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충수업. 2]
=
경민은 무거운 머리를 짚으며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제 밤도 꼬박 눈 뜬 채 새우고 말아서 잠시나마 시간이 날 때 눈을 붙일까 하고 수면제를 먹고 누운게 오후 두시쯤.
창 밖에 들어오던 빛이 없고 어두운 걸 보니 저녁이 되었나보다
깜깜해진 방에 있자니 정말로 혼자가 되어버렸구나 하는 실감이 든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언제부터인가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다
영훈이 캠프에 가거나 연수 때문에 집을 비우고
공방일에 바쁜 이경도 없는 날이면 더더욱 그랬다
그렇지만 깊이 잠들지 못하는 건 그저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경이나 영훈이 집에 있지 않은 시간보다 더 긴 시간동안 경민 자신도 집을 비우곤 했다
이경의 디자인을 바탕으로 처음엔 인터넷을 기반으로 조그맣게 시작했던 구두 회사는 어느새 대규모 생산라인을 갖춘 기업으로 성장했다
아직도 손으로 며칠에 걸려서 작업하는 이경의 구두는 최상위층을 대상으로 하는 주문 제작으로만 돌려졌고
사실상 지금과 같은 모습의 기성화 중심 회사로 성장시킨 건 경민이었다
그만큼 신경써야할 일이 보통 제 나이 또래의 사람들보다 몇배나 많았다
승부욕이 강했던 성격상 기업 운영이, 빠르게 성장하는 걸 지시하고 이끄는 자리가 자신에게 꽤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스트레스를 받아도 그게 당연한 일이라고, 오히려 아무런 스트레스를 받지않는 것이 더 이상하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처음엔 그저 한두시간 간격으로 자다 깨다를 반복하는 정도였다
잠을 깊이 자지 못하면 당연히 다음 날 일정에 영향을 미쳤다
피곤이 쌓일수록 예민해졌다
회사 일에 영향을 주지 않으려고, 집에 혹시라도 걱정을 끼칠까봐
괜찮은 척 버티다보니 스트레스가 더 늘었다
자연스럽게 불면증이 심해졌다
쉬이 잠들지 못하고 자리에 누워서도 계속 뒤척이는 저를
이경은 걱정하는 눈으로 보면서 끌어안은 채 토닥이곤 했다
저를 재우려고 노력하는 걸 알면서도 쉽게 잠이 오진 않았다
구두를 디자인하는 것도 신경이 많이 쓰이는 일이기도 하지만
가죽을 마름질하고 구두를 만드는 일 자체가 긴 육체노동의 연속인 걸 아는 경민은
저 때문에 잠들지 못하고 기다리는 이경에게 미안한 마음에 조금씩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래도 와인 반잔이나 한잔을 마시면 어쨌든 잠들 수 있었다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그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지 못했다
다시 불면증이 찾아왔을 땐, 그땐 더이상 술이 도움이 되지 못했다
마시는 와인의 양을 늘였지만 오히려 다음날 지독한 숙취에 시달려야만 했다
갑작스럽게 술을 마시는 경민을 이경은 걱정했지만 회사일의 일환이라는 말에 더이상 말리지 않았다
자꾸만 중간에 깨어났지만 혹시라도 뒤척였다간 이경이 알아챌까 싶어서
그대로 눈을 뜬 채 가만히 심장 박동에 맞춰 똑딱이는 시계 초침 소리를 세면서 밤을 지나는 일이 잦아졌다
그리고
자주 술자리에서 정신을 잃기 시작한 경민을 주인공으로 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 젊은 나이에 자수성가한 여자.라는 이유로
냉혈한이니, 독한 년이니, 무슨 부정한 방법을 썼을 거라느니, 하는
자신을 향한 이야기들은 - 참을 수 있었다
그런 건 이미 고등학교 때도 숱하게 겪었던,
심지어는 제가 남에게 퍼붓기도 했던,
그래서 아무에게도 상처주지 못하는 열등감에서 비롯된 헛된 말이란 걸 잘 알았다
사업,이란 걸 하다보면 예상치 못한 여러 사람과 얽혀야만 했고 모든 사람과 잘 지낼 수는 없었다
그러니 그런 말은 일이 잘될수록 따라붙는 보너스 같은 거였다
그런 말에 신경쓰는 것보다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 의도했던 대로
이경이 돈이나 이런 것에 신경쓰지 않고 구두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하고
영훈이 충분히 풍요롭게 - 제가 늘 아쉬워했던 집에서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그만큼의 규모를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경민의 마음을 다치게 한 건 다른 이야기였다
이경에 대한.
일년에 열개에서 스무켤레, 한정된 수량의 구두만 직접 제작하는 이경을 두고 하는 말들
잘나가는 부인 덕에 먹고 산다느니
사실은 이미 별거하고 있을 정도로 부부관계가 위기인데 - 그건 이경이 종종 공방에서 작업을 하는 걸 두고 하는 말이었다 - 돈 때문에 억지로 살고 있다느니
저런 독한 여자랑 누가 살고 싶겠냐느니 사실은 지난번에 누구에게 한탄하는 걸 들었다느니
겉으로 보이는 저 다정한 모습들이 다 쇼윈도 부부라느니
하는 이야기들
여전히 제가 잠들지 못하는 날은 토닥여 재울 정도로 다정하고
경민의 구두 만은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고 꼭 제 손으로 제작해서
철마다 안겨주는 이경의 마음이,
설마 그 이야기들처럼 달라졌을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적어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 말들이 저에게 상처를 남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더 끔찍한 소문들은 영훈에 대한 것이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특별했던 영훈을 두고, 이경의 아들이 아닐거라는 말
그건 사실 오래 전부터 있었던 거였지만
이경과 쏙 빼닮은 외모의 영훈을 두고 그런 소문이 도는 것 자체가 우스워서
그저 웃어 넘기고 말았는데 - 그 말이 새삼스럽게 공격해왔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사랑스런 아이를 두고
사실은 경민의 돈으로 얻은 위치라는 둥
치맛바람일 뿐이지 사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다는 둥
아이가 삐뚫어졌다느니 하는 말들,
그 모든 말이 경민을 괴롭혔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욕심이었던 걸까
사실은 이경도 영훈도 괴로워하고 있는데
제가 욕심을 부려서 제 그늘에 가린 구두 장인과 천재 소년으로 살게 한건가
조금 구부정하게 움츠린 이경의 등을 보면 그게 작업 때문에 생긴 버릇이란 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없을 때조차 당당했던 그 등을 작게 만든게 저인가 하는 생각에 괴로웠다
그런 생각이 드는 날이면
하루종일 사로잡혀서 제대로 생각을 할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저보다 더 속상해할 이경에게 차마 티를 낼 수도 없었다
그래서 술을 마셨다
그 악순환.
세상의 모든 말들이 날카로운 유리조각 처럼 저를 향해 날아오는데
저는 마치 옷섶을 풀어헤치고 그 비수들을 그대로 맨 가슴을 드러낸 채 받아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고통스러워도 저에게 맡겨진 자리를 생각하면 버텨낼 수 밖에 없었다
이건 뭔가 정상이 아니야,라고 느꼈을 땐 이미 너무 멀리 와있었다
또다시 술에 취해 집에 돌아온 날
걱정스럽게 너 요즘 왜 이러냐고 말하는 이경을 향해 통제할 수 없는 화를 내고 말았다
그리고 그대로 쓰러졌다
눈을 떴을 때는 병원.
걱정 가득한 눈으로 제 옆을 지키고 있던 건 경민에게는 세상 전부나 다름없는 두 남자.
끝도 없이 이어진 기나긴 검사 동안, 이경은 한번도 경민을 떠나지 않았다
우울증입니다.
의사의 진단이 떨어진 순간 경민은 의사 대신 절망과 죄책감에 휩싸인 이경을 보았다
머리로는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오르내리는 감정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절망의 바닥에서 허우적거리면서 자꾸만 그 절망의 늪으로 이경을 끌어들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작스럽게 폭발하는 자신을 대할 때면 조심스러워지는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견딜 수 없었다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을 제 손으로 불행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고통스럽게 자신을 찔러왔다
헤어져줘
저의 요구에 이경은 아주 오랜만에 분노했다
그렇게 다혈질이면서도 적어도 영훈이 태어난 후로는 저에게 그렇게까지 화를 낸 건 처음이었다
화를 내는 이경의 모습에 안도하는 제자신이 너무 이기적이라고 느껴져서 경민은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면서 그걸 즐기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자신을 향한 분노를 그대로 이경에게 투사했다
내가 이렇게 힘들단 말이야
제발 나 좀 놔줘
네가 옆에 있으면 내가 널 불행하게 하는 것 같아서 더 괴로워
속에 담긴 말들은 하지 못한 채 그저 미친 사람처럼 내뿜는 분노를 그대로 받아내던 이경은
깨진 유리조각에 경민이 다친 날
피를 흘리면서도 이경의 부축을 받길 거부하는 경민을 아주 슬픈 눈으로 보다가 조용히 사라졌다
이경이 사라진 후에도 경민은 비틀거리면서 일상 생활을 계속 했다
회사에 나가 업무를 계속했고 여전히 밤에 잠을 자지 못했다
이경이 없는 집에서 불안해하고 있을 영훈을 위해 안간힘을 써서 적어도 술은 마시지 않았다
나을 거라고 믿지 않았지만 멈추지 않고 약을 먹었다
하지만 문득 문득 생각한다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적어도 영훈이 어른이 될 때까지는 스스로를 놓지 않고 버텨낼 수 있을까
=
약기운 때문에 무거운 몸을 끌고 비틀거리며 물을 마시러 부엌을 향한다
불이 꺼져 깜깜한 거실 한쪽 서재에서 빛이 새어나오는 것이 보인다
경민은 누군가 싶어 조심스럽게 서재로 다가가 문을 연다
- 아,
이십년전의 이경과 똑같은 얼굴을 발견하고 경민은 기시감에 아찔한다
멍해진 경민을 향해 영훈이 다가온다
- 일어나셨어요?
이십년 전의 이경의 얼굴을 하고 지금의 이경과 똑닮은 다정한 어조로 말하는 영훈을 보면서
경민은 영훈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이 생을 놓치지 않아야겠다는 부질없는 다짐을 다시 한다
- 언제 들어왔니? 밥은?
- 좀 전에요, 저녁은 아빠랑 먹었어요. 엄마는요?
- 이제 먹어야지
입맛은 전혀 없지만 영훈이 걱정할까봐 거짓말을 한다
가만히 바라보던 영훈은 경민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거실과 부엌의 불을 켜고 냉장고에서 과일을 꺼낸다
- 놔둬, 엄마가 알아서 먹을게
- 저 먹고 싶어서 그래요 같이 먹어요
걱정끼치는 엄마라는게 서글프다
이경과 헤어지게 되면 영훈도 그리로 보내야할텐데
저 다감한 아이와 떨어져 지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진다
- 드세요
꼼꼼이 씻은 딸기를 담은 접시를 내밀더니
저도 경민의 옆자리에 앉아 하나 집어든다
- 얼른요
- 그래,
걱정하는 티를 숨기지 못하면서도 애써 발랄하게 웃는 것이
지금 아마도 어린애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연기이겠지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다
다들 어디에서 이런 아들을 얻었냐고 태교 비법을 물었지만
사실 영훈을 가졌을 때가 경민의 인생에 있어 최저점이었다
영훈을 낳고 나서도 몇년간은 아이를 제대로 돌보는 게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산후조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백일을 갓 넘긴 영훈을 어린이집 영아반에 맡기고
경민은 피눈물을 삼키면서 출산 4개월만에 업무에 복귀해야만 했다
그때는 아이를 돌본다는 게 사치로 느껴질 정도로 허덕였다
부모, 특히나 엄마의 손길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자랐는데도 영훈은 기적적으로 평범하고, 특별하게 컸다
머리가 좋은 아이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저만 잘난 줄 아는 함정에도 걸리지 않았다
자신의 과거에 대한 반작용이었는지 이경이 유독 영훈을 엄하게 키운 탓도 있었고
아주 어릴 때부터 책을 끼고 사는 영훈이 걱정되어 억지로라도 운동을 시킨 덕도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쳐도 이렇게 나이에 맞지 않게 차분하고 예의가 발랐다
경민은 늘 영훈이 자랑스럽고, 그러면서도 아마 집을 자주 비운 자신 때문에 빨리 어른이 된 것이 아닐까 싶곤 했다
그래서 영훈이 원한다면 뭐든지 해주고 싶었다
딸기를 집어들다말고 영훈을 찬찬히 보자 저를 보고 싱긋 웃는다
경민은 심장이 아파져서 아무 질문이나 해버린다
- 근데 서재에서 뭐 찾고 있었니? 엄마가 찾아줘?
- 음....
조금 망설이더니 영훈이 곤란한 듯 말한다
- 들국화 CD요, 어딨는지 아세요?
- CD?
요즘에 그걸로 음악을 듣기도 하던가?
경민은 잠시 생각한다
방음 시설이 된 서재에 CD 플레이가 가능한 오디오 시설이 갖춰져있긴 하지만
CD로 음악을 들어본 게 언제가 마지막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게다가 들국화,라니
경민은 옛생각이 떠올라 아련해진다
- 위쪽 박스 찾아봤니?
- 거긴 없더라구요... 엄마가 갖고 있는 거 맞죠?
있을만한 곳을 말해주니 영훈이 이미 찾아본 듯 대답하더니 약간 망설이다가 묻는다
저렇게 조심스럽게 물을 내용이 아닌데, 저에게 그정도도 묻기 어려울만큼 부담을 준건가 싶어진다
- 엄마 꺼니까 내가 갖고 있겠지? 음 어디에 뒀을까 버리진 않은 거 같은데
애써 기분을 끌어올리려고 하면서 밝게 대답한다
경민의 대답에 영훈은 조금 당황한 듯 보인다
- 근데 갑자기 들국화 CD는 왜?
- 아.... 생각나서요... 아빠가 오늘 얘기 해서
그러고 보니 이경을 만나고 왔겠구나...
머리가 지끈,하고 아파오는 걸 느끼면서 경민이 참담해지는 심정과 달리 여상한 어조로 말한다
- 아빠는, 잘 있고?
- 네
- 밥은 잘 먹는 거 같아?
- 네
- 그래, 잘 됐네
이경의 소식을 듣자 더 말을 잇기 어려워진다
경민은 숨을 크게 들이 쉬고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 들국화 CD 라고 했지?
- ... 네
엉거주춤 따라 일어서는 영훈에게 지금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미소를 그려보인다
- 찾아보자, 엄마도 도와줄게
=
- 여깄네
한참 서재 구석구석을 수색한 결과
생각지도 못하게, 왜 처음부터 찾아보지 않았나 싶은
CD 꽂이의 칸막이 사이에서 겨우 끼워넣은 들국화 CD를 발견했다
촌스러운 CD 자켓을 보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노래들이 되살아난다
오랜만에 경민의 얼굴에 아련한 미소가 떠오른다
CD 뒷면을 돌려 트랙 리스트를 살펴본다
- 그중에 뭐 좋아하셨어요?
손가락으로 노래 제목을 차근히 짚어내리는 경민의 어깨 너머로 트랙리스트를 함께 보면서 영훈이 궁금해 한다
- 나는 제발, 이었지 아마
- 아빠는요?
- 후훗... 그것만이 네 세상 이었을거야
- 헤에....
- 이건 비밀인데,
- 네
- 네 아빠 그땐 좀 반항아였거든, 좀 나쁘게 말하면 문제아.
아련히 멀리 바라보는 채로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하는
경민의 모습이 너무 오랜만이라 영훈은 두근거린다
- 인기 많았다고 그랬는데 아빠가
- 없었어 인기, 엄마 아니었으면 결혼 못 했을걸? 엄청 못됐었는데 뭐
영훈에게 말을 하면서도 경민의 눈은 이십년 전 어느 날을 헤메고 있다
지금 자신을 괴롭히는 걱정들이 없었던 시절을 떠올리자 잠시나마 경민의 눈에 생기가 돈다
- 그래두 엄마는 좋아했던 거잖아요 아빠
- ... 그랬지, 그 노래랑 엄청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되게 멋있어 보였다?
이경이 공방으로 거처를 옮긴 후
서로 이경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안부만 영훈이 짧게 전하는 정도였는데
오늘의 경민은 아무렇지 않게 이경에 대해 말할 수 있을정도로 괜찮아진 것 같다
영훈은 잠시 망설이다가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꼬리표 붙이듯 꺼낸다
- ....아빠, 작업 끝나면 곧 집에 오신대요
예상치 못한 영훈의 말에 순식간에 현실로 소환된다
그때까지 무장했다고 믿었던 마음이 또 무너져버린다
이경이 떠났다고, 적어도 곧 떠날 거라고 믿고
그게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이라고, 괜찮다고 계속해서 자신을 설득해왔다
이경이 그러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면서도 앞으로 닥칠 일이 두려워져서 울컥 눈물이 날 것 같다
확연히 가라앉은 저를 걱정스럽게 보는 영훈을 마주한 채라
경민은 애써 마음을 다잡는다
- 그래,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그럴 필요 없다고 해야할지
다음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대로 더 말하지 않는다
- 엄마
영훈이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경민을 부른다
그때껏 밝게만 이야기하던 영훈의 진지한 목소리에 경민은 조금 당황한다
-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렇게 심각하게 부르니, 엄마 겁난다?
모르는 척 웃어보이자 잠시 망설이던 영훈이 가만히 다가와 경민을 안는다
키가 이미 이경만큼 커졌다는 건 보아와서 알고 있었지만
안아보니 어른이 되었나 싶어 놀랍다
영훈과 마지막으로 이렇게 안았던게 언제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게
미안하기도 하고 울컥해서 경민은 말없이 영훈의 등을 토닥토닥 한다
- 한번만 들어줘요 아빠 오면
- ....
언젠가 이런 상황이 있었던 것 같은 데자뷰를 느낀다
그건 이경이었을까
이런 목소리가 이런 얼굴로 저에게 말했던 것 같은데.
한번도 이렇게 뭔가를 바란다고 말한 적이 없는 아이가
처음으로 제 의지를 밝히는 말이 이런 거라니
- 나도 아빠도 엄마 너무너무 사랑하니까, 그러니까 한번만... 한번만 기회를 줘요 엄마..
제가 이 아이를 힘들게 하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프다
제 존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힘들게 하고 있다
한번 투정없이 저를 이렇게 따뜻하게 안아주는 영훈과
그렇게 밀어냈어도 결국 돌아오겠다는 이경을 생각하고
경민은 목이 메어 억지로 목소리를 끄집어낸다
- ....그래 영훈아, 아빠 오시면 얘기하자
+
익숙한 멜로디가 들린다
나직하게 흥얼거리는 목소리가 몸을 울리는 것 같다
약기운 때문에 눈꺼풀이 돌덩이처럼 무거워서 눈을 뜰 수가 없어서 경민은 대신 조금 몸을 뒤척인다
몸을 돌리지만 따스한 뭔가가 저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따뜻한 느낌에 안심되면서 자면서도 내내 긴장하고 있던 몸이 느슨해진다
약을 먹어야만 겨우 잠들 수 있는 것도 고역이었지만, 차가운 침대에서 혼자 깨어나는 건 더 괴로웠다
때로 도저히 자리에서 일어날 기운이 나지 않아서 몇시간씩 침대 위에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다
착각이라고 해도 이렇게 따뜻하다,라고 느끼는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눈을 감은 채 생각한다
이게 꿈이라면,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 고
꿈이라면 이 순간을 잊고 싶지 않다
경민은 따스함 속으로 조금 더 파고든다
흥얼거리는 노래 소리가 좀더 가까워진 것 같다
그리고 규칙적인 심장 뛰는 소리가
심장 소리?
경민은 설마, 하는 마음에 억지로 눈을 뜬다
- 깼어?
언제 왔는지 경민에게 한 팔을 내어주고 있던 이경이 나직하게 말한다
너무 오랜만에 이경을 마주하자 경민의 심장이 또 불안하게 뛴다
경민은 말 없이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는다
- 어디서 찾았어 이건?
외면하는 경민을 슬쩍 보고 이경은 못 알아차린 척 묻는다
경민의 눈에 이경이 들고 있는 들국화 시디가 들어온다
- 영훈이가 찾아달라더라구
경민도 무덤덤히 대답한다
과거의 기억이 도움이 된 건지 그나마 저걸 틀어놓고 잠을 청하면 약기운 때문인지 몰라도 푹 잘 수 있었다
조금 전에도 잠을 청하면서 틀어뒀던 기억이 그제야 난다
아마 들었던 음악 소리는 그것이었나보다
- 아 이 노래도 있네, 기억나? 그날, 내가 불렀던 거 니가 엄청 창피해했잖아
트랙리스트를 살피던 이경이 조금 들뜬 어조로 말한다
경민도 이경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제목을 확인하고 그날을 떠올린다
그날,의 빛났던 이경과 저를
바보같고 무모했던 그래서 사랑했던 이경을
그 모습을 간직한 채 지나온 시간들을
그리고 지금 제 앞에서 여전히 눈을 반짝이는 이경을,
경민은 조금 괴로워져서 대답없이 외면한다
그런 경민을 알아채고 이경의 표정도 어두워진다
이경이 가라앉는 걸 느끼고 경민은 또 우울해진다
- 언제 왔어?
경민이 무덤덤히 묻는다
- 좀 전에
- 밥 먹었어?
- 아직이네
- ... 차려줄게 먹고 가
영훈의 말을 생각하면 이경은 잠시 들린게 아니겠지만 경민은 방어막을 친다
밥만 먹고 가는 거여도, 그냥 잠시 들린 거여도 자신이 상처받지 않도록 미리 한발 물러설 준비를 한다
이경은 정말 상이라도 차릴 기세로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는 경민의 손을 붙들어 도로 앉힌다
- 경민아
- .... 싫어
저를 쳐다보지도 않고 하는 대답에 이경은 허탈하게 웃는다
- 싫긴 뭐가 싫어, 아직 말도 안했는데
경민은 입을 꾹 닫는다
이경이 저런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불러올 때면 자신이 거절할 수 없을 거란 걸 경험으로 알고 있다
매번, 그랬다
영훈을 가진 저를 두고 연수를 갔을 때에도
저에게 프로포즈를 했을 때도
헤어지자고 말한 저를 다시 붙들러왔을 때도
언제나 그때마다,
저렇게 제 이름을 불렀다
그러니 지금도 이러다간,
- 들어나보고 싫다고 하지?
- … 싫어, 들으면 싫다고 못하게 할거잖아
- 그건 안 까먹었나보네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경민의 머리를 조심스레 쓸어넘기더니 외면하고 있는 얼굴을 살살 돌려 저를 보게 한다
그리고 자꾸만 뒤로 감추려는 경민의 손을 붙들어 제 손 안에 가두고 자박자박 누른다
- 그럼 헤어지자고 그런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도 기억나?
- 언제적 얘기를...
- 언제적 얘기긴 하네
피식 웃는 이경을 보고 의미가 뭘까, 하는 생각에 경민은 불안해진다
- 근데 어쩌냐 난 이번에도 똑같은데
- ?
- 계속 생각해봤는데 역시, 네 뜻대로 해줄 수 없어
어느새 웃음기가 싹 가신 눈으로 경민을 바라본다
이미 결심이 확고한 목소리로 말한다
- 가자 경민아, 조용한 데 가서 좀 쉬자 우리, 제주도 갈까? 전에 좋아했잖아 거기
- ...영훈 아빠
- ...그거 말고
진지하게 말하다 말고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호칭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불퉁해진 이경 때문에
경민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다가 이런 순간을 잃어야한다는 생각에 우울해진다
- 이경아
- 응?
냉큼 대답하며 기대에 찬 이경을 향해 경민이 차분히 고개 젓는다
- 필요하면 나 혼자 갈게,
- ... 하여간 또 고집부린다 말 좀 들어
한번만 들어줘요.
영훈의 말이 스치고 지나간다
- ... 일은 어쩌게, 영훈이는 또 어쩌구... 당신이 영훈이 데리고 여기 있어야지
- 구두는 아무데서나 만들 수 있어, 영훈이도 엄마랑 함께 있는 걸 더 좋아할거고,
그리고 아들을 그렇게 몰라? 걔가 어디 무슨 학교 다니고 무슨 공부하고 이런 거 때문에 불안해할 애야? 당신이 그렇게 안 키웠잖아
강경한 이경의 말에 경민은 더이상 할 말을 잃는다
하지만,
이란 생각에 힘이 빠져 축 늘어져버리는 경민에게
이경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침대 아래 바닥에서 상자를 집어들어 말없이 내민다
그리고 떨리는 듯 긴장해서 상자를 여는 경민을 바라본다
상자를 연 경민이 당황한 듯 다시 이경을 본다
지금껏 이경이 경민에게 선물했던 구두들은 하나같이 높은 하이힐이었다
그러면서도 많이 걷거나 서 있어도 발이 아프지 않고 편안해서 자신부터 이경의 구두의 팬이었더랬다
그런데 지금 제 눈앞에 있는 건 낮은 굽에 둥글게 발을 감싸는 갈색 단화
- 이제 그만 신어 높은 거, 무리 안해도 돼, 그거 신고 같이 가자
조심스레 상자에서 구두를 꺼내 떨리는 손으로 쓰다듬어보는 경민에게 이경이 말한다
- ... 그치만
- 돈 떨어지면 구두 수선 같은 거 하면 되지 어디 가든 거기 사람들도 신발은 신을 거잖아
- 아깝잖아 이런 구두 만들 수 있는데... 나 때문에
- 어휴, 진짜
이경이 한숨을 푹 쉰다
남한테 핀잔 듣기 싫어하고 한번 꽂히면 어떻게든 쟁취해내는 성격 덕에 사업에도 잘 맞았던 거지만
이럴 땐 좀 져주면 안되나 싶다
- 애초에 내가 왜 구두 만들기 시작한건데,
- 어..?
- 난 그냥 일년에 네 켤레만 만들어도 돼, 자기가 그래놓고는.
핀잔 주는 이경의 말에 경민은 멍해진다
그리고 아주 오래된, 설마 그 말 때문에? 싶을 정도로 사소한 기억을 찾아낸다
뭐야 진짜,
이러면 내가 안된다고 할 수가 없잖아
경민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이경이 손을 들어 뚝뚝 흐르는 눈물을 닦는다
- 같이 가는 거다? 우리 둘이 가도 되고 영훈이 데려가도 되구
경민이 여전히 울면서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 그동안 못한 거 다하자, 하고 싶은 거 다 말해, 괜찮아질거야 우리 분명
믿을 수 없다
괜찮아질까
그러나 제 손을 놓지 않는 이 따뜻함을 믿고 싶다
- 응.
두 눈이 빨개진 채 고개를 끄덕이는 경민을 보다
뭔가 생각난 듯 이경이 장난스럽게 웃는다
- 아니면 우리 통영 갈까?
- 응?
- 이번에는 영훈이 동생 만들면 어때, 영훈이 같은 애가 또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암만해도 거기 기가 좋은거 같아
어휴 진짜
진저리난다는 듯 탁, 밀쳐내자 이경이 오히려 도로 끌어안는다
- 내가 나이가 몇인데,
- 그래도 영 생각이 없는 건 아닌가보네
꼼지락거리며 중얼거리자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들린다
- 뭐든 같이 하자, 그러면 돼 매일 조금씩 좋아지면 돼
강한 목소리에 다시 눈물이 날 것 같다
살짝 몸이 떨린다
바르르 떠는 걸 느꼈는지 경민을 안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간다
- 난 너 포기 안해, 그러니까 너도 하지 마 알았어?
- ... 응,
경민의 가냘픈 대답을 듣고서야 안심했는지 숨막힐 것 같던 포옹이 느슨해진다
이경의 손이 등을 살짝 살짝 토닥이며 나직이 노래를 흥얼거린다
통,통, 하는 심장 소리에 섞여 들리는 아련한 멜로디를 들으며
경민은 오랜만에 긴장을 풀고 나른해진다
얼마나 시간이 걸리든
포기하지 말아줘
나도,
하지 않을게
=====
말한 대로... 처음엔 그냥 영훈이라는 이름 (이이경이랑 똑같은 얼굴에 다른 사람이 있으면 재밌겠다!) 에서 시작했고
만나야 할 사연을 만들다보니 타임슬립이라는 나인의 설정을 가져오게 됐고....그게 전부였다는 거;;
그야말로 설정으로만 이용한거라...혹시라도 나인과 같은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는 냔이 있는게 아닐까 걱정됐어;; 그런거 아니어서 미안;;;;
영훈이가 타입슬립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다른 이야기는 기운이 남으면 나중에.....
읽어준 냔들, 모두 고마워
모두모두 영훈이 같은 아들 낳으시길! (ㅎㅎ)
'school > rain'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학교2013][이경x경민] 여우비.5 (0) | 2013.04.21 |
---|---|
[학교2013][이경x경민] 여우비.4 (0) | 2013.04.19 |
[학교2013][이경x경민] 여우비.3 (0) | 2013.04.17 |
[학교2013][이경x경민] 여우비.2 (0) | 2013.04.12 |
[학교2013][이경x경민] 여우비.1 (0) | 2013.04.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