고 묻는다는 건 
그러니까 흥수는 강주가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 

흥수 버릇이다 
티비 보다 말고 제가 예쁘다고 생각하는 연예인 나오면 너는 쟤 어떠냐? 라고 물어보는 거. 
그리고 별로라고 말하면 쌍심지를 켜고 투덜거리곤 했다 
주변의 여자애에 대해서 물어본 건 처음이긴 하지만 
같은 의미가 아닐까 아마. 

하고 남순은 미루어 짐작한다 

그럼 아까 놀린 것도 마음에 들어서 괜히 그런건가? 

어휴... 이 초딩아... 
그래서 어느 여자가 넘어오겠냐 
니가 형님은 무슨 형님이냐 한참 멀었구만 


남순은 눈에 띄지 않게 한숨을 쉰다 
대체 이 초딩 수준의 연애 고자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코치해야 될지 감이 안온다 
저도 연애 경험이 많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츤츤댄다고 이강주 같은 애가 넘어오지 않을 거란 거 정도는 아는데 
저 놈은 맨날 형인 척 하면서 그런 것도 모르고 뭐 했나 모르겠다 

- 애가 활발하기도 하고, 마음 씀씀이도 괜찮은 거 같고... 야... 듣냐? 

대답없는 남순에게 불안하게 계속 말하던 흥수가 
중얼거리고 있는 거나 다름없는 자신을 깨달았는지 
남순의 머리통을 툭,하고 때린다 

- 이 새끼가 형님 말씀하시는데 
- .... 아씨 

무방비하게 있다가 혀깨물뻔했다 
오랜만에 전투력 상승해서 째려본다 
제가 때려놓고도 힘조절이 잘 안 된 건지 흥수가 멋쩍은 듯 헛기침을 한다 

- 큼... 그러니까 니 생각은 어떠냐고 이강주 

제 생각이 뭐가 중요하다는 걸까 

남순은 가느다랗게 눈을 뜬다 
그런 남순에게서 흥수는 탐색하듯 눈을 떼지 않는다 


이강주. 

어떠냐고. 


한번도 생각해본적 없는 질문이라 머리가 복잡해진다 


이강주 

에너지 그 자체 
오지랖의 정점 
사건사고의 중심 

편견없는 사고 
솔직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표정 
똑바로 직시하는 눈 
사람을 끌어들이는 밝음 

.... 


문득 남순의 마음에 
언젠가 발견한 '그' 순간이 떠오른다 


이강주가, 이강주가 아닌 줄 알았던 
어쩌면 그게 이강주의 속살인지도 모를 그 얼굴. 


빛.의 결정체. 

너라면 


- 그래, 뭐 괜찮네 


흥수를 맡겨도 될지도 




















=== 
너무너무 오랜만이라 기억해주는 냔이 있을라나... 모르겠지만... 
남순이가...이제야 움직여주기 시작해서.. 마무리는 하고 싶은 마음이라 올려봐... (니 머릿속인데 이게 무슨! 라고 해도... 그게 그래;;;;;;;;) 
남순이 참, 눈치 없지....?;;; 이 자식-_-;;; 니가 누구더러 연애고자라고 고나리질이냐;; 


==== 

중간에 나온 시 전문. 


목련 - 홍수희 

내 어릴 적 
어머니 
분 냄새난다 

고운 입술은 
항상 
말이 없으시고도 

눈과 눈을 
마주치면 
애련히 
미소지으시던 

빛나는 치아와 
곱게 빗어 올린 
윤나는 머릿결이, 

세월이 
너무 흘러 
무정하게도 

어머니 머리에는 
눈꽃이 수북히 
피어났어도 

추운 겨울 지나고 
봄볕 내리는 
뜨락에 

젖빛으로 
피어 앉은 네 
모습에선 

언제나 
하얀 
분 냄새난다






Posted by april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