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in-paris








- 영화는 재미있게 봤냐? 
- 나 액션 안 좋아해 
- 언제부터? 

- ... 그때부터. 


침묵이 흘렀다 

남순은 눈을 감고 그렇게 대답해버린 것을 후회했다 
그건 흥수의 탓이 아니었지만 
아마 지금 침묵하고 있는 흥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병신같은 고남순 


왜 그렇게 대답해버렸을까 


액션영화를 볼 수 없게 된 건 
그러니까 누군가를 향한 일방적인 폭력을 견딜 수 없게 된 건 
그날 다친 흥수 때문이 아니다 

그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 인물이 꼭 스스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인물이 폭력을 휘두르면서 짓고 있는 표정과 
아마도 놓아버렸을 눈빛 - 절대로 일반적.으로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 을 보면 
마치 거울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때의 자신이었고 그리고 언제든지 자신이 될 수 있는 그 가능성이 두려워서 
점점 조금이라도 고통받고 있는 사람이 등장하는 씬은 볼 수 없게 되어버렸을뿐이다 


유치한 심술이었다 
굳이 그 이야기를 해버린 건 

남순은 조금 전에 해버린 말을 취소하고 
제대로 알려줘야겠단 생각에 눈을 떴다 


- 바... 

- 너 혹시 이강주가 고백했는데 니가 찼냐? 


흥수가 한 발 빨랐다 
설마 하는 기색이 가득한 목소리에 남순은 대답없이 어깨를 움츠렸다 

- 고남순, 일어나봐 얘기 좀 하자 


심각한 목소리에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은 내키지 않았다 
얘기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좀전의 자신의 말실수까지 모두 되돌려 없던 일로 하고 싶었다 


남순은 그러는 대신 시선을 떨궜다 
흥수는 그런 남순을 도무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몇 번 꺾다가 잔뜩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 너 진짜 이강주 찼냐? 

찼다. 
라고 말해야할까 

그저 그 손을 잡을 수 없었다. 
고 하는 편이 옳지 않을까 

뭐라고 답을 해야할지 몰라서 남순은 침묵했다 
흥수와 처음 다시 만났던 그날처럼 
저에게 왜 그랬냐고, 분노했던 그때처럼 
남순은 답을 가졌지만 그 답을 말할 수 없어서 
답하지 않았다 

- 왜 그랬냐 
- 뭐가 
- 너 이강주 좋아하잖아 

오히려 차분해진 목소리로 흥수가 말했다 
그 말에 불에 데인 것처럼 따끔해진 건 남순의 마음뿐 


남순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어떻게 안 걸까 박흥수는 대체. 

원래 남순과 강주가 그렇게 가깝게 지냈던 것도 아니고 
그날 이후로 둘 사이가 달라진 것도 없었는데 


- 아니라고는 하지 마라 내가 잡은 증거만도 한 박스는 넘을테니까 


내 마음을 알게 된 건 정작 나는 그날이 처음이었는데 
어째서 저렇게 확신에 차서 말하는 걸까 
나조차 몰랐던 내 마음을 


남순은 그 '마음'을 떠올린다 

넘실거리는 파도처럼 저를 휘감아오던 강주의 움직임을 
도망치고 싶어지면서도 도망칠 수 없게 사로잡았던 그 눈을 
그날만은 저만을 향했던 그 목소리를 

흥수가 전부였던 자신의 세계에 
아무렇지 않게 성큼, 한발 들어와버린 


강주를 향한 낯선 소유욕을 


어쩌면, 
어쩌면 정말 흥수가 말한대로 
이미 인지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던 

여자, 이강주를. 


떠올리고 

아련해지다가 
이내 아파진다 

남순의 눈이 일렁이다 가라앉는다 


대답하지 않는 남순에게 흥수가 차분하게 다시 묻는다 

- 왜 그랬냐, 좋아하면서. 


왜 그랬냐고. 

남순은 생각한다 

그건. 



- 좋아해. 

강주는 동그랗게 뭉쳐진 솜사탕처럼 
보송하고 한 입 물면 입 속에서 금새 녹아버릴 것 같은 말을 단숨에 던졌다 

그 말이 믿을 수 없이 달콤해서 남순은 자신이 솜사탕이 된 것처럼 그 자리에서 녹아버릴 것 같았다 

동시에 그 말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것 같아서 
한번도 바래본 적이 없는 산타클로스의 선물을 베개 머리에서 발견한 것처럼 
손에 쥐고도 언제 빼앗길까, 이게 정말 나를 위한 것일까 갑자기 두려웠다 

남순의 머리를 하얗게 날려버린 강주는 
정작 자신이 폭탄세례라도 받은 듯 불안한 표정으로 
남순을 올려다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좀전에 흐트러진 머리가 아직도 헝클어져있었다 
노란 가로등 때문인지 얼굴이 발그레하게 보였다 
긴장했는지 침을 삼키다말고 혼자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불규칙하게 숨을 쉬고 있는 게 
남순이 등지고 있던, 강주를 향한 가로등 불빛에 그대로 드러나서 
상황에 맞지 않게 남순은 조금 웃음이 날 것 같았다 


남순은 저절로 강주의 머리를 향하는 손을 
퍼뜩, 의지로 잡아내렸다 

닿는 순간 이번엔 멈출 수 없어질거다, 직감했다 


그리고, 

불과 몇분전이었다 
흥수에 대해서 말한 것이 
잊어서는 안되는 사실들. 

그러니, 


남순은 마음 속으로 혼자 생각했다 


나는, 흥수를 위해서 뭐든 할 수 있어 
흥수는 나 때문에 제 미래를 잃었어 
나는 그런 희생을 바탕으로 살고 있어 
그러니, 내 마음은 없어 

하지만... 


기대와 불안으로 반짝이는 강주를 보면 
또다시 말을 할 수 없었다 

몇번이나 망설이다가 남순은 마침내 말했다 


- 나한테 넌 친구야 

애써 가장 부드러운 말을 고르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없이 
강주의 눈이 순식간에 스위치를 내린 것처럼 칠흑같은 암흑에 휩싸였다 
불이 꺼진 것처럼 검어진 눈동자가 그대로 멈췄다 

남순의 말에 상처받은 듯 변화무쌍하게 일렁이는 변수 - 강주를 보면서 
제가 끼친 영향력에 놀라고 그걸 철회하고 싶은 생각에 휩싸였다 

- ... 흥수 같은 


여기에서 접어야만 하는 자신의 마음을 위해서 
아무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흔적만이라도 남기고픈 마음에 
남순은 참지 못하고 덧붙였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이었다 

고남순의 인생은 박흥수가 전부. 
흥수 같은 친구,라는 말은 그러니까 
고남순의 세계가 박흥수와 이강주로 나뉘었다는 말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네가 내 인생 전부일만큼 커졌다는 고백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강주가 알아차려주길 바랬다 
그건 거절의 말이 아니었다고, 
나는 스스로 결정할 수 없을 뿐이라고, 


그렇지만, 

설명하는 대신 남순은 말을 아꼈다 
강주는 아무렇지 않은 듯 남순의 어깨를 툭툭 쳤다 

- 그럼, 친구지, 그래서 좋아한다니까 친구. 

제가 한 서툰 거절을 생각하면 고마울정도로 자연스러운 수습인데, 
그 말을 하는 강주의 눈은 아직도 혼란스러운데도 
남순은 강주의 '친구'라는 말에 상처입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상처입을 자격이 있을까 
남순은 이중적인 태도의 스스로를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변명도 설명도 없이 강주를 들여보내야했다 



- 왜 그랬어, 

이젠 안타까움조차 묻어나는 흥수의 말에 
그제야 남순은 고개를 들고 흥수의 눈을 본다 

왜 그랬냐면, 

왜 시작하기 전에 접기로 했냐면 

왜 냐면 


- 너도, 그렇잖아 
- 뭐? 

남순의 말에 흥수는 예상치 못한 어퍼컷이라도 맞은 듯 멍해진다 

- 너도, 이강주 좋아하잖아 

남순은 조금 전의 흥수처럼 덤덤히 말했다 
그리고 흥수가 제 말을 반박하기 전에 쐐기를 박았다 

- 아니라고는 하지 마라, 내가 본 것도 꽤 되니까 

흥수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잠시 말을 잃었다 
그리고 남순은 자신이 방금 한 말이 
오히려 흥수가 저를 추궁한 말을 긍정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너도. 
라는 건 
나는. 
좋아해. 
라는 의미 


저도 모르게 해버린 말에 진심이 담겨버린 걸 깨닫고 
그래도 흥수는 알아차리지 못했길 하고 바라고 있는데 
갑자기 흥수가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 미쳤냐, 내가 어딜 봐서 그런 선머슴을 

야, 

남순이 미처 흥수를 제지하기도 전에 
황당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 흥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웃었다 
그저 마음을 부정하기 위해서,라고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크게, 그리고 너무 오래 웃어서 사람이 저렇게까지 웃을 수도 있나 싶을 정도였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해진 남순을 
검지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는 아예 눈물이라도 흘릴 듯이 큭큭거렸다 

이 자식이 미쳤나, 

남순이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할 무렵 
흥수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 그리고, 그렇다고 한들 뭐가 문제인데? 


흥수의 말에 남순은 머리가 서늘해진다 


저에게는 가장 큰 문제였는데 
흥수는 그게 무슨 문제냐고 한다 
마치 내내 빚진 것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겉으로만 빙글빙글 돌던 저에게 
그러지 말라고 단번에 안쪽으로 끌어들였던 그 날처럼 
남순에게는 가장 높고 넘을 수 없을 것 같았던 허들을 
단번에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무너트려버린다 

- 언제까지 내 핑계 댈거야 

한번도 핑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연한 댓가,라고 생각했다 
제가 흥수의 미래를 부순 이상 
그래서 포기해버린 제 미래를 흥수가 돌려준 이상 
흥수의 인생을 우선으로 해서 사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한다면 
그건 당연히 흥수,여야한다고 생각했다 

핑계라니 
핑계라니, 


멍해진 남순이 마음에 들지않는 듯 흥수가 퍽,하고 남순의 등을 내리쳤다 

헉, 

예상치 못한 공격에 
사레가 들려 콜록거리면서도 여전히 멍한 남순에게 
흥수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 야 이 새끼야 정신차려 이강주나 되니까 너 받아준다 그러지 
  내가 언제까지 너 거둬먹이랴? 형님이 그렇게 만만해보여? 어? 


거둬먹이기는 누가 
누가, 널더러 날 거둬먹이라든 
내가 누구 때문에 지금! 
나야말로 널 거둬먹이려고! 


냉정한 흥수의 말에 발끈해서 이번에야말로 반박하려고 과격하게 고개를 들었다가 
진지하게 자신을 보고 있는 시선에 멈칫한다 


- 고남순, 니 행복은 니가 잡아. 과거에 그만 매여있고 


남순은 그 말에 멍해진다 

과거, 

매여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그저 제 인생을 흥수의 그것과 분리할 수 없었을 뿐이었지만 

정말은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강주의 그 내민 손을 잡으면 
겨우 다시 잡은 흥수의 손을 놓아버려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떻게 되찾은 세계인데 
어떻게 붙잡은 안정인데 
이걸 놓아버릴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흥수를 위해서,라는 말을 앞세워 
그 내민 손을 흘려 지나게 둘 수 밖에 없었다 


흥수의 흔들리지 않는 시선에서 
차마 비켜나지 못한 남순의 눈이 일렁인다 

행복,해져도 되는 걸까 

나는 네 미래를 빼앗고 
그걸 다시 되돌려줄 수도 없는데 

그래도 나는 행복해져도 옳은 걸까 


나는 널 버리지 않아, 
라고 말하던 강주의 정직한 눈을 떠올린다 
그 눈이 나만 바라보는 걸 원해도 되는걸까 


꼭꼭 접어서 억누르고 있던 마음이 
마구 공기 펌프질이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크게 부풀어오른다 
뱉아버리면 이 세계 전체를 물들일 것 같다 

나는, 
그러니까 나는, 
아직은, 


망설이는 남순을 향해 
흥수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툭,하고 마음의 빗장이 풀리는 소리가 들린다 
내내 망설이던 남순을 단숨에 자신의 세계로 편입시켰던 흥수가 
이번엔 단번에 강주의 세계로 남순을 밀어넣었다 

이제, 멈출 수 없다 

남순의 눈이 조금씩 차분해진다 


그런 남순을 바라보던 흥수가 피식, 웃는다 
그리고는 남순의 어깨를 확 찍어 눌렀다 
남순은 그대로 쓰러져 흥수에게 깔렸다 

- 형님이 언제까지나 널 지켜줄거라는 생각을 버려 이 새끼야 
- 야 이거 안 놔? 

남순은 흥수에게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리지만 
자세를 미처 갖추지도 못하고 그대로 깔린 거라 
아무리 몸부림쳐도 팔 하나 드는 것조차 어렵다 

그런 남순을 깔고 앉았던 흥수가 
자세를 바꿔 기술을 걸어 목을 조여온다 

- 형님이라고 불러봐라, 그러면 생각해보고 
- 야... 컥... 이거 

숨을 막히게 하는 팔에 감정이 실린 것처럼 느껴지는 건 그저 남순의 생각일 뿐일까 
남순이 컥컥거리는 걸 보면서도 낄낄거리기만 할 뿐 딱히 놓아줄 생각이 없어보이는 흥수가 오히려 고마웠다 
이런 공격 같은 건 백만번이라도 더 당해주리라 생각한다 
그래도 '게임'의 재미를 위해서 한번 더 의미없는 반항을 하며 버둥거려본다 

- 숨.. 막혀 죽겠... 야.. 놔.. 
- 순순히 항복하시지 
- ... 항복이다... 이 새끼 
- 형님한테 말버릇 봐라 
- 형님 놔주세요 


싹싹 빌고 나서야 흥수는 만족했다는 듯 팔을 풀었다 
더운 날 기운이 쭉 빠지도록 몸싸움을 한 뒤라 
남순도 흥수도 녹초가 된 것처럼 축 늘어져 바닥에 누웠다 

선풍기 바람이 뱅글뱅글 회전하면서 땀을 식히고 지나갔다 
뭐가 그리 좋은지 피식피식 웃고 있는 흥수를 보며 
남순도 자꾸만 따라 웃었다 


박흥수, 
나의 세계, 
나의 형제, 

널 위해서라도 나, 
행복해질게. 

























========== 
외전을 쓰다보니 난 참 나빴구나 남순아 미안해 ㅠㅠ 
하지만 남순이의 이야기는 밝고 샤방하게 쓰고 있어.. 이때의 남순이는 행복했을테니까





Posted by april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