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수업. 2]
=
- 실전 문제집은 로비에서 찾아가세요
강사의 마지막 말에 정신이 번쩍 든다
강의가 언제 끝나버린 걸까
책상 위를 내려다보니 줄도 제대로 안 맞추고 마구 노트 위에 끄적인 흔적들 뿐이다
찬찬히 살펴보면 좀전까지의 강의 내용인 걸 유추할 수는 있다
수업은 들었으니... 노트 정리 다시 하면 되겠지
그 와중에서도 어떻게든 강의 내용을 - 엉망진창이지만 - 받아적었다니 스스로가 좀 굉장하다, 싶어진다
아니 독하다고 해야할까
하지만 완전히 강의에 집중할 수 있을 정도로 독하지는 못했다
자율학습까지 마치고 학원에 들어선 순간부터,
정확하게는 좀 전의 '그 때'부터
경민의 신경은 온통 그때의 상황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때 은혜에게 뭐라고 했어야 좋았던걸까
최소한 이경에게라도 뭐라고 말했어야 했던걸까
하지만 몇번이나 조심스럽게 돌아볼 때마다
이경의 얼굴은 금새라도 버럭할 것처럼 짜증스럽게 구겨져있었고
경민은 그게 제 말 때문인 것 같아서 도저히 말 걸 타이밍을 찾지 못했다
혹시라도, 이경은 야간 자율학습에 남아 있는 적이 없었으니, 이경이 하교하는 길에라도 말을 걸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내내 구겨진 표정으로 앉아있던 이경은 마지막 수업이 시작되기 직전 짐을 싸더니 미처 말을 걸어볼 틈도 없이 휙,하고 나가버렸다
그래도 요즘엔 학교 수업이 끝날 때까진 자리를 지키고 정선생님의 종례까진 듣고 집에 갔더랬는데
제가 한 말이 수업 도중에 나가버릴 정도로 마음 상하게 한 걸까,
이경이 집에 돌아간 후에는 더더더더더욱 마음에 걸렸다
그러니 아무리 비싼 특강의 마지막 수업이었더라도 제대로 귀에 들어올리가 없다
손으로는 기계적으로 들리는 말을 마구 받아쓰면서도
머리로는 하나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경민은 온통 짐 싸느라 시끄러운 소리를 배경으로 조그맣게 한숨을 쉰다
오늘은 이렇게 지나갔다치고, 내일은 또 어쩌지.
생각하니,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오른다
방학식.
그러니까
종업식.
2학년의 마지막날이다 내일은
경민은 순간 지끈해오는 머리를 짚는다
2학년이 끝나면 다시는 얽힐 일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당장 내일로 다가온 종업식, '끝'이란 단어에 안절부절하게 되었다
역시 아까 아무리 은혜의 말에 놀랐어도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었다
뭐라고 답을 해야할지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지나치게 부정해버렸다
교실의 맨 앞과 맨 뒤, 그 거리는 상상 이상으로 멀어서
노력하지 않으면 한학년 내내 한번도 말을 섞지 않고 지나갈 수도 있었다
그 사이를 넘어 무슨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건, 아마 강주에게나 가능할 거다
게다가 저와 이이경이다
온 교실이 알정도로 떠들썩하게 싸웠던, 앙숙 중의 앙숙
굳이 얽히지 않아도 지나갈 수 있는 시간을 지겹게 얽히면서 감정 소모하는 관계
그러니 제가 은혜의 입장이었으면 아마 저도 똑같이 물어봤을거다
너 설마 이이경이랑 뭐 있어?
라고.
어차피
응, 나 이이경한테 좀 떨려
라고 말해봤자 믿지 않았을 거다
아니 오히려 황당하게 농담하지 말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 얼굴을 너무 잘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게 얼마나 말이 안되는 소리인 줄 아니까
그 말이 떠오른 스스로가 너무 당혹 스러워서
혹시나 혹시나 들킬까봐 더 방어적으로 대답하고 말았다
정면으로 부정하는 말을.
사실 은혜는 그렇게 관심있었던 것도 아니었을텐데
그냥 설마 하는 생각에,
당연히 아니라는 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하고 물어본 걸텐데
그렇게 정색하고 대답할 필요 같은 건 없었을 텐데
그저
아니.
라는 한마디면 됐을 걸.
그랬으면 그냥,
그냥
혼자 조금 떨렸었어, 정도로
3학년으로 가버릴 수 있었을텐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 찜찜한 마음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머리를 굴려보지만
좋은 생각이 이렇게 금새 날 거라면 아까 학교에서 마무리할 수 있었을게다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오늘따라 가방은 또 왜 이렇게 무거운지
어느새 학생들이 다 나가버린 강의실을 천천히 빠져나온다
이상하게 아직도 복도에 학생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하나같이 손에는 똑같은 프린트물이 담긴 파일을 들고 있다
경민은 마지막으로 들었던 실전 문제집,이란 단어를 떠올리고 천천히 로비를 향해 걸어간다
거의 사람이 없는 텅빈 로비 한쪽에 몇몇이 모여 좀전에 본 그 파일을 집어들고 있다
혹시나, 그럴리는 없지만, 모자라기라도 할까봐 조급한 걸음으로 다가가 파일이 쌓여있는 테이블에 손을 뻗는다
- 어,
동시에 같은 파일을 집은 손이 있다
아래에 남은 게 있으니 그걸 집으면 그만이다 싶어서 손을 거둬들인다
다른 손이 파일을 가져가길 기다리지만 파일은 그대로 놓인 채로, 손의 주인이 말한다
- 이거 가져가
누구길래,
고개를 드니 잊고 있었던 얼굴이 저를 내려다본다
이경과 똑닮은 얼굴을 한 영훈이
말없이 저를 바라보는 경민이 어색한지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리고 놓인 파일을 집어들어 경민에게 건넨다
- 자,
영훈이 건넨 파일을 뻣뻣하게 받아든다
이경 때문에 정신이 팔려서 영훈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아마도 저와 같은 강의실 어딘가에서 수업을 들었을텐데
- 집에 가?
가만히 선 경민에게 영훈이 묻는다
다정한 어조에 경민은 어쩐지 괴로워진다
영훈에게 이경의 모습이 겹쳐보인다
이경은 저에게 한번도 저렇게 다정하지 않았고 저도 그렇게 친근하게 굴어본 적은 없다
그런데 어쩐지 영훈의 목소리나 얼굴이 제가 기억하는 이경과 닮은 것 같아서
아마 이경이 다정하게 말하면 저런 표정이고 저런 목소리일까 싶은 생각이 든다
한번도 그런 일이 없었고 그런 일을 바래본 적도 없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자, 제가 오늘 이경에게 해버린 폭언 때문에 그 다정함을 날려버린 것 같아서
경민은 조금 억울하고 그런 말을 한 제 자신이 미워진다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서 경민은 대답 대신 그냥 학원을 나와버린다
약간 느긋한 보폭으로 조금 뒤에서 누군가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진다
고개를 반만 돌려 바라보니 영훈이 어색하게 걸어오는 중이다
한 손으로 배낭 끝을 쥐고 다른 손으로 휴대폰의 뭔가를 확인하는 것 같은 얌전한 모습을 보니,
이경을 겹쳐봤던 제가 지금 이경에게 신경이 쏠려도 단단히 쏠려 있구나 싶다
얼굴만 닮았지, 분위기는 조금도 같지 않은데
어째서 이경이 이런 모습일거라고 생각하고 아쉬워한 걸까
멈칫,하고 걸음을 멈춘 경민에게 조심스레 영훈이 다가온다
- 지난번에는 그렇게 가버려서 미안해,
약간 갈라지는 목소리에, 경민은 영훈이 저와 같은 과라는 걸 느낀다
아마도 제가 이경에게 내내 망설이다 말하지 못했듯이
영훈도 지난 번 그렇게 갑자기 사라진 것에 대해 내내 저에게 말하고 싶었던 걸게다
지금 자신도 이경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경민은 고개를 젓는다
- 괜찮아
- 오늘은 진짜 데려다줄게, 시간 충분하니까
- ... 그러던가
경민의 말에 영훈이 먼저 나선다
지난번에 걸었던 큰길 쪽이지만, 경민은 굳이 정정하지 않는다
- 들어봤어?
조용히 경민 옆을 걷던 영훈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묻는다
경민은 갑작스런 말에 의미를 헤아리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 응
- 좋지?
- 응, 좋더라
- 거봐 좋아하게 될거라니까
....좋아하게.....
되었다
들국화의 노래들 만이 아니라,
그 들국화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그 얼굴을,
경민은 또다시 잊고 있던 그 순간에 마음이 욱신거리는 걸 느낀다
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그 순간에 온 몸이 떨리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아프다
좋았다,라는 경민의 말에 약간 들뜬 것처럼 보이던 영훈이
울상이 된 채 침묵하는 경민을 보고 조심스레 묻는다
- 무슨 일 있었어?
친근하게 허리를 굽혀 고개 숙인 저와 눈을 맞추는 영훈의 태도에 놀라 경민이 움찔 뒤로 물러선다
경계하는 듯 굳은 경민의 몸짓에 영훈도 어색하게 뒤로 한발 물러선다
- 미안,
서툰 사과에 경민은 대답 없이 걸음을 다시 옮긴다
오늘은 정말 최악이다
어서 집에 가서 자고 싶다
그 생각 뿐
기계적으로 발을 옮겨 걷고 있는 경민의 옆을 조용히 따르던 영훈이
얼마쯤 걸었을까 불쑥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 말해버리는 편이 좋아
- 어?
- 혹시 다른 사람이 신경쓰여서 말하지 못한 게 있다면 말해버리는 편이 좋아
갑작스런 영훈의 말이 좀전까지 저를 괴롭히던 그 문제를 그대로 저격해서
경민은 저도 모르게 발칵 화가 나 고개를 돌리고 빠르게 걸어가버린다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저런 소리야!
급하게 좇아온 영훈이 경민의 어깨를 잡는다
- 이거 놔
- 아... 미안
제가 붙들어놓고 놀랐는지 영훈이 어색하게 손을 뗀다
다시 가버리려고 하는 경민을 보는 눈이 겁먹은 듯 보인다
경민은 마음이 약해진다
- 그런 거 아니야
- 응
- 말 안해서 그런 거 아니라구
- 응
밑도 끝도 없는 제 항변에 영훈이 고개를 끄덕인다
한번만 하면 될 걸 몇번이나 끄덕이는 걸 보자니, 어째 귀엽다
누그러진 분위기를 느꼈는지 영훈이 슬그머니 다가선다
그리고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 ... 정말 말해버리는 편이 나아?
침묵 속에 걷던 경민이 조그만 목소리로 묻는다
이름만 아는 거나 다름 없는 사이인데 이런 걸 묻다니 미쳤나봐, 라고 속으로 생각한다
말을 꺼내놓고 고개를 푹 수그려버린 경민을 본 영훈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한다
- 그런 것 같아
- ... 같은 건 또 뭐야
얼버무리는 영훈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퉁명스런 경민의 대꾸에 영훈은 또 잠시 망설인다
- ... 말을 하는 게 더 나은지는 모르겠는데..... 말을 안하면 안 좋더라구...
그건 또 무슨 의미인가 싶어 영훈을 본다
영훈이 조금 슬픈 표정을 짓고 있다
약간 울 것처럼 글썽한 눈을 보자 경민은 어째서인지 마음이 아프다
- 누가 그래?
- ... 엄마가
지난번엔 아빠, 더니 이번엔 엄마, 인가
저도 모르게 연상되어 버려서 입을 삐죽한다
- 우리 엄마, 말 잘 안하거든 아무리 아파도 아프다, 싫어도 싫어한다.. 혼자 버티기만 하구..
- ... 되게 강한 분인가보다
- 응... 성공한 사람이지 우리 엄마...
조용한 밤 거리를 걸으면서 영훈이 나직이 말한다
이경과 닮은 옆모습이 털어놓은 이야기에 경민은 어쩐지 초현실적인 시간을 걷고 있는 것 같다
근데 그래서 대체 뭐가 문제란 걸까
- 니네 엄마가 뭐라고 해? 너보고 더 강해지라고 강요해?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것 밖에 생각 안 난다
- .... 아니, 우리 엄마 나한테 되게되게 잘해 나한테는 너무너무 상냥한 엄마야
- ... 근데?
상냥하고 성공한 엄마라니 이게 아주 복에 겨웠네, 싶어 불퉁한 목소리로 경민이 묻자 영훈이 서글프게 웃는다
- 자기 생각은 너무 안하니까.. 다른 사람들 신경만 쓰고.. 사실은 약한데... 말도 안하고.. 혼자 다 끌어안고 가니까... 말하면 해결될텐데...
- ... 아들한테 그런 얘기 어떻게 하냐?
- ... 그런가?
퉁명스럽게 경민이 말하자 영훈이 다시 웃으며 긁적한다
- 하여간, 그러니까, 그냥 말하는 편이 좋다구, 아들한테라도
아직 결혼도 안했는데, 아니 남자도 없는데 뭔 아들.
입을 삐죽내밀며 경민이 대강 고개를 끄덕인다
귀찮아하는 듯 고개를 끄덕인 경민을 확인한 영훈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 어차피, 이이경 때문이겠지만
어?!
경민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라 영훈을 쳐다본다
- 너 방금.
- 응?
- 방금.... 이이경이라고...
- 아...
영훈이 조금 당황한 듯 미간을 찌푸린다
- 아마 그래서가 아닐까 해서, 속상했다면.
- 어떻게....
경민은 말을 더듬는다
오히려 영훈은 당연하다고까지 느껴지는 자연스러운 태도로 말한다
대체 무슨....
- ...이이경을 알아?
경계하는 듯 곤두선 경민의 목소리에 영훈은 그제야 뭔가 잘못되어간다는 걸 느낀다
- 말해, 너 이이경을 어떻게 아는 건데
- 남경민.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영훈의 목소리에 경민은 소름이 돋는다
- 어떻게 아는데 너, 내 이름은, 그리고 이이경은
- 그거야 지난번에,
- 나 말한 적 없어, 너한테 내 이름
덜덜 떨면서도 애써 침착한 듯 가장한 경민의 말에 영훈은 당황한 듯 굳어버린다
- 너, 뭐야
뾰족하게 날 선 경민의 말에 영훈의 눈이 불안하게 움직인다
인형처럼 굳어버린 채 손만 파르르 떨린다
- 너 누구야, 너 ... 너 .... 이이경이 보냈니? 둘이 무슨 관계야?
- 아니야. 그 사람은 날 몰라
영훈이 세차게 부정한다
그게 경민의 의심을 더 부채질한다
둘이 지나치게 닮았을 때 부터 생각했어야 했다
마음이 흔들리는 일 같은 건 아예 없었어야 했어
흔들리는 저를 두고 낄낄대는 장면을 생각하자 화가 치솟는다
- 나 갖고 노니까 좋았어? 내가 너랑 이이경이랑 착각하니까 재미있었어? 언제 어디서부터야? 니네 둘이 짜고 어디까지 한거야?
- 아니야, 진짜로 그런 거, 정말이야 난 그냥...
경민을 향해 무의식중에 뻗는 영훈의 손을 밀쳐내버린다
영훈의 팔이 끈이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툭,하고 떨어진다
절망한 듯 영훈이 고개를 떨군다
경민은 화를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다시 한번 말한다
- 너 진짜 뭐야
- ... 말하면 들어줄거야?
영훈이 작게 입술을 달싹여 말한다
- 말하면 믿어줄거야?
고개를 든 영훈이 금새라도 울 것처럼 글썽인다
간절한 표정에 경민은 마음이 약해진다
하지만,
역시 이상하잖아
- ... 아니.
경민은 차갑게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한 발 뒤로 물러선다
- 뭔지 모르지만, 지금까지야. 더 안 당해.
역시 낯선 사람은 조심하라는 부모님 말씀을 들었어야했다
뭘 믿고 여기까지 같이 걸어온 걸까
최악의 날이다
여기서부터 정말 집으로 빛의 속도로 사라지고 싶다
지친 표정으로 비틀비틀 뒷걸음질 치는 경민을 영훈이 멈칫거리며 따라온다
- 오지마
- 한번만, 들어줘
냉정한 경민의 말에 영훈이 간청하는 목소리로 말한다
- 내가 왜 그래야하는데
황당함마저 섞인 경민의 말에 영훈이 더이상 다가오지 못하고 팔을 늘어뜨린다
그런 영훈의 모습에 경민은 문득 왜인지 알 수 없는 안쓰런 마음이 들지만 무시하고 돌아선다
확,하고 뒤에서 경민을 돌려세운다
무방비하게 등을 보였던 경민은 그대로 저항도 못하고 끌려간다
- 이거, 윽, 놔, 이자식아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쳐보지만
경민을 끌어안은 영훈의 팔이 너무 단단해서 옴쭉달싹할 수도 없다
겁이 덜컥난다
지금부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걸까
- 놔줘 제발
덜덜 떨면서 저도 모르게 애원해본다
- 부탁이야,
부탁하고 싶은 건 경민인데 영훈이 뭘 부탁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경민은 딱딱하게 몸이 굳어버린다
- 한번만 얘기를 들어줘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영훈이 간절하게 속삭인다
귀에 울리는 낮은 목소리에 경민은 이 뜬금없는 문장은 뭘까 의아해진다
- .... 너 진짜 뭐니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경민이 다시한번 묻는다
잠시 침묵하던 영훈이 겨우 끌어올린 목소리로 말한다
- 한번만, 더 기회를 줘요.. ...제발....
속삭이는 영훈의 마지막 말이 흘리듯 스륵 지나간다
그나마 조금씩 떨리기라도 하던 몸이 그대로 멈춘다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걸까
잠시 제 귀를 의심한다
방금.... 분명 그렇게 부른거 맞지... 엄마...?
얘..... 사실은 미친 애였나......?
아까부터 엄마 타령이더니 사실 알고 보면 뭔가의 충격으로 저러는 건가?
처음부터 스토커였나...?
위험해
위험해
위험해
머릿 속에서 빨간 경고등이 미친 듯이 울린다
어쩌지 어떻게 빠져나가지 여기서
어째서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거지
왜 아무도 없어
저에게 애원하듯 중얼거리고 있는 영훈의 말이 더이상 들리지 않는다
경민의 몸이 다시 사시나무 떨 듯 떨리기 시작한다
제발, 누구든 제발
갑자기 골목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가까워지려는 소리에 경민이 젖먹던 힘까지 끌어내서 몸부림치며 소리지른다
- 도와주세요!
영훈이 순간 멈칫하며 팔에 힘이 약해진다
뒤쪽의 발걸음 소리가 조금 급해지는 게 들린다
타이밍을 놓치지 않으려고 경민은 미친 듯이 팔을 밀쳐낸다
- 거기 뭐야?!
뒤쪽에서 외치는 소리에 영훈이 경민을 놓아주고 물러선다
잠시 스친 눈빛이, 아주 많이 학교에서 보았던 이경의 그것과 닮아 있어서 경민은 제가 처한 상황도 잊고 멍해진다
상처입고, 그리고 뭔가 간절히 말하는,
왜,
날 그렇게 보는 거지
혼란에 빠진 경민을 두고 영훈이 뛰어가버린다
뒤쪽에서 뛰어오던 발 소리가 제 옆에 멈춘다
경민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 ... 남경민?
조금 당황한 듯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경민이 천천히 고개를 든다
곤란한 표정으로 얼굴을 굳히고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이경을 보자 갑자기 주룩, 눈물이 난다
- 야... 놀랬냐?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는 경민을 대체 어째야할지 모르겠다는 듯
엉거주춤 서서 손을 내밀지도 거두지도 못한 채 이경이 묻는다
- 그러게, 넌 기집애가 밤중에 무섭지도 않냐 혼자 돌아다니고,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퉁명스럽게 말하는 이경의 말에 경민은 두 손으로 쓱쓱 눈물을 닦고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그리고 계속 여자애가 어쩌고 겁도 없으니 어쩌고 하는 이경에게 말한다
- 너, 쌍둥이야?
- 허?
- 아니면 너랑 똑같이 생겼는데 너보다 훨씬 공부 잘하는 형이나 동생이나 사촌 있어?
- 뭐야 그게
엉뚱한 경민의 질문에 황당한 표정으로 보던 이경은
경민이 시선을 피하지 않고 계속 답을 요구하는 눈으로 바라보자 한숨 쉰다
- 나 외아들이야
- 사촌은?
- ... 다들 시집 장가가서 나랑은 한참 멀어 그리고 이런 얼굴이 어디 흔한 줄 아냐? 똑같이 생기기는 무슨
- ... 니 외모 흔해, 길거리에 채여
방금도 봤는데 무슨, 흔해빠졌구만
머리속이 복잡해서 죽을 것 같다
오늘 하루종일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르겠다
황당한 질문에 이어 누가봐도 공격인 말만 던지고 제 생각에 빠진 경민을 보다
이경이 투덜거리며 경민이 떨어트리고 채 줍지 못한 가방을 집어든다
- 집에 가지?
- 어...? 응
- 가자
- 어딜?
- 니네 집
- 니가 왜?
그새 새침해진 경민이 언제 놀라 주저앉아 울었던 적이 있긴 한가 싶다
이경은 끝까지 도도한 경민에 어이가 없어져 한숨을 쉰다
- 너 지금 무섭잖아
- ....
- 혼자 가기 싫잖아
- ....
어쩐지 인정하기 싫다
- 그럴 땐 그냥 고맙습니다, 하는 거야 넌 하여간 어떻게 그런 기본적인 말도 할 줄을 모르냐
- 내가 뭘..... 니가 그러는 게 이상하잖아,
- 난 양아치니까?
피식 웃으며 무거운 단어를 내뱉는 이경의 말에 경민의 눈이 커진다
우물쭈물 입술을 몇번이나 깨물었다 떼면서 망설이는 경민을 힐끗 보고 이경이 무심하게 한 발 앞선다
- 넌 하여간, 말 좀 곱게 해라 얼굴은 이쁜 게
아무렇지 않게 흘린 이경의 말에
안그래도 복잡해서 터질 것 같았던 경민의 머리 속이 파앙, 하고 터져버린다
오늘 있었던 일들을 다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긴 올까
그보다,
방금 이경이 던진 말이 경민의 가슴 속에 불꽃 수십개를 놓은 것 같다
- 안 가?
몇발짝 먼저 걸어가다 계속 멈춘 채인 경민을 그제야 돌아보며 이경이 부른다
잠시 두손을 꼭 쥔 채 망설이던 경민이 결심한 듯 걸어가 이경이 메고 있던 가방에 손을 올린다
굳이 제가 메겠다는 건가 싶어
하여간 고집은, 투덜투덜 거리면서 가방을 내어주자
가방을 바로 메는 대신 주섬주섬 가방 속에서 뭔가를 꺼낸다
- 미안해.
한손으로 제대로 메지 않은 가방을 끌어안은채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면서 다른 손으로 이경에게 초코에몽을 내민다
교실에서 경민의 말을 들어버렸을 때 이경이 손에 쥐고 있던 음료수.
그리고 눈치를 보면서 힐끗 돌아보았을 때 짜증 섞인 태도로 마시다말고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던 그, 초코에몽.
저도 좋아하는 음료라 자주 마시긴 했지만 남자애가 좋아하는 걸 본 건 처음이라
의외로 단 걸 좋아하는 입맛이구나 하고 그 심각한 상황에서도 좀 놀라웠다
그래도 어떻게든 사과를 해야지 싶어서 다음 쉬는 시간에 몰래 사왔다가 타이밍을 놓쳐서 결국 지금까지 가방 속에 가지고 있었다
내민 음료를 보고 이경이 곤란한 듯 받지 않고 쭈뼛거린다
제가 주는 건 그렇게 받기 싫은 건가, 그럴 거면 집에 데려다주겠다고는 왜 그런 건지
애써 용기를 낸 경민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진다
- ... 양아치,라고 생각했던 거.. 는 사실인데..
- 헐.
불쑥 튀어나온 경민의 말에 이경이 허탈하게 웃는다
- 그땐 그랬는데.. 지금은... 음... 지금은... 안 그래... 그러니까... 아까..는..
그러니까... 미안해 그렇게 말해서 미안
단어가 뒤죽박죽 섞인 제대로 되지 않은 문장을 말하느라 올 한 해 치 용기와 솔직함은 다 끌어내써버린 것 같다
약간 놀란 표정으로 경민을 내려다보던 이경은
한참 침묵이 흐른 뒤에야 조심스레 그때껏 내밀고 있던 경민의 손에서 음료를 가져간다
- 됐어 그건 뭐, 없는 말도 아니고
자조적인 목소리에 경민은 조금 마음이 욱신 한다
이경은 한 손에 초코에몽을 쥔 채 경민의 한쪽 어깨에서 가방을 도로 받아든다
더이상 말을 꺼내지 못한 채, 나란히 경민의 집을 향한다
- ... 뭐가 제일 좋았냐?
- 응?
- 들국화, 앨범 중에
- ... 제발
경민의 집으로 향하는 마지막 골목 모퉁이 즈음에서 불쑥 이경이 묻는다
경민은 고민할 새도 없이 학교에서 들었던 그 노래의 제목을 꺼내놓는다
- 흐음.
의외라는 듯 이경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 넌?
- 그것만이 내 세상.
- 헤에....
어쩐지 반항하는 분위기가 어울리네, 싶어서 경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공통 관심사가 나왔으니 침묵이 깨질까 싶었는데 더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경민은 그제야 조금 어색해져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
가방이라도 메고 있으면 이 어색한 손을 가방끈을 쥐는데 쓰면 될텐데 자유로워지니까 어째야할지 모르겠다
묵묵히 앞을 보며 걷고 있던 이경이 마침내 경민의 집이 눈에 들어오자 우뚝 멈춰선다
경민이 알아채고 이경에게서 가방을 받아든다
- 고마워
작은 목소리로 말하자
또다시 곤란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던 이경이 묻는다
- 너 매일 이 시간에 다니냐?
- 어?
- 집에 매일 이렇게 늦게 가?
- ... 학원 가면 그렇지.. 왜?
갑작스런 이경의 말에 의아해하며 올려다보는 경민을
이리저리 고민하듯 살펴보던 이경이 한숨처럼 어색하게 말한다
- ... 데려다 줄까?
이경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어서 경민은 그저 평소보다 더 크게 눈을 뜨고 깜빡거린다
우물쭈물하면서 이경이 다시 말한다
- 나, 이 시간쯤에 알바 끝나니까, 괜찮으면 집에 데려다줄게
대답없이 빤히 이경을 쳐다보기만 하는 경민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초조해진다
문득, 또다시 저혼자 앞서나갔나 싶다
- 내가 양아치였긴 한데,
- 아냐,
혹시나 싶은 마음에 변명처럼 말을 꺼내자 경민이 급하게 말을 끊는다
그리고 크게 몇번이나 고개를 젓는다
- 아냐, 그래서 그런 거.
이경도 경민도 또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이경은 이미 할 수 있는 제안을 다 해버렸고
경민은 그에 대해서 어떤 대답을 해야 좋은 건지 헷갈린다
한참을 가로등 아래 선 채로 경민은 망설인다
은혜의 반응을 두려워했던 머리와 지금 두근거리는 마음이 서로 다른 말을 경민에게 한다
언제든 못 참고 가버려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이경은 어째서인지 끈질기게 경민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고개를 숙인 채 망설이는 경민의 침묵이 길었던지 작게 멜로디를 허밍으로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이경이 나직이 흥얼거리는 멜로디에 몇번이나 끄적여봤던 가사를 가만히 붙여본다
... 눈을 들어 내 얼굴을 다시 봐...
경민은 뭔가에 끌린 듯 고개를 든다
이경의 목소리가 뚝, 끊긴다
기대와 불안으로 저를 보는 이경과 마주하자
팡,
하고 또다시 불꽃이 터진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두근거리다 못해 쿵쾅거려서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다
이 소리가 들릴까봐 무서워진다
내가, 잘못 생각한거면 어쩌지
경민은 머리에서 약하게 울리는 경보음을 스스로 차단해버린다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쉬고 이제 더이상은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한 에너지를 끌어내서 대답한다
- 고마워.
짧은 경민의 답에 이경은 잠시 의미를 생각하는 듯 하다가 어색하게 웃는다
- 그래 그럼 내일 보자
- 응, 내일.
돌아서서 왔던 길을 따라가다 고개를 반만 돌려 저를 보고 다시 가는 이경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경민은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서 움직이지 못한다
심장이 뛰다뛰다 지쳐서 이제는 느릿느릿해진 것 같다
심장 박동에 맞춰 호흡마저 느려진 듯 숨이 모자란 것 같다
뭔가 예상치 못한 문을 열어버린 기분.
뭐가 튀어나올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어서 무섭고 두근거린다
정말 말해도 괜찮은 거였을까
말을 하는 편이 좋아,
라고 말했던 이상한 아이 - 영훈이 떠오른다
무서워야 맞는 건데 어째서 아련한건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 말이 아니었으면
이경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
조금은 고마워해야할까
슬퍼보였던 눈을 떠올리고 경민은 떨쳐내려는 듯 고개를 흔든다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 하루,
얼른 내일이 왔으면, 내일은 좀 평온했으면 하고
방금 열어버린 그 상자 안에
부디 생각지 못한 보물이 숨어있길 바라면서
경민은 집을 향해 파다닥 뛰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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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길어.... 근데 끊긴 뭐해서... 고생 많아 읽느라 냔들아... 고마워 ㅠ
+
- 내가 그런 양아치랑 왜, 사귀기는 누가
하필 저는 왜 그 순간 그 자리에 서 있었던걸까
정면으로 부정당하는 말을 듣고도 딱히 변명할 말이 없다는 게 치명적이었다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제가 그동안 해왔던 일들이 부정할 수 없는 양아치 짓이라는 것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저 대놓고 말하지 않는 것 뿐이란 것도
특히나 저 쪼그만 남경민은 저에게 눈을 치켜들고 바락바락 대들 때부터 저에 대해 저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아마도 세상의 모든 사람이 제 과거를 잊어도 마지막까지 잊지 않을 사람 중 하나는 분명 경민일거다
게다가 사귀다니
누가?
이이경이랑 남경민이?
세상이 뒤집힌 것도 아닌데?
그러니 저렇게 말하는 게 당연한 건데
굳은 표정으로 서있는 이경을 알아차린 은혜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린다
내가 무슨 해코지 하는 사람이냐
울컥해서 얼굴이 더 굳어버린다
그때서야 뒤돌아본 경민과 눈이 마주친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보자 조금 비참해진다
차라리 당당했으면 화라도 냈을텐데
화를 내기에도 아니 최소한 못 들은 척 해버리기에도 너무 늦었다
저를 보는 경민의 눈이 순간 일렁인다
비참해진 건 저인데 저를 보고 있는 경민의 눈동자가 절망한 듯 까맣게 가라앉는다
입술이 달싹이려는 걸 발견하고 이경은 그제야 시선을 외면하고 제자리로 걸어온다
자리에 돌아와 앞을 보니 제가 스쳐지나올 때와 같은 자세로 굳어있던 경민이
잠시 후 마법에서 풀리기라도 한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삐그덕거리며 도로 책상으로 고개를 숙인다
고개를 수그리고 약간 어깨를 움츠린
늘 뭔가에 쫓기고 있는 듯한
이미 익숙해진 그 뒷모습이 어쩐지 오늘은 눈에 거슬린다
손가락을 들어 뒤통수를 툭,하고 건드려본다
검지로도 머리통이 가려진다
비율이 어색할정도로 멀었다 경민과 제 자리는
그게 사실이었는데
무슨 생각으로 가까워졌다고 느꼈는지 모를 일이다
처음엔 제 말에 매번 파르르 하면서도 당황한 듯 얼굴이 붉어지는 경민의 반응이 재미있어서였다
어라? 얘가 이런 표정도 하네?
툭 건들면 언제나 같은 반응을 보여서 괜히 더 건드리게 되었다
저에게는 유독 의미있는 들국화를 듣고 있는 경민을 발견하고 새롭게 보이기도 했다
새침하고 싸가지없고 늘 곤두서있기만 한 줄 알았는데
저와 공유하는 점이 있다니, 그것도 여간 신기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경민이 저에게는 조금 부드러워졌다고, 생각했다
그게 들국화 때문이든 뭐 때문이든,
정호나 지훈이만큼은 아니지만 적어도 강주만큼은, 조금은, 가까워졌다고
가까워졌다고 느낀 건 착각이었다
가까워졌을리가 없지 저 남경민과 이이경이
아니 애초에 가까워져야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속상할 이유도 없는데
이경은 머리가 복잡해져서 무의식중에 앞에 놓인 음료수를 집어들고 멍하니 빨대를 꽂는다
단 게 들어오니 좀 나아지는 것도 같다
당분을 쪽쪽 빨아들이고 있는 이경을 황당한 표정으로 보던 지훈이 이경의 머리를 툭 친다
풉,
고대로 입안에 문 액체가 튀어나온다
이새끼가 진짜!
- 야!
- 너 지금 뭐 먹냐?
- 뭐긴 뭐야 ... 우...
손에 들고 있는 걸 확인하고 이경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 너 우유 먹으면 속 아프다며, 초코우유는 되는 거였냐?
초코우유라고 될 리가 없다
아씨,
이경은 손에 쥐었던 초코에몽을 휙하고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
좀 전 시간에 뒤에서 본 경민이 어째 영 기운이 없어 보이던게 매점 갔다가 생각나서
자주 먹는 것 같던 초코 우유를 사 온 거였는데, 줄 타이밍을 놓치고 결국 제가 마셔버리다니
갑자기 속이 뒤틀리는 것 같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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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이경이 집에 일찍 가고, 경민의 초코에몽을 받기 전에 망설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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