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1994][해태x윤진] 비밀(Mar.96)
(Sequel of '비밀' )
=
[1996년 3월, 강원도]
탁.탁.탁.타닥.탁.
재빠른 타자 소리가 고요한 공간에 울린다
아직 연탄 난로를 쓰는 행정실은 윗공기만 뜨겁게 달아오른 탓에
머리는 약간 아프고 키보드 위를 달리는 손가락 끝은 조금 얼어있다
부르르.
난로 위에 올려뒀던 주전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끓어오른다
혹시나 물이 넘칠까 싶어 모니터를 보고 있던 눈을 잠시 뗀다
넘칠 듯이 들썩거리던 소리가 이내 잦아든다
잠깐 주시하던 눈을 모니터로 돌리고 다시 빠르게 자판을 두드린다
탁.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 그리고 엔터를 누르고 앞에 펼쳐놓은 문서의 페이지를 넘긴다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한다
9시 50분.
아직도 한참이나 남은 서류를 보자니 오늘도 소등시간을 훌쩍 넘겨 내무반에 기어들어가지 싶다
예정에 없던 감사가 시작되었고 자연스럽게 행정병에게 일이 몰린 탓이다
계속된 문서 작업으로 굳어버린 것 같은 손가락을 깍지 끼고 이리저리 돌려서 조금 풀어준다
다시 집중해서 키보드를 두드리는데 안쪽 중대장실 문이 열린다
"충.성."
"충성"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서 경례를 붙인다
퇴근시간이 훌쩍 넘어서까지 중대장실에 머물던 중대장의 얼굴에 피곤이 비친다
"들어가십니까?"
"그래, 당직병은 아직인가?"
어차피 내가 당직병을 겸하는 거나 다름없는데 뭐하러 확인하시나 싶다
당직병인 고참은 잠시 들러 상황을 확인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최근에 '일말상초'라더니 여자친구가 통 예전같지 않다고 하소연하곤 했으니
아마도 지금 공중전화를 붙들고 있을게다
모른 척하고 대답한다
"잠깐 자리 비우셨습니다. 곧 복귀예정입니다."
"당직이 자리를 비우면 어떻게 해. 오면 전해."
제대로 대답 못했다고 혼나려나..
조금 후환이 두렵지만 중대장이 더 높은 사람이니 일단 대답한다
"예. 알겠습니다."
"손일병은 아직 많이 남았나?"
이렇게 일일이 아랫사람 챙기시는 분이 아닌데 오늘 왜 이러시나 모르겠다
책상 위에 쌓아놓은 문서를 손수 넘기시기까지 한다
나는 더이상 문서가 흐트러지는 걸 막기 위해 얼른 고개를 젓는다
"아닙니다. 곧 끝낼 수 있습니다."
"그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쥐고 있던 서류 가방을 고쳐든다
"내일 보자"
"네 들어가십시오. 충.성."
"충성."
나의 경례구호를 대강 받고는 문을 열고 사라진다
그제야 꼿꼿하게 세우고 각잡고 섰던 자세가 허물어진다
그대로 털썩하고 의자에 뒤로 기대 앉는다
윗분들은 좀 일찍 일찍 다니셔야 하는 건데
사모님이 서울에 계신다더니 도통 관사로 돌아갈 생각을 않으신다
얼른 사모님을 모시고 왔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한다
그나마 중대장실이 구분되어 있긴 하지만
이렇게 당직이 걸리거나 야근하는 날에 늦게까지 계시면
아무리 CP 병이 있더라도 - 더구나 오늘처럼 없기라도 하면
남아 있는 행정병으로서는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다
가끔 주전자 물 끓는 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순간을 잠시 즐긴다
행정실에 남아 있는 건 나 혼자
적어도 이십분 정도는 고참인 당직병은 돌아오지 않을테고 어차피 이건 밤새 해야할 일이니
한순간도 혼자 있기란 어려운 군대에서 이정도 사치는 누려도 좋지 않을까
의자에 기대 멍하니 까딱까딱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다가 문득,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는다
상의 주머니에서 꺼낸 제법 두툼한 봉투를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자연스럽게 기대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다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창천동 **번지 신촌하숙 성나정 ]
겉면에 쓰여진 어린아이처럼 동글동글한 글씨를 눈으로 읽는다
이미 여러번, 충분히 여러번 읽었고
설사 읽지 않았다고 해도 잊을래야 잊을 수 있을리 없는 이름인데도
낯선 외국어 문장을 받아든 것처럼 조용히 입 속으로만 소리를 굴려 다시 읽어본다
이미 식사 후 개인 정비 시간에 이 봉투를 수령했지만 차마 뜯지 못했다
대체 이 안에 무슨 말이 있을지
왜 이렇게 두꺼운 건지
.... 그보다 나는 이걸 읽고 과연 어떻게 될런지
예상치 못한 편지를 받아들고 내내 멍하니 앉아 있다가
결국 주머니에 넣은 채 행정실까지 와버렸다
주전자가 두 번 끓어올랐다 가라앉을 동안 가만히 그 봉투를 바라보기만 하다가
마침내 용기를 내서 책상 위 가위로 봉투를 자른다
조심스럽게 봉투에서 꺼낸 것은 몇 장의 종이가 접혀진 두툼한 다발.
천천히 접힌 종이를 편다
『 내 아들, 해태야, 호준아. 잘 지내나 』
그저 정갈하게 흘려쓴 글씨만으로도 서울 어머니인 걸 알아볼 수 있는 편지의 첫 문장을 읽자마자
두려워했던 대로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만다
『 멀리 가야 하는 사정이야 내가 어찌 모르겠냐마는
너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 먹이지 못해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 』
죄송함에 울컥 눈물이 날 것 같다
어머니의 편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걱정 뿐이다
『 올해 강원도에는 눈이 많이 왔다고 하던데 네가 있는 곳은 어떤지 모르겠구나
..............
이제라도 주소를 알았으니 봄되면 아버지랑 면회 한번 갈게
건강히 지내라 거기서는 건강한 게 최고라고 하더라 』
눈 앞이 흐려져 흐릿해진 편지를 넘긴다
『 해태, 니 섭섭데이. 결국 이래 다 알게 될낀데 뭘 그래 숨기고 그랬노 』
봉투에도 쓰여있던 동글동글한 글씨
분명 표준어로 쓴 편지인데 자동으로 사투리가 들린다
까칠하고 다정한 나정의 목소리
애들이 3학년이 되니 다들 휴학이니 군대니 하고 사라져서 학교에서 심심해 죽겠다는 얘기
그나마 남아 있는 애들도 자신과는 놀아주지 않아서 통 재미있는 일이 없다는 이야기
다음번에 나오면 꼭 술 꼭지돌게 마셔보자는, 누가 주당 아니랄까봐 딱 성나정다운 당부
피식 웃으면서 다음 장을 넘긴다
『 잘 지내나. 강원도는 춥다매 』
끝을 한쪽으로 삐쳐쓴 익숙한 글씨.
1월 휴가 때도 결국 말없이 떠났던 것에 대한 섭섭함을 풀지 않았던 성균이다
글씨를 확인하는 순간 욱신, 가슴이 아파온다
대체 이 한 문장을 쓰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을지, 2년이나 한 방을 쓴 내가 더 잘 안다
이 소심한 녀석이 먼저 손을 내밀기 위해서 얼마나 용기를 냈을까
아마도 종이를 몇 장이나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래놓고 쓴 말이 겨우 강원도는 춥다면서. 라는 게 고지식한 이 녀석 답다
『 지낼만 하나. 내도 인자 한 학기만 더 하믄 가야할지도 모르는데 우예야할지 모르겠다.
니는 연락도 없고 군대가 그래 재밌나 』
재미있을리가 있냐 이 녀석아.
분명 울먹울먹 -ㅅ- 표정으로 저를 바라볼 게 떠올라 피식 웃고 만다
서울에 올라와 한 방을 쓰던 처음에도 그렇게 예민하고 까탈스럽게 굴던 녀석이
이제 더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간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무섭겠지
그렇다고 해도 군대와 있는 사람에게 위문 편지를 보내면서
내용의 절반을 입대에 대한 두려움과 스트레스를 토로하는 것으로 채우다니 이녀석, 마이페이스 인 건 여전하다
아니, 과거를 다시 소환하는 것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군대 외에 무엇이 있을까
그게 어쩌면 지금 성균과 나 사이에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주제일지도 모르겠다
씁쓸해져서 얼른 페이지를 넘긴다
『 어이 해태, 군대는 어때? 지낼만해? 지난 번 휴가 땐 내가 전지 훈련 중이라서 못 봐서 너무 아쉬웠다
그리고 서둘러서 갔다면서, 어머님도 많이 아쉬워하시더라 연락 한 번 드려 』
어머니 심기까지 살피다니 역시 섬세한 서울 남자 칠봉이다
짧게나마 얼굴을 맞대긴 했던 다른 신촌하숙 식구들과 달리
지난 1월 일본에서 전지훈련 중이었던 칠봉과는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나저나 이 녀석 분명....
『 나는 요즘 재활 중이야 첫 게임에서 부상 입어버렸거든
올 한해를 날리게 될지도 모른단 생각에 불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재활만 잘하면 괜찮아진다고 하니까 열심히 재활훈련하고 있어 』
아주 가끔 일이 없는 아침,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읽었던 신문에서 칠봉의 부상 소식을 읽었더랬다
아직 서울조차 땅에 추위가 다 가시지 않은 3월 초 있었던 경기에서
상대 타자의 타격에 빗맞은 타구에 맞아 허벅지 부상이었던가 아마
괜찮다, 라고 말하는 녀석의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혹시라도 다음 휴가를 나가게 되면 한번쯤 칠봉에게는 들러야겠다. 라고 생각하며
또다시 한 장을 넘긴다
『 잘 지내고 있는겨? 강원도는 겁나 춥담서 』
대체 강원도에 대해서는 춥다는 것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는 건가 이런 촌놈들.
라고 생각하지만, 스스로도 이곳으로 오기 전까지 강원도에 대해서라곤 아는 게 없었다
본과 1학년의 생활이 벌써부터 얼마나 바쁜지 정신이 없다고
그나마 예과 유예하지 않고 올라온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다 틀려버린 것 같다고 칭얼거리는 편지를 읽다보니
그래도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빙그레의 모습이 떠오른다
도망쳐온 스스로와 비교하면, 이렇게 투덜거려도 그 편이 훨씬 대견하다
쓸쓸하게 웃으며 읽어내려가던 빙그레의 편지 끝에 또다른 글씨가 등장한다
급하게 휘갈겨 쓴 것처럼 보이는 글씨는, 쓰레기의 것.
워메 이 녀석 성님까지 귀찮게 한겨?
『 어이, 비밀많은 동생아, 지낼만하니 연락이 없겠거니 생각한다 』
피식 웃어버린다
분명 인턴 과정에 들어갔을거고 지금 눈코뜰새없이 바쁠텐데
빙그레는 이 한마디를 받으려고 병원까지 찾아간 걸까
아니 어쩌다 마주쳐서 우연히 받아온 걸까
네 형님, 아직 지낼만해서 연락 안 드렸습니다.
속으로, 전해지지 않을 대답을 하고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다
『 잘 지내라, 몸조심 하고. 』
하얀 종이 중간쯤에 쓰여진 짧은 두 마디.
이 여백 가득한 편지.. 이걸 편지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 편지의 주인공을,
더이상의 말도 이름도 없지만 단번에 알아버린다
이걸 용케 나정이 보내는 걸 허락했다, 생각한다
평소의 나정이라면 성의가 없다면서 분명 다시 쓰라고 종용했을텐데
정말 이렇게만 썼던 걸까
봉투를 봉하기 직전 마지막 순간에 집어넣은 걸까
나정의 말 같은 건 들리지 않는다는 듯 무시해버렸을까
손가락 끝으로 동글동글한 글씨를 가만히 쓰다듬어본다
차가운 종이의 감촉 뿐,
그런데도 혹시나, 혹시나 온기가 느껴질까 하는 헛된 생각으로
잘 지내라, 몸조심하고.
그래, 그것 외에 더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결국 이 두툼한 편지의 요약도 그 두 문장 뿐인데
그리고 네가 남겼던 마지막 인사도 그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너를 떠올린다
예상치 못하게 날 놀래켰던 너의 등장을
평소와 같던 토요일,
개인 정비를 끝내고 오랫만에 느긋한 주말을 맞아 늘어져있던 내게 전해졌던 면회 소식.
도무지 찾아올 사람이 떠오르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나간 면회소에서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던 너를 보았을 때
그때 바로 뒷걸음질쳤어야 했는데
바로 돌아서 나가버렸어야 했는데
아니 이미 늦었을까 그때는
미처 어떤 행동을 하기도 전에 나를 발견한 너는
조금 전까지 다소곳하던 태도 같은 건 온데간데 없이 큰소리로 나를 불렀다
"해태! 여그여 여기!"
그 호출을 듣고도
순식간에 이 년 전, 신촌 하숙에서의, 어설프고 행복했던 나를 불러내는 그 호명을 듣고 어떻게 모른 척 할 수 있을까
뒷걸음질치려고 멈칫거리던 발이 멈췄다
혹시나 내가 보지 못했나 싶어 너는 크게 손을 흔들었다
너를 향해 발을 앞으로 내딛기 전 심호흡을 해야만 했다
나는 참으로 재능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연기를, 아주 큰, 연극을, 해야할지도 몰랐으니까
"워째 이름을 불렀는디 대답이 없는가"
네 앞에선 나를 보고 너는 불만스럽게 말했다
"아야, 여서는 아무도 그래 안 불러야"
"그라믄 해태를 해태라 하지 뭐라 한당가"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네가 조금 우스워져서 나는 괜히 각을 잡고 서서 경례를 했다
"충.성. 일병. 손.호.준."
갑작스런 경례에 네가 당혹스럽게 올려다보는 걸 보고 나는 싱긋 웃었다
"이래 부르제"
".... 되얐다, 어서 앉기나 혀 목 아프다"
네 말에 순순히 자리에 앉았고 그리고 물었다
너를 보는 순간 떠올랐던 가장 중요한 질문을
"워찌 알고 왔냐"
"다 아는 방법이 있제, 나의 정보력을 무시허냐 지금"
내가 별명을 지나치게 잘 골라 붙였단 생각에 피식 웃고 말았다
포기를 모르는 정대만.
집념과 행동력에 있어서라면 경상도에는 성나정이, 그리고 전라도에는 조윤진, 네가 있다는 걸 잊었을리가.
그래, 정말로 알아내려고 했다면 너는 어떻게든 알아내고야 말았으리라
"근디, 삼천포는? 천포는 안 왔는가"
문득 허전한 생각에 묻자 넌 얼굴을 찡그렸다
"뭐여, 여그 시방 찾아온거이 나인디 보자마자 천포부터 찾는겨?
암만 느그가 죽고 못 사는 절친이어도 그라는 거 아이제
나의 안부를 먼저 물어야 순서 아닌가. 그라고 나가 가랑 무신 쌍디라도 되야? 으째 나를 보고 갸를 찾는겨?"
섭섭하다는 너에게 나는 대답 대신 두 손을 모아 보였다
나에게는 너희 둘은 너와 성균은, 쌍둥이나 다름없어야했지만
너희 둘을 떼어놓고 따로 생각해서는 안되는 거였지만,
그러나 너는 그 다짐을 알지 못할테니
쩔쩔매는 시늉만 하는 나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너는 의자 아래에서
보자기로 싼 상자를 꺼내 펼쳐놓았다
"오늘은 초행이라 혼자 오니라고 별거 못 싸왔어야, 서울 엄니랑 같이 왔으믄 진수성찬이었을틴디
그라니께 니가 평소에 연락드렸으면 니도 좋고 나도 편허고 좀 좋냐?
대체 무슨 고집이랴 온 사람 고생시키는 그 심보는"
너는 대체 어떻게 여기에 온 걸까
어떻게 이 곳을 알아냈을까
이 시간에 여기 있으려면 너는 대체 서울에서 몇시에 출발을 한걸까
어림잡아도 내가 신촌하숙을 나섰던 첫차를 탔어야할텐데
그러고도 초행길인 이 먼 곳까지 얼마나 헤매면서 온걸까
나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언능 먹어야, 군대서는 고기 잘 못 먹는담서"
가만히 너와 내 앞에 놓인 튀긴 닭이 놓인 상자를 번갈아 보고 있는 내게 너는 다시 한번 재촉했다
설마 서울에서부터 가져오진 않았겠지만 튀긴 닭이라니
또다시 신촌하숙의 밤이 떠올라 울컥,하는 걸 티내지 않으려고 나는 말없이 통닭 한조각을 집어들어 우걱우걱 씹었다
내가 먹는 걸 물끄러미 보던 네가 말했다
"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햐, 누나 요새 돈 번다. 암거나 니 묵고 싶은 거 다 사주고 갈랑게"
누나는 무슨.
"니가 천포헌티나 누나지 어디 나헌티 누나질이여, 엄연히 나가 니보다 생일도 빨라야"
내가 툭 던진 말에 너는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웃기고 있네, 그렇게 엄니 맘을 아프게 하고 나이 같은 소리 헌다.
니가 그라고도 성인이라고 할 수 있냐, 나이를 거꾸로 쳐먹고는 어디서 오빠질을 할라고 확."
아픈 구석을 찔러버리냐 치사하게.
입술을 삐죽하는 나를 물끄러미 보던 너는 내가 닭을 다 먹고 사이다 한 병을 마실 때까지
종알종알 신촌 하숙의 요즘과 어머니가 얼마나 속상해하셨는지와 온갖 바깥소식을 말해주었다
나는 참 오래 너를 지켜봐왔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그렇게 말이 많은 줄은 미처 알지 못했더랬다
"건강혀라, 몸조심하고"
태연하게 PX의 온갖 달달한 과자들을 사서 억지로 안겨준 너는
언제나처럼 무덤덤하게, 이제부터 돌아가야할 길이 얼마나 먼지 알게 뭐냐는 듯
피로감 하나 없이 산뜻하게 돌아섰다
마치 꿈처럼.
잠깐 다녀간 꿈인양.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 내 손에 쥐어진 너의 편지가 그게 꿈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덜컥.
문이 열리고 고참이 들어온다
책상에 기대고 있던 몸을 얼른 일으킨다
"충성"
"어 충성, 별일 없었냐?"
대강 손을 흔드는 걸 보니 전화통화는 그럭저럭 괜찮았나보다
책상 위에 놓아뒀던 편지를 슬쩍 아래로 내려쥔다
"중대장님은 퇴근하셨고 나가시면서 이상병님 찾으셨습니다."
"그래? 뭐라셔?"
"잠깐 나가셨다고 했더니 당직병이 자리 비워도 되느냐고 하셨습니다"
"따로 보고하라는 말씀은 없으셨지? 그럼 됐지 뭐"
기분이 좋은지 별 말을 하지 않는다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본인 책상에 앉는 걸 보다 슬쩍 묻는다
"좋은 일 있으십니까?"
"별 일이 있어야 좋은 일이냐, 그냥 보고 싶은 사람 목소리 들으면 좋은 거지"
뭔가를 찾는 듯 책상을 뒤적이면서 평소보다 조금 높은 톤으로 대답한다
서랍을 몇번인가 열었다 닫았다 하더니만
찾아냈는지 종이 위에 펼쳐두고 뭔가 끄적이기 시작한다
문득 손에 쥐고 있는 편지가 뜨끈해지는 것 같다
손 안에 있는 이 사연들이, 이 말들이 다 온기를 지닌 것처럼
하나하나의 온도가 더해져서 뜨거워진다
그립다.
나는 생각한다
아주 오랫동안 익숙한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곳으로 배치된 후 첫 휴가를 나갈 때까지 나는 독하게 아무와도 전화통화하지 않고 버텼다
간간이 순천 본가에 안부 편지를 보내기는 했지만 그 외에는 바깥과의 모든 경로를 스스로 차단해버렸다
처음으로 집으로 전화를 건 것도 휴가를 나간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목소리는, 날 반가워할 따뜻한 목소리는
....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지독하게 그립다
그게 누구든, 아무라도
나를 기억하고 있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나는 가만히 책상 아래의 편지를 꼭 쥐고 망설인다
벌써 반년 넘게 일년 가까이 아무와도 연락하지 않은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오늘 도착한 이 편지는, 이 온기들은 이제 그만 나에게 스스로를 허용하라고 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들이 나를 유혹한다
"... 이상병님,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한참을 망설인 뒤 나는 겨우 한심한 질문을 한다
어이없다는 듯 책상에서 고개를 든 고참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도로 뭔가 쓰는데 집중한다
더 말을 하기 전에 행정실 문을 열고 나선다
차가운 공기가 훅,하고 밀려든다
서울은 봄이 왔을지 모르겠지만 강원도는 아직도 겨울이다
아직도 창밖에는 영원히 녹지 않을 것처럼 지난 겨울 내내 내린 눈이 쌓여있다
언젠가는, 정말로 봄이 오면 저 눈도 녹기는 할까.
나는 긴장으로 차가워진 손가락을 바짓자락에 비비면서
침투작전이라도 하듯이 조용히, 조심스럽게
아마도 좀전까지 이상병이 쥐고 있었을 공중전화 수화기를 든다
뚜우 -
하는 신호음이 들린다
선명한 전화 통화음에 번호를 누르려던 손가락이 멈칫 멈춘다
그리고 그대로 꽤 오랫동안 아무 번호도 누르지 못하고 망설인다
공중전화 박스 안에 서서 까맣게 별조차 보이지 않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대체 나는 누구에게 무슨 말이 듣고 싶었을까
누구에게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
너무 오래 참아와서
너무 오래 침묵해서
이제는 단어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파르르 어깨가 떨린다
귀에 대고 있는 차가운 수화기 탓이겠지
아직도 차가운 강원도의 밤 공기 때문이겠지
하아,
하고 한숨을 쉬자 하얀 입김이 까만 밤공기 사이로 흩어져간다
가만히 그걸 보고 있노라니 또다시 수화기를 들고 있던 손이 떨린다
이제 그만 내려놓아야할까
아무도 떠오르지 않는다면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는다면
그래야 하는데
그런데도 왜 이 수화기를 끈질기게 놓을 수 없는지 모르겠다
'사랑해'
가냘프게 마음이 새어나가고 만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이 마음이
혹시나 들킬까봐 전전긍긍하면서 내내 감싸안고
까맣게 잊어버린 척 묻어뒀던 그 말이
아무도 듣지 않는 수화기 너머로 스며들어 사라진다
반갑다고도 할 수 없었다
잘 지냈느냐고 묻지 못했다
다시 오라고도 말하지 못했다
어떻게 그 먼 길을 왔느냐고
어떻게 다시 그 먼 길을 갈 거냐고
아니
잘 들어갔느냐는 말조차 묻지 못했다
혹시라도
혹시라도 이 마음이 흘러나와버릴까봐
혹시라도 그 마음을 네가 듣게 될까봐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뚜.뚜.뚜.
수화기를 내려놓으라는 신호음을 들으며 한참을 더 그렇게 못박힌 듯 서 있다가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귓가를 울리던 신호음이 사라지자 바깥세상으로 닿으려던 시도도 흔적을 잃는다
내내 오른손에 쥐고 있던 동전 두 개를 가만히 몇번인가 만지작거리다 조심스럽게 주머니 속에 떨어트린다
184번째, 투하.
184번째, 실패.
언제쯤이면 더이상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될까
아니,
시도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될 그날이 오긴 올까
300번째,
아니 500번째 투하쯤 되면
그때쯤 되면,
그날이 오면
윤진아.
그럼 나는 너를 그리워하지 않게 될까
나는 네 이름을 더이상 속으로만 부르지 않아도 될까
=
=====================
아직도 막막하지만 그래도 이걸 쓰면서는 울지 않았어. 조금씩, 괜찮아지나봐 역시나 시간이 지나면.
9화 텍스트 예고를 읽으면서 - 어쩌면 이런 글이 배우나 캐릭터에겐 민폐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했어
아마도 9화에서도 해태는 여전히 장난스럽고 쾌활하고 다정한 녀석일테니까, 그런 아이를 자꾸 울리는 건 좋지 않아
그러니 오늘까지. 아마도 아주 짧은 사족글을 덧붙이는 것 외에는 이 이야기는 그만. (하고 싶은데 될라나 음.. 장담은 하지 말아야지;;)
그리고 이제 밝은 거 쓸랑게로.. 해태야 꼭 행복해져라.
그리고 이 글을 읽어주는 냔들, 고마워, 꼭 행복해지길 바래 우리 행복해지려고 살고 행복하려고 드라마도 본거잖아
+
마치 고속버스터미널 대합실 마냥 사람들로 가득차 웅성거리는 면회소에
혼자 테이블을 차지 하고 앉아 있노라니 어쩐지 자꾸만 주눅이 든다
자신답지 않게 움츠러들려고 하는 어깨를 억지로 편다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여기 온 것도 아니고.
그냥, 군복무가 무슨 벼슬인줄 아는지
세상에 하다하다 할 짓이 없어서 군대로 잠수를 탄
못되쳐먹은 친구 한 번 보겠다는 건데.
그래도 마음이 자꾸만 작아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역시 오지 말았어야 했나,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돌아가야하는 걸까
고민하느라 의자에 제대로 앉아 있지 못하고 안절부절 들썩이고 만다
며칠을, 아니 몇주일을 고민하다가 서울 어머니 수첩에서 몰래 너의 집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이미 나정이 너희 집에 전화했지만 너로부터 무슨 말을 들었는지 너희 어머니마저 너의 주소는 알려주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신호음이 가고 네 어머니가 전화를 받을 때까지 나의 심장은 터질 것 같았지만 막상 거짓말은 술술 나왔다
연세대학교 조교실이고
반드시 본인에게 보내 확인을 받아야하는 학과 관련 서류가 있다고
그러니 우편물 송부가 가능한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 강원도 양구군 **읍 제 21사단 63연대 12중대 행정실 손호준 ]
낯선 이름
낯선 주소
내게는 네가 지난 20년을 살아왔을 그 이름보다 2년 동안의 해태,라는 호칭이 더 익숙했다
그날밤 내게 보여줬던 그 진지한 눈빛보다 평소의 장난끼어린 눈빛이 더 익숙했듯이
마치 다른 사람 같은 이름을 몇번인가 다시 읽어보면서
마치 다른 사람 같았던 그날의 너를 떠올렸다
넌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
우리는 기억하지 못해야하지만.
나와 성균이 사귀기 시작했단 걸 신촌하숙 식구들에게 들킨 뒤 가장 심하게 그 사실을 놀려댔던 건 너였다
지독할 정도로 '니는 무슨 생각으로 삼천포랑 사귀냐, 자 잡아먹으려고 그러냐'며 날 놀렸고
성균에게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쟤가 니 목을 가위로 따려고 했던 애였던 걸 잊었냐며, 혹시 협박받아서 사귀는 거냐고
기회만 잡으면 깐족거리는 통에 참다참다 화를 내면서 진짜 가위라도 들고 덤비려고 하면
'아야 친구야 농담 아니냐 농담 다 느그들이 부러워서 글제'
라고 싱글싱글 눙치며 뒤로 빼는 바람에 제대로 마무리한 적은 결국 한번도 없었다
저놈의 자식은 대체 언제 철이 들랑가 모르겠다고
가끔보면 두살 어린노무시끼인 니보다 더 철이 없는 것 같다며 성균에게 투덜거렸던,
그렇게 언제나 장난스럽게 웃기만 했던 네가
단 한 번,
그날 밤.
또다시 하숙집 거실에서 왁자하게 벌어진 술자리의 끝자락에
혹시나 또 폭로전을 하게 될까봐 술을 자제하느라 그나마 제정신이었던 내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는 동안
많이 취하고 지친 모두가 어느새 서로 기댄 채 흔들리고 있던 그 밤
이미 한쪽 팔걸이에 기대있는 너를 피해 소파의 반대쪽에 올라 앉아
바닥의 헤롱거리는 군상들을 보며 쯧쯧거리고 있을 때
네가 나에게 스륵 머리를 기대왔다
그저 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훨씬 또렷하고 진지했던 네 눈을 보기 전까지는
'나는 안되것냐'
너는 그렇게 말했다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나의 어깨에 기대서 알콜냄새가 섞인 숨소리마냥 약하게
'왜 성균이냐'
넌 그렇게도 말했다
'차라리 남이믄 뺏기라도 해볼거인디, 왜... 성균인겨 니는'
너는 그때 성균을 언제나와 같은 삼천포가 아니라 성균,이라 불렀다
나는 너에게 정대만이 아닌 윤진.이었을 것이고 너는 내게 해태가 아닌 호준.이어야만 했을 그 밤
너의 목소리는 무겁게 깔린 밤공기보다 낮았고
그래서 조금만 흔들리면 놓쳐버릴 것처럼 위태로이 흩어졌다
모두가 술에 취해 잠든 것처럼 보였던 그 밤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너의 숨겨진 속살을 보았다
아니 너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네 비밀을 이야기했다
다음 날의 너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너의 진짜 비밀을 이미 알아버렸지만
그러나 여전히 날 놀리고 성균을 걱정하는 듯 쯧쯧거리는 너에게
내가 너의 마음을 들어버렸노라고 말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는
내가 서울에 올라와 처음으로 얻은 친구 - 아니 이젠 숫제 가족이나 다름없는 너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은
너와 마찬가지로 그날 밤의 일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이
날 놀리는 널 지독하게 좇아다니면서 응징하고
성균에게 쟤는 대체 언제 철이 들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리고
나정과 함께 저놈 데려갈 아가씨는 누군지 몰라도 고생길이 훤하다고 걱정하는
언제나와 같은 일상 뿐.
네가 갑작스럽게 입대를 한다며 우는 목소리의 성균이 새벽에 전화를 했을 때도
어쩐지 소리없이 사라질 것 같은 생각에 내려와본 새벽, 막 빠져나가려던 너의 뒷모습을 불렀을 때도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너의 마음을 모르는 척하는 것
네가 바라는 대로 너와 나와 성균 모두가 언제나처럼 티격태격하는 친구인 채로 지내는 것
너는 나에게 친구,
그리고 그 이상의 의미.
그러니까.
꽤 오래 기다린 것 같은데 너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지나온 길을 되짚어본다
네가 그날 새벽 길을 나섰던 그 시간에 출발해서 집에서 지하철을 타고 버스터미널을 가서
버스를 타고도 양구까지 몇시간, 거기서 또 부대까지 가는 버스를 수소문해서 1시간
그날 새벽, 너는 어떤 마음으로 그 길을 모두 지나 이곳에 돌아왔니.
알아줄 수 없는,
알아서는 안되는,
말하지 않는 그 마음을
나를 안았던 너의 떨리던 손이 다 말해버렸는다는 걸 알고 있니.
물어볼 수 없는 질문을 떠올린다
나는 너의 마음을 알아줄 수 없는데
그런데도 그렇게 가버린 네가 마음에 걸려서
잔인하게도 그 마음을 모르는 척 여기까지 와버렸다
내게 네 눈이 말해주길
내가 들었던 그 말이
내가 보았던 그 눈이
내가 느꼈던 그 떨림이
그저 나의 착각일 뿐이라고
지금 너는 그저 잠시 방황하고 있을 뿐
언젠가 우리의 신촌하숙으로 돌아올거다
.... 적어도,
적어도 나라는 이유 때문에 이 중력에서 튕겨져나가는 걸 두고 볼 순 없다
어미새로부터 떨어져나온 아기새들끼리 깃털을 부비며 만들었던 그 세계에서
적어도 나로 인해 네가 떨어져나가도록 두진 않을 거다
나는 너에게 확인받을 것이다
그날 밤 있었던 그 일은 없던 거라고
너도, 나도, 그날의 그 마음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너는 여전히 나의 앙숙이면서 가장 친한 친구라고.
지금 그것이 너와 나 모두에게 잔인한 일이 되더라도
오로지 나의 이기심에서 시작된 일이라도
너와 나와 그리고 널 그리는 모두를 위해서.
마침내 저 문이 열리고 네가 들어온다
조금 야윈 듯이 보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의 너를 먼저 발견하고 고개를 숙인다
잠시만,
잠시,
너의 앙숙인 정대만으로 돌아가기 위해.
고개를 들자 당혹한 표정으로 멈칫 뒤돌아서려는 네가 보인다
"어이, 해태! 여그여 여기"
크게, 절대로 못 들었다고는 말할 수 없도록 힘껏 널 부르는 소리를 듣고
너는 순식간에 그리운 듯 부드러워졌다가 아련하게 슬퍼졌다가 아주 지친 듯한 얼굴이 된다
아주.
많이 지친 것처럼.
지쳐서 길을 잃은 것처럼.
그런 흔적들은 언제 그런 적이나 있었냐는 듯이 나타난 것보다 더 빠르게 순식간에 네 얼굴에서 지워지고
아직도 손을 흔들어 널 부르고 있는 내게 다가온다
예전처럼
예의 그 장난스럽고 다정한 미소를 띄고서
나의 친구 해태로서,
너의 친구 정대만에게.
=
================
세상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윤진이가 몰랐을리가 없지만
의리녀인 그애가 첫 친구이자 서울의 가족이나 다름없는 해태에게 - 이것이 최선이었을거야...