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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울리지마 - 외전>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자 
뜨거운 햇살과 함께 시큼한 비 내음이 훅하고 풍겨온다 
막 소나기가 지나간 듯 지하철을 타러 내려갈 때보다 
공기가 덜 뜨겁고 청량하다 

웨지힐을 신은 발을 내딛어 입구 계단에서 내려선다 
힐끔, 오른쪽 상점 쇼윈도에 비친 스스로를 바라본다 
흰 민소매 블라우스에 찰랑거리는 시폰 주름치마 
가벼운 옷차림과 달리 검게 늘어진 머리가 영 더워보여서 
가방에서 머리끈을 꺼내 가볍게 묶어 올린다 

흡. 

역시 조금 긴장한 것 같다 
어깨를 한번 툭 털어본다 
몇번이나 이리 빙글 저리 빙글 제 모습을 비춰보고 나서야 
저 상점 안의 사람들이 저를 봤다면 이상하게 생각하겠다 싶은 생각이 떠오른다 
아무렇지 않은 척 탁탁 발을 한번 굴러보고 
립글로스를 가방에서 꺼내 살짝 바른 뒤 
도로 가려던 발걸음을 옮긴다 

부르르. 


손에서 떼어놓지 않던 휴대폰이 울린다 
반갑게 휴대폰 액정을 확인한 나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받을 생각도 않고 액정을 노려보기만 하는 새 뚝,하고 진동이 끊긴다 

그리고 이내 다시 울리기 시작한다 

방금 바른 립글로스가 뭉개지는지도 모르고 
입술을 몇번인가 잘근 씹던 나나는 망설이다 통화 버튼을 누른다 

- ....네 

(어데고?) 

- ... 약속 있어서 잠깐 광화문 나왔어요 

(나온 김에 잠깐 들리라) 

- ... 나중에요 

(니 지금 약속이 틀리대 아나?) 

- ... 나중에 연락드릴게요 들어가세요 

(나나야, 아가) 


살짝 진저리를 치면서 귀에서 조심스레 휴대폰을 뗀 나나는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뒤에도 한참 멍하니 서 있다 
지하철 역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 사이에 멈춘 나나를 
급히 뛰어가던 누군가가 어깨를 탁, 밀치고 지나간다 

그제야 번뜩 정신을 차린다 
낯선 표정으로 멍하니 선 자신을 
마주보고 있던 쇼윈도에서 발견한다 

후우. 

아버지가 문제가 아니다 
지금부터가 더 문제. 





에어컨이 찬 공기를 뿜어내고 있는 카페는 서늘하기까지 하다 
살짝 한기가 들어 몸이 떨린다 
선우는 보고 있던 책을 잠시 덮고 손으로 차갑게 식은 팔뚝을 몇번 문지른다 
햇살이 쨍쨍하게 쏟아지는 유리창을 올려다본다 
아무리 비가 긋고 지나갔대도 아직은 더운 여름 

책장을 덮어둔 책이 제법 두껍다 
이 자리에 앉아 책을 꺼낸 게 한시간 남짓 되었는데 
신경을 온통 창 밖에 집중하고 있어서 열 페이지도 채 보지 못한 것 같다 
괜히 조금이라도 공부해보겠다고 들고 나온 게 바보 같은 짓이었다 
어차피 집중하지도 못할 건데 무겁게 헛수고를 했다 
그냥 가벼운 차림으로 나오는 편이 마음도 몸도 편했을 걸. 

정선우, 너도 어쩔 수 없구나 


피식 웃으며 덮은 김에 책을 가방에 넣어버린다 
그제야 느긋해진 표정으로 창 밖을 본격적으로 관찰하는 선우의 눈에 
길 건너편에 선 나나가 눈에 들어온다 

아는 척을 하려고 가볍게 손을 흔들지만 
나나는 무슨 생각에 빠졌는지 멍한 표정으로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더니 건널목을 건너는 대신 휙 돌아 
건널목 앞에 있던 악세서리 가게 밖에 진열된 거울에 갸우뚱하고 얼굴을 비춰본다 

카페 안에서 그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선우는 
전화를 하려고 휴대폰을 꺼내든 것도 잊어버리고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짓고 만다 

자신만큼이나 긴장하고 있는 게 분명한 나나가 
멀리 있어도 혼자 빛나는 가루라도 뿌린 것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마침내 거울에서 눈을 떼고 잔뜩 긴장한 동작으로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건널목에 서는 걸 보면서 
선우는 나갈 채비를 하고 휴대폰을 들어올린다 

건너편의 나나를 보며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데 
건널목에 서 있던 나나가 손에 쥔 휴대폰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러더니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받은 나나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진다 


무슨 일 있나...? 


선우가 멈칫 망설이는 새 까만 세단 두 대가 미끄러지듯 길가에 멈춘다 
까만 정장 차림의 남자 둘이 앞쪽 차량에서 내린다 
끔찍한 걸 발견이라도 한 듯 나나가 주춤 뒤로 물러선다 
어디선가 본 듯한 광경이란 생각에 미처 닿기 전에 
두 남자가 성큼성큼 나나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몸을 뒤로 빼고 도망치려는 나나를 끌어당긴다 
격렬하게 저항하는 나나는 한 손을 붙들린 채 벗어나려고 애쓴다 

선우는, 

그대로 뛰쳐나가 
단숨에 덩치들과 나나 사이에 끼어든다 

오른손으로 나나를 붙들고 있던 남자의 손목을 비틀어 놓게한 뒤 
자신의 뒤로 나나를 숨긴다 

- 괜찮아? 
- .... 

힐끔 돌아보며 나나에게 묻는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나나의 눈이 안도감 대신 절망에 휩싸인다 
선우는 문득, 데자뷰를 느낀다 
저 절망한 얼굴, 언젠가 본 적 있다 
미처 기억을 다 떠올리기도 전에 남자들이 선우를 위협한다 

- 너 뭐야? 
- 당신들이야말로 뭡니까 백주대로에서 납치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지금? 
- 상관 없는 일이니 그냥 가지? 
- 상관 있거든요 제가 이 아가씨랑 
- 이 새끼가 

주먹이 예고없이 훅, 하고 날아온다 
반사적으로 몸을 숙이려고 하는데 자신 뒤에 나나가 있다는 게 기억난다 
혹시 잘못 빗맞기라도 할까봐 나나를 감싸듯이 살짝만 피하다 결국 한 대 맞고 만다 

- 정선우! 

휘청 하는 선우를 보고 놀란 나나가 비명처럼 소리친다 
김나나를 알고 나서 가장 크게 자신을 부른 것 같다고 상황에 맞지 않게 선우는 생각한다 

- 그냥 거기 있어 

반사적으로 앞으로 나서려고 하는 나나를 선우가 팔을 뻗어 제지한다 
선우를 사이에 두고 뒤에 선 나나를 잡으려고 두 남자가 덤벼들고 
빙글빙글 돌면서 선우가 나나를 숨기는 이상한 대치상황이 계속된다 

- 아씨 꺼져 

조금 더 성격이 급해보이는 키 작은 남자 쪽이 선우에게 주먹을 날리고 
선우는 반사적으로 팔을 올려 주먹을 가드한다 
묵직하게 실리는 힘에 휘청 하면서도 물러서지 않는다 

- 나 이러면 절대 안 가요 
- 이리 오라니까! 
- 가시라구요! 

억지로 나나를 잡으려는 남자들과 몸싸움이 벌어지려는 찰나 
뒤쪽에 서 있던 검은 세단의 창이 스르르 내려간다 

- 고마해라. 

위협적인 낮은 목소리에 남자들이 멈칫 한다 
창 안 쪽에 머리가 하얗게 센 초로의 남자가 굳은 표정으로 앉아있다 
나나의 아버지인 걸 알아차린 선우는 멈칫 하고 나나는 고개를 숙여 외면한다 

- 아가, 타라. 

저를 지목하는 말인걸 알면서도 나나는 입을 꾹 다문 채 대답하지 않는다 

- 니도. 

벽처럼 버티고 선 선우를 한번 보더니 말한다 
갑작스레 지적받은 선우가 나나를 힐끔 본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어하는 자세로 고집스럽게 선 나나의 손을 
가만히 끌어다 제 손 안에 쥔다 

- 어서, 뭐하노 

엄한 목소리가 다시 한번 날아온다 
대답 대신 제 손을 쥐고 있는 선우를 올려다본다 
그때껏 나나의 기색을 살피고 있던 선우가 찡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한다 
손가락을 몇번인가 쥐었다 놨다 하며 망설이던 나나가 
내키지 않는다는 태도로 차에 올라탄다 


꽤나 넓은 차 안인데도 숨막히는 침묵이 흐른다 
아버지와 선우 사이에 나란히 앉아 있던 나나가 
마침내 잔뜩 굳은 목소리로 말한다 


- ... 잠깐이예요.. 간단하게 하세요 
- ... 니 집 나가는 조건이 뭐였는지 잊었나? 
- .... 
- 자꾸 이래 하믄 다시 불러들인데이 
- ... 그러기만 해봐요 

아버지의 위협보다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나는 나직이 응수한다 
이십년 넘게 똑같은 패턴으로 반복된 아버지와의 대치 보다 
가만히 제 옆에 앉아 있는 선우 쪽이 영 신경쓰인다 
아무리 자신이 누구인지, 부모와 어떤 관계인지 다 알고 있는 선우지만 
이렇게 직접 대치하는 모습 보여주고 싶지 않았고, 
되도록이면 이런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도 하고 싶지 않았다 

침묵을 지키는 상황에 지친 나나가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쉰다 
두 부녀의 대화를 그저 듣기만 하고 있던 선우가 
가만히 손을 뻗어 나나의 손을 가볍게 잡고 
살짝 고개를 들어 저를 보는 나나에게 안심하라는 듯 웃는다 

짧게 지나간 이 광경을 보던 나나의 아버지가 
의아하다는 듯 슬쩍 눈을 치켜뜬다 

- 니는 누고? 

으르렁에 가까운 위협적인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선우는 그제야 존재를 인정받았다는 듯 차분히 대답한다 

-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어르신, 정선우입니다. 

흔들림없는 태도가 어쩐지 마음에 거슬린다 
그렇다고 딱히 문제점을 찾아낼 수도 없다 

- 우리 아랑은 무슨 사이고? 
- 교제 중입니다. 

이놈 봐라. 

어지간해서는 눈을 한번쯤 피할 법도 한데 
예의바른 태도이면서도 눈은 내리깔지 않는다 

언제나 자신에게는 지독할 정도로 일직선이던 나나가 
자신과 선우 사이에 낀 채 오가는 문답을 들으며 안절부절, 
긴장했는지 선우가 쥐고 있지 않은 한 손을 살며시 치마에 문지르는 게 보인다 

이런... 어디선가..... 

가늘게 눈을 뜨고 선우를 찬찬히 살펴본다 
그제야 꽤 오래전 기억이 떠오른다 

- 우리 본 적 있제? 
- 네 어르신, 
- ... 또 니가? 그때도 니 나나랑. 
- 아빠!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불안해진 나나가 다급하게 말을 막는다 

그러니까 그때, 
니 마음 상하게 한 놈 내가 찾아내서 혼내주마 
했던 그때도 저런 반응이었던 것 같은데... 

심증을 굳혀 씁쓸한 마음을 숨기고 
아버지는 냉정하게 나나에게 말한다 

- 가만 있어봐라, 야가 지금 니 남자가 되겠나 안카나. 
  그라믄 내도 얘기할 권리가 있는기라, 아이가? 
- 네 어르신 말씀하십시오 

흔들림 없이 냉정하고 예의바른 태도가 영 거슬린다 
사내라면 자고로 젊은 시절 혈기에 막 나가고 지르는 맛도 있어야 하거늘 
대체 이 차가워 보이는 녀석 어디가 좋다는 건지 

못마땅하게 선우를 노려보다 
불안한 듯 두 사람을 번갈아 힐끔거리고 있는 나나가 눈에 들어온다 
도대체 무엇으로 우리 귀한 딸을 이렇게 만든 건가 

- ...니제, 그때 우리 나나 어딨는가 알려달라캤던 놈 
- 맞습니다 어르신 
- ... 우리 아 울린 놈도 니고? 
- 아빠! 
- 니는 좀 가만 있어 봐라. 내 니한테 물은 거 아이다 
- ....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한 발 늦은 선우의 대답에 아버지의 미간이 꿈틀한다 

- 아마? 
- ... 네 

선우의 대답에 가타부타 말 없이 잠깐 골똘히 생각에 잠긴 
나나의 아버지가 이내 잔뜩 굳은 목소리로 말한다 

- ... 이제와 우리 아 건디리는 이유가 뭐고? 한 번 울린 기 모자랐나? 
- ... 아닙니다 
- 그라믄? 
- 아빠, 그만 좀 

보다 못한 나나가 말리려고 끼어든다 

- 나나 니는 가만 있어 봐라 
  대답해봐라 니, 와 이제사 우리 아 만나는 기고? 
- ... 다시 울리진 않을 생각입니다. 

한참 침묵한 뒤 선우가 대답한다 
뒤늦은 대답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고개를 한번 절레 흔든 아버지가 다시 묻는다 

- 니 지금 니 입으로 그랬제, 자 안 울린다고? 
- 네 어르신 
- 니 그 말에 책임 질끼가? 
- .. 네. 

몇번 다짐을 받던 나나의 아버지가 가만히 선우를 쏘아보다가 
그때까지 내지 않았던 가장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한다 

- ... 못 지키믄 그날로 갖다 묻어버린데이, 알았나? 
- 저야말로 그런 일은 없도록 할 생각입니다. 
- 그래....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은 채 또다시 침묵이 흐른다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듯한 나나의 아버지를 향해 
선우가 차분히 입을 뗀다 

- 어르신 

복잡한 표정으로 나나의 아버지가 선우를 바라본다 

- 뭐고. 
- 앞으로 이렇게 사람 보내서 나나 강제로 끌고가지 말아주십시오. 
- 뭐? 

순식간에 공기가 험악해진다 
저를 노려보는 눈길에도 꿈쩍 않고 여상스럽게 시선을 되돌린 선우는 
흔들림 없는 어조로 다시 말한다 

- 나나 이제 성인입니다 억지로 강요하는 일 하지 말아주십시오 
- ..... 


당장이라도 폭력이 날아오고도 남을 긴장감에 
숨막히는 침묵이 흐른다 

대체 이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해야좋을지 몰라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나나를 제외하고 
그 자리에 멈춘 듯 눈 싸움을 하고 있던 두 남자 중 
한참 선우를 노려보던 아버지가 먼저 입을 연다 

- 알았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나나는 조금 놀란다 

- 아빠, 

그제야 나나에게 시선을 돌린 아버지가 누그러진 태도로 말한다 

- 나나, 니도 그래 자꾸 빼먹지 말고 연락 좀 자주 해라 
  니가 제때 밥 무러 오고 그라믄 아부지가 와 니 보겠다고 아-들을 풀겠노 
  내 섭섭구로 도망댕기지 말고 알았나? 

너무 쉽게 풀려버린 태도에 어리둥절해져서 나나는 순순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나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버지가 조용히 선우에게 말한다 

- 그라고, 니. 

아직도 불안해보이던 나나가 선우를 부르는 말에 움찔한다 
오히려 차분한 선우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고개를 휙 저은 나나의 아버지는 
퉁명스럽게 던진다 

- ... 니 패기 하나는 내 인정한다. 
  앞으로 우리 나나한테 잘해라 
- 예 어르신. 

둘을 가만히 보던 아버지가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한다 

- 알았다, 가봐라. 





- 연락드릴게요 
- 안녕히 가십시오 

꾸벅 인사하는 두 사람에게 별다른 대답도 없이 
시크하게 창문이 닫힌 검정 차는 그대로 목적지를 향해 가버린다 

후우 

긴장이 풀려 부르르 몸이 떨린다 
아마 차 안에 있었던 건 십 분도 채 안 될텐데 몇시간이나 지나버린 것 같은 피로가 몰려온다 
풀려버린 정신을 챙기던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다 

- 잠깐, 앉을래? 

나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한다 
그제야 주변을 휙 둘러본 선우는 이 곳이 처음 차에 탔던 장소에서 한참 떨어진 
덕수궁 뒷 길인 걸 깨닫는다 


... 헤어지라고 여기 내려주신건가.... 


덕수궁 돌담길을 걸은 연인은 모두 헤어진다는 속설에 
잠깐 엉뚱한 생각을 떠올린 선우는 
설마 하고 고개를 절레 한 뒤 길 한 쪽 벤치에 다가가앉는다 
여전히 선우에게 손목을 잡힌 채 도도도 따라와 앉은 나나는 
그제야 선우의 얼굴을 찬찬히 본다 

다행히 크게 맞은 건 아니라 상처가 남거나 하진 않을 것 같지만 
좀전에 맞은 아랫입술이 살짝 부어올랐다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선우의 얼굴만 뚫어져라 본다 

- ... 괜찮아? 

여전히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낮은 목소리의 끝이 살짝 떨린다 
살며시 선우의 입술에 손을 가져다 살짝 건드려본다 
아무래도 크게 다친 건 아닌가 겁이 난다 
무표정한 얼굴에 눈물만 글썽하고 차오른다 

그런 나나의 변화를 가만히 보던 선우가 
제 얼굴의 상처를 도닥이고 있는 나나의 손을 잡는다 

- 울지마, 나 아직 산 채로 묻히기 싫어 

자신은 심각해 죽을 지경인데 
웃으면서 고작 한다는 말이 죽기 싫단 소리인 게 얄미워서 
탁 하고 잡힌 손을 뿌리친다 

- 지금 농담할 때야? 이렇게 다쳐놓고...무슨 생각이야 진짜 

중얼중얼 선우의 상처가 안타까운 듯 
어떻게 해, 만 반복하는 나나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선우가 
못 견디겠다는 듯 손을 들어 나나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버린다 

- 왜 이래 
- 안 되겠다 너, 이리 와봐 

귀찮다는 듯 선우의 손을 피해 달아나는 나나의 어깨를 단단히 
붙들어 제 앞에 끌어당겨 등지고 앉는다 
그리고 조금 전 몸싸움 때문에 마구 헝클어져서 간신히 묶여있던 나나의 머리를 푼다 

- ... 내가 할.. 
- 가만 있어 봐 

익숙하지 않은 손길에 영 어색해진 나나가 뒤로 손을 뻗어 머리끈을 달라고 휘적휘적하자 
잔뜩 집중하고 있는 목소리로 선우가 제지한다 
머쓱해진 나나는 그저 손을 내리고 가만히 기다린다 

조심스러운 손이 머리를 몇번인가 천천히 빗어넘기더니 
톡톡 하고 모아서 위쪽으로 들어올린다 
손가락이 머리에 닿을 때마다 자꾸만 짜릿한 기분이 들어서 
나나의 귓볼이 약간 붉어진다 

- ... 너무 ... 능숙한 거 아냐 

민망한 감정을 숨기려고 퉁명스럽게 타박을 준다 
그런 말에도 흔들리지 않는지  
선우는 똑같은 속도로 나나의 머리를 빗어넘기면서 
조금 웃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 동생, 머리 담당이었거든 내가, 오래 못 묶어줬지만. 

아무리 웃는 목소리라도 그렇게 말해버리면 할 말이 없다 
나나는 그저 머리를 맡겨둔 채 슬쩍 눈을 감는다 
역시나 공기가 뜨겁다 
그래도 곧 가을이어서인지 
그늘 아래 앉아 있자니 바람이 사라락 불어와 열기를 날린다 

머리를 만지는 손길에 조금 나른해진 나나는 
겨우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말한다 

- 미안, 아빠 때문에. 

높낮이가 없는 나직한 속삭임 
그게 나나가 감정을 전달하는 최대한의 표현인 걸 아는 선우는 
나나가 볼 수 없는 데도 고개를 젓는다 

- .... 아버님이 너 많이 사랑하시는 거 같더라. 

생각지 못한 대답에 나나는 감고 있던 눈을 뜬다 
그 말을 한 선우의 얼굴을 보고 싶은데 아직도 제 머리칼을 붙들고 있는 통에 돌아볼 수가 없다 
대신 그 짧은 문장이 마음 속에서 몇 번이나 사각거리며 써졌다가 지워졌다가를 반복한다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 같다 

창피해. 

어째서인지 모르는 눈물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버린다 

- 가만. 

제가 그러는 이유를 아는지 모르는지 
선우가 살살 옆머리를 다시 한 번 쓸어넘겨 자연스레 나나의 고개를 들게한다 

- .... 그런 것 같아? 

아직 조금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나나가 묻는다 
그게 무엇이냐고 되묻지도 않고 선우가 대답한다 

- 그래 보여, 

머리끈으로 고정시키려고 서툴게 움직이는 걸 느끼면서 나나가 작게 중얼거린다 

- .... 예뻐하셨대 나 어릴 때 많이 
- 그러신 거 같아 지금도. 
- ... 막무가내인 게 싫어서... 오래 도망다녔는데... 돌아보니까... 그게 사랑하신거구나 싶기도 하고... 

마침내 머리를 다 묶은 선우가 나나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는다 
그제야 자유로워진 나나가 울음을 감추려는 듯 입을 삐죽, 꼭 깨물고 돌아본다 
아직까지 채 날려버리지 못한 눈물 방울을 
아무렇지 않게 한 손으로 쓱 닦아낸 선우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한다 

- 너 울면, 나 산 채로 묻힌다니까. 
- ... 바보 


그걸 농담이라고 하나 싶어서 
진저리를 치며 탁,하고 어깨를 밀쳐내자 
엄살을 부리며 뒤로 나가 떨어진 선우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나에게 손을 내민다 

- 가자 
- 응? 
- 어서, 

선우의 내민 손을 잠시 보던 나나가 가만히 손을 내밀어 잡는다 
나나를 기다리며 긴장한 듯 했던 선우의 얼굴이 여름 햇살에 드러나 미소지며 환하게 빛난다 
가볍게 당기는 손에 이끌려 자리에 일어나는 나나의 머리가 마침 불어온 바람에 살랑,하고 흔들린다 


- 그만, 웃게 해줄게 








모든 로맨스는 고백하는 순간이 결말,이라고 믿기 때문에 날 울리지마는 딱 거기서 완결 했지만 
(나냔은 꽤나 길게 썼다고 생각했는데 많이들 짧다고 해줘서 조금 당황했다는) 
나도 조금 더 써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 생각보다 별로 짧진 않지만 - 짧게.. 쪄와봤어.. 
외전이니까, 부담없이 아이디어 생각나면 이렇게 툭툭 끊기는 장면 단위로 써볼까 싶어 
다 쓰고 나니 대체 이게 무슨 내용이야 싶긴 한데;;일단 썼으니까... 적어도 몇몇 냔들에게는 즐거움이 되길 바라며... 

읽어주는 냔들, 늘 고마워!




Posted by april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